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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구약] 하느님 뭐라꼬예?: 야곱과 하느님의 축복
작성자주호식 쪽지 캡슐 작성일2020-11-03 조회수7,396 추천수0

[하느님 뭐라꼬예?] 야곱과 하느님의 축복

 

 

에사우와 야곱의 탄생, 에돔과 이스라엘의 유래

 

창세기 25장 중반부에 다음 이야기가 있습니다. 아브라함의 아들인 이사악이 나이 마흔에 라반의 누이인 레베카를 아내로 맞이하였는데, 그 아내가 임신하지 못하는 몸이었기 때문에 주님께 기도하였습니다.(21절) 이사악의 나이 예순 살이 되었을 때였습니다. 주님께서 그 기도를 들어주시어 임신을 하게 된 레베카는 아기들이 배 속에서 서로 부딪쳐 대자 주님께 문의를 했고, 이에 주님께서는 “너의 배 속에는 두 민족이 들어 있다. 두 겨레가 네 몸에서 나와 갈라지리라. 한 겨레가 다른 겨레보다 강하고 형이 동생을 섬기리라.”(26,23) 하셨습니다.

 

이 말씀대로 야곱은 쌍둥이 형인 에사우와 투쟁하고, 외삼촌 라반과 투쟁하며, 그 아들들에 이르러서는 세겜 사람들과 투쟁을 벌이게 됩니다. “선둥이가 나왔는데 살갗이 붉고 온 몸이 털투성이라, 그의 이름을 에사우라 하였다. 이어 동생이 나오는데, 그의 손이 에사우의 발뒤꿈치를 붙잡고 있어, 그의 이름을 야곱이라 하였다.”(25,25-26)

 

“이 아이들이 자라서, 에사우는 솜씨 좋은 사냥꾼 곧 들사람이 되고, 야곱은 온순한 사람으로 천막에서 살았다.”(25,27) 창세기 저자는 야곱과 에사우의 과거 이야기를 들려주며, 후일에 벌어지는 이스라엘과 에돔의 역사를 풀이하는 듯 보이는데, 그 근거로 볼 수 있는 대목은 다음과 같습니다. 야곱이 죽을 끓이고 있을 때 에사우가 허기진 채 들에서 돌아와서 야곱에게 했다는 말입니다. “‘허기지구나. 저 붉은 것, 그 붉은 것 좀 먹게 해 다오.’하고 말하였다. 그리하여 그의 이름을 에돔이라 하였다.”(25,30)

 

여기서 ‘에돔’의 뜻은 ‘붉은 이’라는 뜻인데요, 창세기는 이 이야기를 통해 에돔민족의 기원을 밝히고 싶은 것입니다. ‘에사우’라는 이름이 ‘털투성이’를 뜻하는 히브리말 ‘세아르’와 그가 장차 살게 될 산악지방인 ‘세이르’와 연관이 있어 보이고, 이 에사우가 ‘붉다’를 뜻하는 ‘에돔인’들의 조상이 되었다는 것이지요. 이스라엘과 에돔 두 민족은 왜 서로 이웃하고 있으면서도 곧잘 서로 싸움을 벌이는 사이가 되었을까요? 창세기의 저자는 그 둘이 원래는 한 민족이었는데, 과거에 있었던 안 좋은 일 때문에 그렇게 되었다고 풀이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사악과 레베카가 보인 자식에 대한 편애(偏愛)

 

창세기는 위에서 언급한 대목 외에 다음 인상적인 구절을 전하고 있습니다. “이사악은 사냥한 고기를 좋아하여 에사우를 사랑하였고, 레베카는 야곱을 사랑하였다.”(창세 25,28) 창세기의 표현은 야곱과 에사우의 사이에 편애적인 부모의 사랑이 문제가 되었음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아버지는 고기를 좋아해서 사냥을 잘하는 큰 아들을 사랑한 반면, 어머니는 다른 아들을 사랑했다는 것입니다.

 

고기 때문에 큰 아들을 편애한 이사악과는 달리 레베카가 작은 아들을 사랑한 이유는 나타나지 않고 있습니다. 어쩌면 레베카는 야곱의 장점을 일찍부터 알아보았거나, 아니면 남편이 큰 아들에 대해 보이는 편애에 대한 반작용으로 작은 아들을 더 사랑한 건지도 모릅니다. 어쨌든 후일 레베카는 남편이 에사우에게 하는 말을 엿듣고는 장자에게 내려줄 축복을 에사우가 아니라 야곱이 받을 수 있도록 (부정한?) 역할을 하게 됩니다. 합법적인 축복의 상속이 아니라 인간적인 술수로 축복을 가로채도록 한 것이지요.

