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 그들과 오늘 우리] 스카이 캐슬과 하느님 나라 스카이 캐슬 재작년 이맘때쯤 온 나라를 들썩였던 드라마가 있다. 한국의 상위 0.1%가 모여 사는 타운 하우스 ‘SKY 캐슬’을 배경으로, 자식을 천하제일로 키우려는 명문가 사모님들의 욕망을 보여 준 풍자극이다. 딸을 명문대 의대에 보내려고 극성인 엄마와 목표로 세운 학교에 입학하려 과외 선생인 ‘입시 코디네이터’에게 전적으로 의지하는 딸의 모습은 보는 이의 마음을 씁쓸하게 하였다. 드라마 ‘스카이 캐슬’이 그려 낸 것처럼 한국 엄마들의 인생 최대의 목표는 종종 자식의 입시 성공인 보이기도 한다. 야고보와 요한의 어머니 예수님의 열두 제자 가운데 베드로와 함께 자주 등장한, 곧 예수님 가까이 있던 제자들은 야고보와 요한이었다. 이 두 형제는 제베대오의 아들로 배에서 그물을 손질하다가 예수님의 부르심에 배와 아버지를 버려두고 따라나섰다(마태 4,21-22; 마르 1,19-20 참조), 마르코 복음에서 야고보와 요한이 ‘보아네르게스’ 곧 ‘천둥의 아들들’이라 불린 것을 보면(3,17 참조), 그들의 성격이 다혈질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한편 루카 복음에서는 예루살렘으로 향하시던 예수님을 사마리아인들이 맞아들이지 않자, 야고보와 요한이 “주님, 저희가 하늘에서 불을 불러 내려 저들을 불살라 버리기를 원하십니까?” 하고 나선다(9,51-56 참조). 또한 요한은 예수님의 이름으로 마귀를 쫓아내는 사람이 있자, 예수님께 “그가 저희를 따르는 사람이 아니므로, 그가 그런 일을 못 하게 막아 보려 하였습니다.” 하고 말씀드린다(마르 9,38; 루카 9,49-50 참조). 복음서에서 전하는 이러한 이야기를 통해 야고보와 요한의 성격과 그들만의 특권 의식을 엿볼 수 있다. 이들 형제는 또 자신들이 예수님을 따르고 그분의 활동에 함께했으니 예수님의 계획이 성공했을 때 자신들에게 합당한 자리를 마련해 달라고 청한다(마르 10,35-45). “스승님께서 영광을 받으실 때 저희를 하나는 스승님 오른쪽에, 하나는 왼쪽에 남게 해 주십시오”(37절). 그런데 병행 본문인 마태오 복음(20,20-28)에서는 예수님께 청을 하는 사람이 야고보와 요한 자신이 아니라 그들의 어머니다. “스승님의 나라에서 저의 이 두 아들이 하나는 스승님의 오른쪽에, 하나는 왼쪽에 앉을 것이라고 말씀해 주십시오”(21절). 이것은, 마르코 복음에서 야고보와 요한이 성공과 야망에 대한 포부를 드러내는 듯한 표현을 마태오가 수정한 것일 수 있다. 사도들에 대한 부정적인 이해를 완화하려고 어머니의 입을 빌렸을 법하다. 한편으로는 사도들의 어머니가 예수님 앞에 등장한 까닭이, 그 또한 예수님의 일행에게 시중을 든 여자들 가운데 한 명이었고(루카 8,1-3 참조) 그러한 상황에서 아들들을 위해 예수님께 청했을 가능성도 생각해 볼 수 있다. 사실이 어찌 되었든 야고보와 요한의 자신만만하고 불같은 성격과 그들 어머니의 대담한 모습이 상응한다.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 예수님의 성장 과정은 어떠했을까? 그분께서 공적 생활 이전에 아버지 요셉처럼 손으로 하는 일, 곧 목수 일을 하셨으리라 추정하지만, 어떤 교육을 받으며 자라셨는지는 알 수 없다. 성경에서 그분의 성장 과정이나 소년 시절을 소개하는 곳은 루카 복음(2,41-52)이 유일하다. 열두 살 된 소년 예수님이 파스카 축제 때 가족과 함께 예루살렘에 올라가 그곳에서 당신의 놀라운 ‘천재성’을 보여 주신 이야기다. 축제가 끝나고 마리아와 요셉은 나자렛의 집으로 가던 일행 가운데 예수님이 없음을 알아채고 예루살렘으로 돌아가 아들을 찾아다녔다. 마침내 사흘 뒤에야 성전에서 아들을 만났는데, 그때 소년 예수님은 “율법 교사들 가운데에 앉아 그들의 말을 듣기도 하고 그들에게 묻기도 하고 있었다”(46절). 그리고 “그의 말을 듣는 이들은 모두 그의 슬기로운 답변에 경탄하였다”(47절). 어머니 마리아가 “얘야, 우리에게 왜 이렇게 하였느냐? 