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승국 신부의 흥미진진 성경읽기] 대체 집 나간 둘째 아들은 언제 돌아온댜? 세상 견디기 힘든 일 중 하나가 잘 준비되지 않은, 끊길 듯 끊길 듯 그러나 끊어지지 않고 계속되는 강론을 듣는 것입니다. 말씀이 가지를 치고 나가서 도통 원줄기로 돌아오지 않으니 듣고 있는 신자들의 고초가 이만저만이 아닙니다. 이런 강론이 얼마나 괴로웠으면 유럽의 한 교구에서는 신자들을 중심으로 ‘강론 없애기 캠페인’까지 벌인 적이 있답니다. 그러나 잘 준비된 강론, 깊은 묵상과 성찰 속에 우러나온 알찬 강론은 마치 깊은 우물에서 끌어올린 시원한 생명수와 같아서, 세파에 지친 신자들에게 큰 위로와 힘을 줍니다. 강론에 지나치게 큰 의미를 부여하는 동시에, 강론하시는 것을 정말 행복해하는 한 시골 본당 신부님이 계셨습니다. 돌아오는 주일 복음 내용을 보니 이야깃거리가 무궁무진한 ‘되찾은 아들의 비유’였습니다. 신부님은 ‘이게 웬 떡이냐?’며 일주일 전부터 명강론을 준비하고 또 준비하셨습니다. 드디어 주일 교중 미사 시간이 돌아왔습니다. 신부님께서는 완벽하게 준비하신, 세밀하게 손까지 본 강론 보따리를, 존재 자체로 고맙고 사랑스런 신자들, 95퍼센트가 할아버님, 할머님들인 신자들에게 신나게 풀어놓기 시작하셨습니다. 작은아들이 얼마나 불효자인지, 그가 아버지를 떠나가서 얼마나 비참한 삶을 살았는지 그가 저지른 죄가 얼마나 불경스러운 죄인지, 그럼에도 아버지는 식음을 전폐하며 자식을 기다렸다는 것을 그야말로 감동적으로 풀어나가셨습니다. 그러나 한 가지 문제가 발생했습니다. 강론을 듣고 있던 신자들은 이제나저제나 집 나간 작은아들이 돌아오기만을 목 빼고 기다리고 있는데, 30분, 50분, 한 시간이 다 되어가도 돌아올 줄 모르는 것이었습니다. 신자들은 엉덩이를 들썩이고, 연신 하품을 해대며, 시계를 바라보고, 마침내 이렇게 수군거리기 시작했습니다. “워매 징헌 거! 오늘따라 말씀이 참말로 길어뿌네! 대체 집 나간 둘째 아들은 언제 돌아온댜?” 다음 스케줄 때문에 초조하셨던 한 어르신께서는 번쩍 손을 들고 이렇게 말씀하셨답니다. “신부님, 지가 오후에 손주 결혼식도 가야 하는 디, 이제 고만 작은 아들, 싸게 싸게 돌아오라고 하시요!” 탕자의 귀환을 주제로 한 복음 말씀은 신구약 성경을 통틀어 가장 아름답고도 의미심장한 비유로 유명합니다. 그래서인지 많은 영성가들이 이 말씀만으로 수많은 영성 서적들을 저술하고 화가들은 아름다운 작품으로 표현하였습니다. 사실 저희 사제들도 하느님 아버지의 자비가 온 몸과 마음으로 절절히 느껴지는 탕자의 귀환을 주제로 강론하다 보면 자연스레 강론이 길어지곤 합니다. 언젠가 한없이 착하기만 하지 의지는 약한 한 형제가 마땅히 갈 곳이 없다며 취직자리를 알아봐달라 부탁했습니다. 저는 그 형제를 돼지 치는 농장에 소개했습니다. 월급도 그만하면 괜찮고, 시골이라 돈 쓸 일도 없고, 금방 돈을 모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웬걸, 사흘 만에 전화가 왔습니다. “신부님, 저 여기서 도저히 일 못하겠어요. 냄새 때문에 못살겠어요.” 제발 조금만 더 견뎌보라는 말에 그 형제는 제게 빽 소리를 질렀습니다. “신부님이 여기 와서 단 한 시간만이라도 일해보고, 그런 말 하라구요!” 그래서 저는 농장에 한번 찾아가봤습니다. 막상 가보니 돼지 치는 농장에서 일하시는 분들의 고충을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겠더군요. 그 형제에게 주로 맡겨진 일은 하루 온 종일 돼지들이 생산해내는 막대한 배설물들을 치우는 일이었습니다. 잠깐 머물렀는데도 강력한 냄새에 금방 정신이 어질어질해졌습니다. 탕자의 비유에 등장하는 작은아들 역시 지니고 있던 막대한 돈을 다 탕진해버리고 살길이 막막해지자 돼지 치는 농장에 취직했습니다. 작은아들이 돼지 치는 농장에서 주로 한 일 역시 매일 쏟아져나오는 엄청난 양의 배설물들을 치우는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강도 높은 노동에 대한 정당한 대가도 주어지지 않았을뿐더러, 기본적인 끼니조차 제공되지 않았습니다. 