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약 성경 다시 읽기] 함께 꿈을 꿉니다 - 티모테오 1서 한 공동체의 지도자가 된다는 건 명예나 권력 뒤에 숨어있는 책임이라는 무게를 마땅히 짊어지는 일이라 생각합니다. 눈 앞의 명예나 한줌 권력에 취한 지도자에게 공동체는 사사로운 노리개일 테지만 막중한 책임에 따른 고통을 감당하는 지도자에겐 경외의 대상이 되기도 하겠지요. 교회 공동체 역시 처음부터 지도자를 필요로 했습니다. 세상의 여느 공동체처럼 교회 공동체가 필요로 한 지도자는 모범적이어야 했고 흠조차 없어야 했습니다.(1티모 3,10) 우리가 읽을 티모테오 1서에는 교회 공동체 지도자가 갖추어야 할 삶의 자세를 쟁여놓고 있습니다. 그리스인 아버지와 유다계 어머니 사이에 태어난 티모테오(사도 16,1)는 바오로의 두 번째 선교 여행부터 동반했습니다. 신앙 공동체의 어렵고 까다로운 문제가 발생할 때마다 바오로는 티모테오를 파견해서 교회의 일치를 도모했지요.(1테살 3,2-6; 1코린 4,17; 필리 2,19-24) 바오로에게 티모테오는 믿음직하고 충직한 동반자였습니다. 바오로가 에페소를 떠나면서 ‘하느님의 집’인 신앙 공동체를 티모테오에게 맡긴 이유는 하나입니다. 선교라는 삶의 궤적 안에서 서로가 주고받은 신뢰와 충실함의 체험 때문입니다. 교회는 그 시작부터 서로가 서로에게 형제요, 자매이며 생명을 공유하는 한몸으로서 스스로를 다잡아 온 것입니다. 사실 복음 선포라는 건, 특정 계급이나 무리가 폐쇄적으로 지니고 있는 우월적 지식의 전달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서로 사랑하라.’는 계명을 주신 것은 각자의 삶 안에서 이웃과의 연대와 친교를 살아내는 것입니다. 티모테오 1서가 여느 편지와 달리 공동체가 아니라 한 개인을 향해 쓰여졌다고 해서, 이른바 개인의 훌륭한 면모나 능력을 바탕으로 한 지도자의 ‘스펙’을 읽어내려는 욕심은 잠시 내려놓았으면 합니다. 중요한 건 친교를 위해 ‘쓰여질’ 사람이 지도자고, ‘친교’가 투영된 모습을 지도자에게서 찾을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티모테오 1서가 ‘잘못된 가르침’에 대해 굳건히 맞서 싸우길 바라는 바오로의 바람으로 시작하는 이유도 바로 ‘친교’ 때문입니다.(1,3) ‘잘못된 가르침’으로 번역된 그리스말은 ‘헤테로디다스칼레오’라는 동사인데 ‘다른 가르침을 전하다.’라는 의미를 지닙니다. 바오로 사도가 갈라디아서에서 ‘다른 복음’(1,6)이라고 일컫는 가르침과 맥을 같이 합니다. 무릇 교회의 가르침은 사도의 권위 아래 전해지고 다듬어지며 많은 열매를 맺어갑니다. 사도의 권위가 중요한 건, 사회적 주류나 개인의 감흥에 따라 진리의 해석이 어지러이 흩어지지 않기 위해서입니다. 진리는 하나로 고정된, 그리하여 누구에게나 똑같이 적용될 수 있는 수학공식이 아닙니다. 진리는 자유롭습니다. 진리는 참여의 대상이지 획득의 대상이 아닙니다. 서로 다른 말마디로 서로 다른 꿈을 꾸고, 서로 다른 가치를 추구한다고 해서 진리가 훼손되는게 아닙니다. 진리는 오히려 서로 다름의 다채로움이 끊임없이 용솟음 치는 곳에서 더욱 진하고 깊게 얻어집니다. ‘잘못된 가르침’이나 ‘다른 복음’은 저만 옳다며, 다른 것을 업신여기는 옹졸함을 기반으로 합니다. 공동체보다는 개인의 영달을 추구하고, 공동체의 친교보다는 개인의 이익에 몰두하는 이들이 ‘잘못된 가르침’의 유혹을 뿌리치지 못합니다.(1티모 6,10) 티모테오 1서 1장 4절에 ‘신화’라는 말마디가 등장합니다. 