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 시기와 질투에 관한 참조 글 | 카테고리 | 성경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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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박윤식 | 작성일2014-02-28 | 조회수1,615 | 추천수1 | 신고 |
(십자성호를 그으며)
폼생폼사’를 강요당하는 대한민국 남자들에게 드디어 구원자가 나타났다. 외모 자체가 ‘폼’과는 아무 상관도 없는, 자기 인생의 분기점을 고작(!) 파마머리 전과 후로 가르는 김정운 교수가 바로 그이다. 그가 설파하는 ‘복음’은 한 문장으로 요약된다. “수컷들이여, 폼 잡지 말고 척하지 맙시다.” 신문에 실린 그의 신작 소개를 읽는 것만으로도 여자인 내가 다 속이 후련한데, 남자들은 오죽할까. 이를테면 이런 대목이 나를 빵 터지게 했다.
황상민 연세대 교수에 대한 내 질투심은 말도 못했다. 그러나 황 교수는 목소리도 참 특이하고 짧은 다리에 바지도 짧게 입고 다녀 나름 위안이 되었다. 김난도 교수는 사람까지 착하고 순수하다. 그가 쓴 책은 나름 베스트셀러인 내 책의 몇 배나 팔렸다. 환장한다.
이 책은, 그러니까, 김정운 교수가 인터뷰어(interviewer) 노릇을 하고, 우리나라에서 이름께나 알려진 유명 남들이 인터뷰이(interviewee)가 되어, 자신의 애장품을 소개하는 형식으로 되어 있다. 헌데 무슨 인터뷰어가 인터뷰이에 대해 저토록 노골적인 질투의 감정을 드러낸단 말인가. 말쟁이들도 그렇지만, 글쟁이들도 보통은 고매한 척하는 데 이골이 난 사람들이다. 속으로는 엄청난 콤플렉스 덩어리를 끌어안고 있으면서도 겉으로는 초연한 척한다. 자기감정을 솔직하게 드러내면 ‘꿀릴까봐’ 그렇다. 혹은 남 앞에서 이래라 저래라 하는 데 하도 익숙해진 나머지 스스로를 이상화하는 병에 걸렸을지도 모를 일이다.
어쨌거나 ‘부러우면 지는 거다’라는 사회적 합의는 이러한 맥락에서 형성되었다. 속으로는 부러우면서도, 그 감정을 내비치면 인생 패배자로, ‘루저looser’로 낙인 찍힐까봐, 아무렇지 않은 척한다. 자신의 감정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는 일은, 더구나 우리처럼 체면문화가 지배적인 사회일수록,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김정운 교수의 매력은 이 지점이다. 그는 자기를 포장하지 않는다. 독자들을 향해서도 그렇고, 자기 자신과 마주할 때도 그렇다. 그의 고백에 따르면, 파마머리를 하기 전까지는 자기도 ‘우리’와 똑같았다고 한다. 근사한 인간인 양 위선을 떨었다는 뜻이겠다. 하지만 머리를 뽀글뽀글하게 지지고 난 다음부터는 모든 게 달라졌다. 더 이상 표준화된 틀에 자기를 가두어두지 않는다. 자기 개성, 자기 취향, 자기감정을 존중하는 법을 배웠다. 요컨대 파마는 그에게 일종의 일탈이자 동시에 자기 안에 잠자고 있던 ‘참 인간’과의 만남이었던 셈.
문득 삭발을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그러고 보면 나도 엄청 속이면서 살고 있다는 뜻이다. 한밤중에 골목길에서 낯선 사람을 만나는 일보다 더 무서운 건 자기의 시커먼 속내와 마주 대하는 일이 아닐까. 그렇게 못나고 못된 인간이 바로 나 자신이라는 사실을 인정하기가 겁이 나서 서둘러 외면해 버린다. 그러고는 밖에 나가 한껏 ‘폼’을 잡으며 썩 괜찮은 인간인 ‘척’ 연기를 하니, 나의 구원은 아직도 요원한 듯.
하여 나보다 실력 있고 인기 많은 (것처럼 보이는) 또래 학자 앞에서 자신의 질투심을 유감없이 토로하는 그가, 오호라, 나보다 월등히 나은 사람이로구나. 질투는 열등감의 다른 표현이라 배우고, 심지어 ‘칠거지악’七去之惡의 하나라 배운 까닭에, 그런 감정이 올라오는 것을 애써 숨기고 누르기 바쁜 우리를 그가 해방시킨다. 칼에 배여 생긴 손가락의 상처가 바람을 쏘여야 낫는 것처럼, 우리 안의 부정적인 감정들도 출구outlet로 배출되어야 병이 안 생긴다고.
그런데 가만 있자, 자기보다 잘 나가는 사람을 부러워하는 감정이 질투가 맞기는 한 건가. 그건 단순한 선망羨望이 아닌가. 이 대목에서 잠시 머리를 식히고 개념 정리를 좀 해보자. 유명한 영화 <아마데우스>에 등장하는 살리에리(Antonio Sallieri, 1750~1825)와 모차르트(Wolfgang Amadeus Mozart, 1756~1791)의 관계가 공부하기에 딱 좋은 보기다.
영화는 살리에리를 완전 노인으로, 반면에 모차르트를 천방지축 청년으로 묘사했지만, 실제로는 여섯 살 차이밖에 나지 않는다. 말하자면 둘은 충분히 티격태격할 만한 사이다. 고기도 먹어본 사람이 맛을 알듯이, 당시 요제프 황제의 신임을 받으며 궁정 작곡가로 활동하던 살리에리는 소문으로만 듣던 모차르트의 연주를 처음 듣는 순간, 그것이 ‘신의 소리’임을 직감한다. 네 살 때 협주곡을 작곡하고, 일곱 살 때는 심포니를, 열두 살 때는 장편 오페라를 작곡한 신동神童이라더니, 모차르트의 음악은 과연 살리에리가 그때까지 한 번도 들어보지 못한 천상의 음악이었던 것이다.