인생의 가장 밑바닥까지 내려간 작은아들은 그제야 정신을 차립니다. ‘여기 계속 있다가는 굶어 죽겠구나. 정말 염치 없고 면목 없는 일이겠지만, 그래도 아버지께 돌아가자!’ 아버지 집으로 돌아가는 작은아들의 몰골은 가관도 아니었습니다. 제대로 씻기나 했겠습니까? 땀 냄새, 돼지 배설물 냄새, 별의별 냄새가 코를 찔렀습니다. 맨발에 머리카락은 산발이지 정말 거지 중의 상거지 꼴이었습니다. 그를 보는 사람마다 다들 코를 움켜쥐고 멀찌감치 피해갔습니다. 그가 지나가고 나면 다들 투덜거렸습니다. “저게 사람이냐, 짐승이냐?” 아버지 집 가까이 이르러서는 따가운 눈총들이 더했겠지요. “야, 저게 누구냐? 천하에 몹쓸 작은아들 아냐? 꼴좋다! 불효자식 같으니라구! 빈대도 낯짝이 있지. 그러고도 지가 아버지 집으로 돌아와? 인간의 탈을 쓰고 어떻게 그럴 수 있냐구?” 그러나 이 세상에서 단 한 사람, 유일하게 그러지 않은 사람이 있었습니다. 바로 아버지였습니다. 아버지는 ‘왜 그랬냐’고 따지지도 않았습니다. ‘그러고도 네가 인간이냐?’며 다그치지도 않습니다. ‘돈은 얼마 남았냐’며 호주머니를 뒤지지도 않습니다. 그저 말없이 있는 힘을 다해 작은아들을 자신의 품에 끌어안았습니다. 한 손으로는 ‘내 이제 더 이상 너를 놓치지 않겠노라!’며 작은아들을 꼭 붙들었습니다. 다른 한 손으로는 ‘괜찮다, 다 괜찮다! 너만 살아 돌아왔으면 다 괜찮다!’며 토닥토닥 작은아들의 등을 두드렸습니다. 보십시오. 자비하신 우리 하느님의 얼굴을 가장 명확하게 드러내고 있는 장면입니다. 사실 우리 안에는 자신은 죄 없다 큰소리치며, 돌아온 동생을 손가락질하는 큰아들의 모습과 가슴 치며 탄식하는 작은아들의 이미지가 모두 들어 있습니다. 사실 큰아들은 작은아들보다 더 큰 문제를 안고 있습니다. 판공성사 좀 보라고 외쳐도 ‘나는 아무 죄가 없다!’고 우기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성사 본 지는 5년, 10년이 넘었는데도 말입니다. 동시대를 살아가는 선량한 이웃들을 큰 궁지로 몰아넣는 패악을 저질러 놓고도, 반성은커녕 큰소리치고, 의기양양하게 활보하는 적반하장의 사람들이 있습니다. 우리 시대의 큰아들입니다. 우리는 큰아들에서 작은아들로 넘어가기 위해 부단히 노력해야 합니다. 다만 큰아들에서 작은아들로 넘어온 이후 또 한 가지 과제가 생깁니다. 날이면 날마나 ‘나는 큰 죄인이다.’ ‘나보다 더 큰 죄인 있으면 나와 보라 그래!’라고 외치기만 하며 살아서는 안 될 것입니다. 이제는 작은아들에서 아버지에게로 넘어가야 합니다. 죽을 죄를 짓고 돌아왔지만, 두 손을 활짝 벌리고 뛰어나와 맞이해주신 아버지의 크신 자비를 온 몸으로 느낀 작은아들입니다. 그렇다면 아버지께서 보여주신 그 한없는 따뜻함, 그 극진한 환대를 이제 주변 사람들에게 보여줘야 할 때입니다. 용서받은 자로서 이제 밥 먹듯 용서할 때입니다. 치유받고 구원받은 자로서 이제 틈만 나면 치유와 구원의 손길을 펼칠 때입니다. 탕자의 귀환을 통해 드러난 영적 순환(큰아들-작은아들-아버지), 그것은 오늘 우리네 일상 안에서 부단히 되풀이되어야 할 아름다운 스토리입니다. “참된 신앙은 두려움의 집에서 걸어 나오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를 오래 전부터 기다리고 계시는 사랑 자체이신 아버지 집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헨리 나우웬 신부) * 양승국 - 살레시오회 소속 수도사제. 저서로 『축복의 달인』 『친절한 기도레슨』 『성모님과 함께라면 실패는 없다』 『성모님을 사랑한 성인들』 등이 있다. [생활성서, 2020년 10월호, 양승국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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