대개 진리와 대비되는 개념으로(1티모 4,4,; 티토 1,14) 하느님에 대한 신심의 결여(1티모 4,7)로 이해되는 말이 ‘신화’입니다. 진리를 무시하고 하느님께 등돌리는 이들이 바로 ‘잘못된 가르침’을 통해 제 위신과 이기심을 거칠게 표현하는 ‘신화’를 쫓는 무지한 이들입니다. 티모테오는 여러모로 교회 공동체의 모범이 됩니다.(1,18-20; 4,6-16; 6,11-14) 모범적 인물이 될 수 있었던 이유는 지나온 삶의 발자취가 남달라서가 아닙니다. 티모테오는 어렸고 경험이 미천했습니다.(4,12) 건강 또한 위태로웠지요.(5,23) 그럼에도 그는 원로단의 안수를 통해(4,14) 교회의 참된 지도자가 됩니다. 교회 공동체의 조직이 어떠해야 되고(2,1-3,16; 5,3-6,2) 그 지도자들 개개인이 어떠해야 하는가의 문제(3,8-13) 이전에 티모테오 1서가 언급하는 참된 지도자는 공동체와 떼려야 뗄 수 없는 공동체의 한 조각으로서의 제 모습을 중히 여길 줄 알아야 합니다. 하나의 조각은 다른 조각과의 어울림 안에서 제 본디 가치를 완성하는 것이지요. 다양한 조각들을 엮어주고 묶어주는 그 힘은 원로단의 안수, 곧 교회 공동체의 친교와 일치, 바로 그것입니다. 지도자에게 바라는 모범적 모습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교회 공동체가 내세울 수 있는 지도자의 독특한 자질은 공동체와 쌓아가는 신뢰의 여정 안에 도드라집니다. 티모테오 1서 3장 1절에 감독 직분을 맡고 싶어한다는 말에 주목해 봅니다. “어떤 사람이 감독 직분을 맡고 싶어 한다면 훌륭한 직무를 바라는 것입니다.” ‘~하고 싶어하다.’라는 그리스말 동사는 ‘오레고마이’인데, 개인적 열망을 가리키는 동시에 대상에 대한 진정한 사랑과 책임을 느끼는 의미 또한 담고 있습니다. 이를테면 제 욕망이나 욕심으로 감독 직분을 맡고자 하는 게 아니라 직분을 통해 교회 공동체와 그 구성원들을 진정으로 사랑하고 그 사랑이 제 삶의 당연한 책무로 여기는 이들이 지도자라는 말입니다. 티모테오가 바오로 대신 맡게된 에페소 교회는 요한묵시록 안에서도 나타나지요. 요한묵시록 2장에 에페소 교회를 질타하시는 예수님의 말씀은 이렇습니다. “너에게 나무랄 것이 있다. 너는 처음에 지녔던 사랑을 저버린 것이다.”(묵시 2,4) 요한묵시록에 나타난 에페소 교회에 보내는 편지는 사실 교회 지도자들을 향한 비판적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처음 지녔던 사랑’은 공동체의 친교를 소홀히 하는 지도자들의 안이함과 옹졸함을 거슬러 서로를 사랑하고, 사랑하는 데 지치지 말라는 엄중한 경고와 상징입니다. 세상이 어지러울수록 지도자의 가치와 자질은 참 소중한 것이지요. 지도자의 개인적 역량이 어떠한지 묻기 이전에 그리스도인이라면 우리 공동체 구성원 모두가 지도자와 함께 신뢰와 사랑 안에 열심히 참여하고 있는가를 물어야 하겠습니다. 예수님은 둘, 셋이 모인 곳에 함께하시지 독야청청 홀로 빛나는 엘리트와 함께하시는 것이 아니지요. 엘리트가 되고자, 스펙을 쌓고자 난리법석인 이 세상에서 교회의 지도자는 어리고 미천하고 나약할지라도 교회 공동체의 신뢰로 누구보다 현명하고 뛰어나고 굳건할 수 있다는 사실을 티모테오 1서를 통해 읽고 느끼고 깨닫습니다. [월간빛, 2020년 10월호, 박병규 요한보스코 신부(대구가톨릭대학교 신학대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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