 

 

장자 에사우가 보인 존재의 가벼움

 

창세기 25장 후반부에는 이사악의 쌍둥이 아들들인 에사오와 야곱 사이에 벌어진 어이없는 이야기가 소개되고 있습니다. 야곱이 죽을 끓이고 있을 때 허기진 채 들에서 돌아온 에사우가 ‘죽 좀 먹자’고 하니 야곱이 ‘먼저 형의 맏아들 권리를 나에게 팔라’고 했고, 이에 에사우가 맹세까지 하면서 그 권리를 팔았다는 것입니다. “내가 지금 죽을 지경인데, 맏아들 권리가 내게 무슨 소용이겠느냐?”

 

에사우는 아무리 쌍둥이라지만 장자로서의 권리를 먹을 것에 팔아버렸습니다. 그리하여 자신이 가진 장자로서의 위치를 하찮게 여기고 말았던 에사우는 후일 아버지 이사악이 세상을 하직할 때가 되었을 때, 그 자신이 당연히 받게 되어있던 장자에 대한 축복을 동생이 가로채도록 하는 우를 범하고 말았습니다. 창세기는 이렇게 장자로서의 자격미달을 보인 에사우를 구원의 역사에서 배제하는가 하면, 귀한 하느님의 축복을 진지하게 받아들인 야곱은 역사의 전면에 내세우고 있습니다.

 

“이제 저를 두 번이나 속였으니, 야곱이라는 그 녀석의 이름이 딱 맞지 않습니까? 저번에는 저의 맏아들 권리를 가로채더니, 보십시오, 이번에는 제가 받을 축복까지 가로챘습니다.”(27,36) 에사우는 자신이 당연하게 받을 축복을 야곱이 가로챘다고 울부짖었습니다. 하지만 그 축복은 누구에게 내려질 축복이었습니까? 에사우는 잠시의 배고픔을 견디지 못하고 죽을 지경으로 여기면서 맏아들의 권리를 하찮게 여겼고, 그렇게 죽 한 그릇에 팔아버린 권리이니 나아가 장자에 대한 축복까지 팔아버린 것 아닐까요?

 

뿐만 아니라 에사우는 마흔 살 되던 해에 이민족 여인들을 아내로 맞아들이기까지 하여 이들이 이사악과 레베카에게 근심거리가 되었다고 합니다.(26,34 참조) 창세기는 이렇듯 에사우를 이사악의 축복 전에 ‘맏아들의 자격을 이미 상실한 사람’으로 그리면서, 그 축복에 대한 권리가 이제 ‘하느님의 축복을 귀하게 여긴 야곱’에게 있음을 시사하고 있습니다.

 

 

하느님의 축복을 받은 야곱의 성실함과 지혜로움

 

‘야곱’이라는 이름은 기원전 이천 년대의 메소포타미아 문헌들 속에서, 그리고 기원전 일천년 대의 시리아와 팔레스티나 문헌들 속에서 발견되는 이름 중의 하나로서 본디 ‘하느님께서 보호해 주시기를!’이라는 뜻을 지닌 것으로 여겨집니다. 하지만 창세기에서 야곱은 25,26의 ‘야켑’(발뒤꿈치)과 27,36의 ‘야캅’(속이다)이라는 두 용어와 관련된 이름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즉 쌍둥이 동생이 형의 발뒤꿈치를 붙잡고 있어서 그 이름을 야곱으로 했다는 것이고, 그 이름대로 형을 속였다는 것입니다. 이와 관련해서 에사우가 “이제 저를 두 번이나 속였으니, 야곱이라는 그 녀석의 이름이 딱 맞지 않습니까? 저번에는 저의 맏아들 권리를 가로채더니, 보십시오, 이번에는 제가 받을 축복까지 가로챘습니다.”(28,36) 한 것이지요.

 

야곱은 성실하고 지혜로운 사람이었습니다. 야곱은 라반의 집에서 머물면서 열심히 일하여 두 딸을 다 아내로 얻을 만큼 신임을 얻었고, 라반의 재산을 크게 불어나게 하였으며, 마침내 라반과의 투쟁을 이겨내고 자신도 대단한 부자가 되어 수많은 양과 염소뿐만 아니라 여종과 남종, 낙타와 나귀들을 거느리게 되었습니다.

