생활 속의 성경 – 화장실 (1) 반갑지 않은 알람 소리가 요란하게 울린다. 분명하게 느끼는 것이지만 본시 침대와 몸은 하나였다. 나누어지질 않는다. 너는 원래 체력이 약해, 그러니 더 자야 해. 보이지 않아 잡히지도 않는 게으름을 잡아채 꾸역꾸역 집어넣고 나서야 겨우 몸이 말을 듣는다. 오늘은 집 밖으로 나가 사람들을 만나야 한다. 샤워기의 물을 트니 비릿한 수돗물 냄새와 시원한 물소리가 난다. 체취와 피지를 없애 준다는 비누로 거품을 낸다. 이때 드는 엉뚱한 생각. 귀찮은데… 안 씻어서 몸에 냄새가 나고 옷도 후줄근하게 입은 채로 그냥 사람들을 만나면 안 되나? 그럼 그 사람은 말은 안 해도 원숭이 보듯 보겠지? 그럼 만나는 사람한테도 씻고 오지 말라고 하면 되잖아. 그럼 원숭이 둘이 만나는 건가? 그래, 말하는 원숭이는 되지 말자. ‘XXX 성당 축성식 기념’이라고 쓰인 수건으로 물기를 닦는다. 그리고 거울을 보며 ‘나’처럼 생긴 사람을 뚫어져라 쳐다본다. 어제도 키가 작았고 오늘도 키가 작다. 한계다. 내일도 어찌할 수 없는 이 한계를 가지고 있겠지. 새롭지도 않은, 평소에 자주 입던 옷을 새롭게 입고 집을 나선다. 이렇게 다른 사람들과 만나기 위해, 나 혼자 자기 몸을 위해 해야만 하는 ‘의식(儀式)’의 시간을 보내고 나면, 나는 어느새 다른 사람과의 관계 속으로 들어가 있다. ‘생활 속의 성경’에서 다섯 번째로 생각해 볼 집 안의 장소는 화장실 혹은 욕실이라고 부르는 곳이다. 사실 이 장소는 사람들에게 많이 생각되어지지 않는 장소이면서도 실제로는 집에서 없어서는 안 될 장소이다. 이곳에서 많은 시간을 ‘주’로 보내지 않지만, 중요한 일을 위해 꼭 거쳐야만 하는 지점인 탓이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이제 막 호감을 느끼게 된 사람을 만난다고 가정해보자. 그는 이 만남을 위해 화장실에서 물로 깨끗하게 자신의 몸을 씻어내고, 좋은 향이 나는 비누와 샴푸로 단장하며, 좀 더 우아하고 매력적으로 보이기 위해 화장품이나 향수 그리고 호감이 가는 몇몇 옷가지를 준비할 것이다. 그리고 그는 그렇게 깨끗하고 말끔하게 차려입은 나 자신을 바라보며 오늘 나와 만나는 그이도 자신을 그렇게 봐주리라는 기대와 함께 외출할 것이다. 이 과정에서 화장실은 그에게 분명한 ‘전’과 ‘후’를 만들어준다. 자신의 몸을 정결하게 하고 또 단장하는 자리를 마련해 주었기 때문이다. 다른 한편으로 이 장소는 앞서 말한 이미지만을 지니고 있지 않다. 사춘기 시절 화장실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생각해보자. 그때만큼 자신의 얼굴과 몸을, 마치 거울 속에 빠져들 듯, 가깝게 ‘들이대는’ 적이 없을 것이다. 내 눈은 왜 이렇게 작은지, 내 얼굴에만 왜 이렇게 여드름이 많은지, 내 다리는 왜 이렇게 짧은지, 내 몸매는 왜 모델과 같지 않은지와 같은, 셀 수도 없고 끊이지도 않는 불만족 속에서 성장한다. 이 과정에서 자신감을 잃기도, 놀림을 받기도, 그래서 자신에게 실망하기도 한다. 제발 내 몸에서 보기 싫은 그 부분이 사라졌으면 하는 마음을 가지면서 말이다. 그러나 어느 순간, 이런 것들이 물로 씻어 씻겨질 수 있는 것이 아님을 알게 되는 때가 누구에게나 찾아온다. 그래서 나의 몸을 어떻게 하면 더 효과적으로 사람들에게 보일 수 있을까 고민하여 연출된 ‘타자화(他者化)된 몸’의 상태, 다시 말해 자신의 몸이 더 이상 본연의 자신과 일치를 이루고 있지 못하여 도구로 전락해버린 그 몸의 상태를 탈피한다. 사람들이 말하는 자본주의의 아름다움이 아닌 하느님께서 창조하신 피조물 나름의 아름다움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그제야 비로소 나는 나의 몸과 화해를 한다. 그렇게 내가 어찌할 바를 몰라 괴로워했던 그 한계는 오히려 하느님의 창조물로써 드러나는 아름다움이 된다. 이 변화의 과정이 내가 나를 바라보는 또 나만 알 수 있는 화장실 거울 앞에서 일어난다. [2020년 7월 26일 연중 제17주일 전주주보 숲정이 3면, 이상훈 안토니오 신부(전주가톨릭신학원)] 생활 속의 성경 – 화장실 (2) 지난 지면을 통해 우리가 화장실에서 체험하는 순간들에 대해 살펴보았다. 이 장소에는 상대를 만나기 위해 내 몸을 깨끗하고 정결하게 하는 모습과 그 누구에게도 허락되지 않은 고유한 개인의 아름다움을 발견하면서 나 자신과 화해하고 또 치유받게 되는 모습이 있다. 자신의 몸을 씻는 행위는 성경에서도 특별한 의미를 지닌다. 사무엘기 하권은 다윗 임금의 흥망성쇠에 대해 다룬다. 다윗은 “만군의 주 하느님께서 그와 함께 계셨기 때문에”(2사무 5,10) 그의 왕권을 확고히 다질 수 있었고, 자신이 수도로 삼은 예루살렘에 하느님의 계약궤를 모셔오게 됐다. 