네 아버지와 내가 너를 애타게 찾았단다.” 하자, 예수님은 “왜 저를 찾으셨습니까? 저는 제 아버지의 집에 있어야 하는 줄을 모르셨습니까?”(48-49절) 하고 대답하였다. 이후 루카는 “예수님은 지혜와 키가 자랐고 하느님과 사람들의 총애도 더하여 갔다.”(52절)는 말로 예수님의 소년 시절 이야기를 마무리한다. 아들 예수님의 이러한 모습을 본 어머니 마리아의 마음은 어떠했을까? 사흘 동안 노심초사하며 아들을 찾아다니셨으니 애가 많이 타셨을 것이다. 한편으로는 소년 예수님의 특출함과 총명함을 보고 뿌듯하여 훌륭한 인물로 키우고 싶은 욕심이 생기지는 않으셨을까 싶다. 율법 교사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며 토론하는 아들 모습이 장하고 자랑스러우셨을 터이다. 마리아는 이미 아기 예수님을 잉태하였을 때 가브리엘 천사의 방문으로 태어날 아들이 ‘큰 인물이 되고 지극히 높으신 분의 아드님이라 불릴 것’이라는 예고를 들었다(루카 1,32). 또한, 친척 엘리사벳을 방문하였을 때 그에게서 ‘내 주님의 어머니’라는 말을 들었으니(43절), 당신 아들의 특별함과 비범함에 대해서는 짐작하셨을 것이다. 하지만 복음사가는 예루살렘 성전 사건 이후 아들 예수님의 이러한 모습에 마리아가 “이 모든 일을 마음속에 간직하였다.”(2,51)고만 전한다. 예수님의 공생활 동안 어머니 마리아의 모습은 야고보와 요한의 어머니와는 사뭇 다르다. 그는 묵묵히 아들이 가는 길을 지켜볼 뿐 앞에 나서지 않으신다. 그저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뜻에 순종하며 당신의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과 함께하시는 삶을 지켜본다. 그분께서 수난과 죽음의 길에 이르시기까지…. 마리아는 두 사도의 어머니처럼 예수님에게서 사람들이 생각하는 성공이나 영광을 추구하거나 아들 덕분에 당신의 삶이 자랑스러워지기를 바라지는 않으셨던 것 같다. 다만 아들 때문에 ‘영혼이 꿰찔리는’(2,35 참조) 아픔을 참아 내며, 하느님께 기도하고 그분의 뜻과 위로를 구하였을 것이다. 그렇다고 마리아가 아들에 대한 애정이나 관심이 부족했다거나 수동적인 자세로 살았다는 뜻은 아니다. 마리아는 천사의 예고에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1,38)라고 응답하였고 엘리사벳 앞에서 하느님을 찬미하는 찬미가를 바치기도 하였다(1,46-55). 결단과 용기가 필요할 때는 그렇게 할 수 있는 여인이고 어머니였다. 루카는 예수님의 부활과 승천 이후 마리아가 사도들과 예수님의 형제들과 함께 기도하는 모습을 보여 주며(사도 1,14), 아들 예수님의 뜻을 기리고 그분이 가신 길에 당당히 동참했음을 알려 준다. 스카이 캐슬과 하느님 나라의 보험 대학 입시 철이 다가온다. 우리 삶에서 보험은 무엇일까? 명문대 입학과 졸업장이 안전하고 안락한 삶을 보장해 주는 것일까? 그것을 위해 주저 없이 비싼 값(온갖 희생)을 치르는 것으로 보아, 스카이 캐슬 주민들은 그렇게 생각하는가 보다. 그러면 하느님 나라의 주민인 우리에게 보험은 무엇일까? 자신의 존재에 대해 성찰하고 자기 삶의 자리에서 성실하게 살며 자신과 이웃에게 선이 되는 삶이 바로 그것 아닐까!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자녀들이 하느님과 사람들의 사랑 속에서 지식과 지혜가 자라고 성장하도록 응원하며 뒤에서 지켜보는 어머니들이 있어야 할 것 같다. * 강선남 헬레나 - 교황청립 성서대학에서 석사, 서강대학교 신학대학원에서 성서신학(신약학 전공) 박사 학위를 받았다. 서강대학교에 출강하고 있으며, 「교황 프란치스코: 새 시대의 응답자」, 「성경의 인물들」, 「교부들의 성경 주해, 탈출기-신명기」 등의 역서를 냈다. [경향잡지, 2020년 11월호, 강선남 헬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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