 

야곱이 누린 이러한 축복은 일찍이 아버지 이사악이 빌어준 축복을 상기시키고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너에게 하늘의 이슬을 내려 주시리라. 땅을 기름지게 하시며 곡식과 술을 풍성하게 해 주시리라. 뭇 민족이 너를 섬기고 뭇 겨레가 네 앞에 무릎을 꿇으리라. 너는 네 형제들의 지배자가 되고 네 어머니의 자식들을 네 앞에 무릎을 꿇으리라. 너를 저주하는 자는 저주를 받고 너에게 축복하는 자는 복을 받으리라.”(27, 28-29)

 

 

야곱이 받은 새로운 이름 ‘이스라엘’(Israel)

 

야곱이 라반과 계약을 맺고 에사우를 만나러 가는 길에서 자기에게 딸린 모든 것을 먼저 보내고 혼자 남아 밤을 지내게 되었습니다. 그때 하느님의 천사로 보이는 어떤 사람이 나타나 동이 틀 때까지 야곱과 씨름을 하게 되었는데, 그가 야곱을 이길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야곱의 엉덩이뼈를 쳐서 다치게 하였습니다. 이때 야곱은 그만 동이 트려고 하니 자신을 놓아달라는 그에게 “저에게 축복해 주시지 않으면 놓아 드리지 않겠습니다.”하였고, 이에 그는 “네가 하느님과 겨루고 사람들과 겨루어 이겼으니, 너의 이름은 이제 더 이상 야곱이 아니라 이스라엘이라 불릴 것이다.”(32, 29)하고 복을 내려 주었습니다. 이렇듯 야곱은 하느님의 축복을 정말 중요한 것으로 생각하고 그것을 참으로 갈망하였으며, 그 축복을 얻기 위하여 정성을 다해 매진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은 ‘하느님께서 싸우시기를!’ ‘하느님께서 당신 자신을 강하게 드러내시기를!’이라는 뜻을 지니고 있습니다. 훗날 야곱이 베텔로 돌아가자 하느님께서 나타나 복을 내려 주시면서 또 말씀하셨습니다. “너의 이름은 야곱이다. 그러나 더 이상 야곱이라 불리지 않을 것이다. 이스라엘이 이제 너의 이름이다.”(35, 10) 그러면서 하느님께서는 야곱에게 일찍이 내리신 축복을 더 해 주시며 그가 불리게 될 새로운 이름대로 ‘이스라엘 민족’이 생겨날 것이라는 암시를 주십니다.

 

“나는 전능한 하느님이다. 자식을 많이 낳고 번성하여라. 너에게서 한 민족이, 아니 민족들의 무리가 생겨날 것이다. 네 몸에서 임금들이 나올 것이다. 내가 아브라함과 이사악에게 준 땅을 너에게 준다. 또한 네 뒤에 오는 후손들에게도 그 땅을 주겠다.”(35, 11-12) 과연 이 이름대로 야곱의 12아들을 기원으로 12지파를 이룬 이스라엘 민족은 가나안에 정착하는 과정에서 하느님께서 주도하는 숱한 싸움을 벌이게 되지만, ‘하느님께서 늘 자신을 이끌고 지켜주신다는 믿음’을 잃지 않게 됩니다.

 

창세기에서 야곱은 인간적인 술수로 하느님의 축복을 얻은 사람인 듯이 그려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야곱은 하느님의 축복이 자신의 삶에 꼭 필요한 요소임을 알고 그 축복을 얻기 위하여 모든 힘을 다했으며, 그저 요행의 축복을 기대하지 않고 그 축복을 신뢰하며 열심히 일한 사람이기도 합니다. 창세기가 그리는 야곱은 비록 완전하지는 못했다 할지라도 하느님께 변함없는 믿음을 두고 일생 충성스럽게 하느님을 믿고 섬겨온 인물이었고, 그래서 풍성한 축복을 받게 된 사람이었던 것입니다.

 

인간에 대한 하느님의 선택과 축복은 인간의 재주와 노력만으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하느님의 자유로운 뜻에 달렸다는 것이 성경의 변함없는 가르침이기도 합니다. 우리가 받아야 할 축복은 먼저 하느님의 뜻에 부합해야 한다는 것이지요. 내가 바라는 축복은 과연 하느님께서 바라시는 것인지요? 나의 일생은 하느님께 얼마나 충실한 가운데 펼쳐지고 있는지요?

 

[월간 레지오 마리애, 2020년 11월호, 조현권 스테파노 신부(대구대교구 사무처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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