그런데 다윗이 생각하기에 자신은 번듯한 궁에서 편안하게 살고 있음에도 계약 궤는 천막 아래에 머무르고 있다는 사실이 죄스럽게 느껴졌나 보다. 그래서 다윗은 ‘하느님의 집’인 성전을 그분께 지어드리고자 했다(2사무 7장 참조). 이렇게 하느님께 충실했던 다윗이 불의한 방법으로 우리야의 아내인 밧 세바를 취하게 되고 자신이 지은 죄를 덮으려 또 다른 죄를 짓게 되는 상황이 일어난다. 이 지점은 다윗이 내리막길을 내딛게 된 결정적인 계기가 된다(2사무 11장 참조). 내리막길로 들어선 그가 첫 번째로 직면해야만 했던 비극은, 밧 세바로부터 얻은 어린 생명인 아들을 “하느님의 치심”(2사무 12,15 참조)으로 인해 자신의 품으로부터 놓아주어야 했던 사건이다. 다윗은 이 아들을 위해 단식하며 하느님께 호소하였지만, 이 아이는 끝내 죽고 만다. 아들이 죽었다는 소식이 다윗에게 전달되었을 때, 다윗은 전과는 다른 사람처럼 행동한다. “다윗은 바닥에서 일어나 목욕하고 몸에 기름을 바른 다음, 옷을 갈아입고 나서…”(2사무 12,20). 다윗의 이 행위는 무엇을 의미할까? 이 행위는 ‘애도’나 ‘회개’의 시간이 끝났음을 드러내는 것이자 일상적인 삶의 시작을 말한다(2사무 14,2 참조). 결국 ‘씻는다는 행위’나 ‘몸을 물에 담그는 행위’는 전과 후를 분명하게 구분하고, 전에 가졌던 자신의 불순함을 떨쳐냄과 동시에 다시 본래의 방향으로 향해야 할 때 행해진다. 시체에 손을 댔거나 불경한 어떤 것과 접촉이 이루어졌을 때도 마찬가지였다(토빗 2,5 참조). 방문자의 발을 씻어주는 풍습 역시도 음식을 함께 나누기에 앞서 친교를 나눌 수 있는 상태로 옮기는 실제적인 환대 예식에 속하는 것이었다(창세 18,4 참조). 성경에서 물은 때로 다양한 의미를 지닌 상징이 되기도 하는데 상반된 의미가 양립되기도 한다. ‘노아의 홍수’(창세 6,17 참조)처럼 하느님의 분노가 물로 표현되어 모든 것을 덮쳐버릴 것 같지만 어느새 이 물은 ‘구원의 샘’이 된다. “자, 목마른 자들아 모두 물가로 오너라.”(이사 55,1; 요한 7,37-39 참조). 나아가 땅의 비옥함은 물과 연관되어 있기도 하다(시편 65,10-14 참조). 예수님께서는 이런 말씀을 하신 적도 있다. “그분께서는 … 의로운 이에게나 불의한 이에게나 비를 내려주신다”(마태 5,45). 물질적인 축복인 이 비는 곧 하느님 말씀의 상징이 된다(이사 55,10 참조).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따라다니면서 피곤함에 지친 제자들의 발을 향해 자신의 몸을 숙이셨다. 그때 그분께서는 겸손의 좋은 예를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 봉사의 모습을 자신의 몸을 통해 친히 보여주시고 또 제자들이 보도록 하셨다. 만찬 자리의 친교를 위해 먼저 흐르는 물과 따뜻한 손으로 초대된 이의 발을 씻는다. 그러나 이 장면이 베드로의 눈에 거슬렸나 보다. 그는 분명 스승을 존경하는 마음 때문에 발을 씻는 행위를 극구 반대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높은 사람으로서 상대방의 더러운 발을 씻어 준다는 것을 반대하는 행위는 우리 중 많은 이들이 보일 수 있는 자존심에서 기인한 것일 수 있다. 나의 더러움을 높은 사람에게 드러내 약점을 만들 필요가 없다는 생각일 수도 있다. 혹은 내가 나보다 낮은 사람의 발을 씻어 줄 수 없으니, 나보다 높은 사람이 내 발을 씻어 줄 이유가 없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우리는 하느님 앞에서 적이 아니다. 고단한 사회에서 따스한 물의 온기를 느끼고 친밀한 손길에 발을 내어주어 켜켜이 묻은 피로를 씻어내며 집안의 향기가 담긴 수건으로 닦는다는 것은 정말로 특별한 일이다. 우리 집의 누군가를 부드러운 몸짓으로 그가 수고로움에서 벗어나 인간의 신선한 생기를 새롭게 느끼도록 하는 장면은 형제가 되지 못하게 하는 ‘지위고하’나 ‘빈부격차’를 떠나 그가 한 인간으로서 소중한 존재임을 느끼는 순간이 될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말씀하신다. “너희도 서로 발을 씻어 주어야 한다.”(요한 13,14) [2020년 10월 11일 연중 제28주일 전주주보 숲정이 3면, 이상훈 안토니오 신부(전주가톨릭신학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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