여기까지는 선망이다. 살리에리는 모차르트를 부러워하면서 그처럼 되기를 바란다. 하지만 그럴 수 없다. 아무리 노력한들 모차르트의 발뒤꿈치라도 따라갈 수 있겠나. 모차르트가 있는 한 자기는 만년 2인자 자리에 머물 수밖에 없다. 차츰 절망감에 사로잡히자, 선망은 이내 시기(猜忌, envy)로 돌변한다. 시기는 남이 잘되는 것에 샘을 내며 공연히 미워하는 마음이다. 남이 잘 되는 꼴을 보지 못하는 심리, 남의 불행이 곧 나의 행복이라는 심보가 시기의 골자다. 증명되지는 않았으나, 살리에리가 모차르트를 독살했다는 추측이 난무했던 것은 그만큼 그의 시기심이 하늘을 찔렀다는 뜻이리라.
시기는 6세기 초에 교황 그레고리우스 1세가 규정한 일곱 가지 대죄大罪 중 하나였다. 13세기에 가톨릭 신학을 집대성한 토마스 아퀴나스는, 탐식·탐욕·나태·정욕·교만·시기·분노 등 일곱 가지가 그야말로 대죄인 까닭은, 그 자체가 도덕적으로 중대한 죄여서뿐만 아니라 그것이 결정적인 원인이 되어 다른 죄악을 낳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흥미로운 것은 영문학의 아버지라 일컬어지는 제프리 초서(Geoffrey Chaucer)의 관점이다. <캔터베리 이야기>로 유명한 그는 이 책에서 시기를 7대 죄악 가운데 가장 치명적인 것으로 꼽았다. “시기는 가장 나쁜 죄입니다. 다른 모든 죄는 하나의 미덕에 적대하는 반면, 시기는 모든 미덕과 모든 선에 적대합니다.”
참된 것, 아름다운 것, 훌륭한 것, 고결한 것, 순수한 것 등 모든 좋은 것이 자기 외부에 있을 때, 사람은 그것들을 결여하고 있는 ‘텅 빈 자기’에 대해 참을 수 없는 모욕감을 느끼게 된다. 이런 감정을 나르시시즘적 분노라고 부른다. 이 분노는 자기가 그 좋은 것을 소유할 수 없다는 자각에서 비롯되어, ‘못 먹는 감 찔러나 보자’는 식의 심리로 이어진다.
영국의 정신분석학자로 대상관계이론을 창시한 멜라니 클라인Melanie Klein에 따르면 시기가 질투jealousy나 탐욕greed과 구분되는 건 그 지점이다. 질투는 누군가에 대한 사랑을 두고 다른 사람과 경쟁할 때 일어나는 감정이다. 아니 굳이 제3자가 개입되지 않아도 상관없다. 사랑에 빠진 커플들은 혹시나 상대방이 한 눈을 팔지 않을까 전전긍긍하면서 가공의 인물을 상정하여 ‘위험한 상상놀이’에 빠지기 예사다. 그런가 하면 탐욕은 소유에 대한 줄기찬 욕망이다. 이게 위험한 것은, 대상에 한번 꽂히면, 설령 남의 것이라 하더라도 어떻게든 내 것으로 만들기 위해 물불을 안 가리는 까닭이다.
클라인은, 시기를 질투나 탐욕과 근본적으로 다른, 더 위험할 뿐만 아니라 모든 악의 근원이기까지 한 악덕이라고 보았다. 질투도 탐욕도, 그 목적은 결국 좋은 것을 자기가 소유하려는 마음인 데 반해, 시기는 좋은 것이 내 것이 될 수 없다는 이유로 무조건 파괴하려 들기 때문이란다. 나아가 시기하는 자는 자신의 도덕적 부담감을 떨치기 위해 증오와 분노를 투사하는 영악함까지 발휘한다. 이를테면 살리에리의 눈에 비친 모차르트가 ‘경박하고’ ‘오만하며’ ‘교양 없고’ ‘퇴폐적인’ ‘인간 말종’으로 표상되는 게 그런 경우다. 이쯤 되면, 시기라는 영어 단어 ‘envy’의 라틴어 어원 ‘invidia’가 ‘쏘아봄’ 내지 ‘흘겨봄’의 뜻을 갖는다는 것도 하등 이상하지 않다.
헌데 심리학적·정신분석학적 분석의 엄밀함과는 별도로, 우리의 일상에서는 질투와 시기가 서로 맞물리는 것 같다. 다시 살리에리의 경우를 보면, 그의 명백한 시기심은 사실상 질투에서 비롯되었음을 알 수 있다.
예컨대 그는 모차르트의 재능을 시기했다기보다는 그에게 그런 재능을 물려주고 후원을 아끼지 않은 아버지가 있다는 사실을 질투했다. 모차르트의 아버지는 오스트리아 잘츠부르크 대주교 궁정악단의 바이올리니스트이자 작곡가이며 부악단장인 레오폴드 모차르트.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가 여섯 살 때부터 해외 연주 여행을 다닐 수 있었던 건 순전히 아버지의 후광 덕분이었다.
반면에 살리에리의 아버지는 음악적 소양이라고는 눈곱만큼도 없고 오로지 돈만 아는 장사꾼이 아닌가. 그런 아버지의 몰이해와 반대를 뚫고 순전히 자신의 노력과 의지만으로 일가를 이루었으니, 살리에리가 얼마나 외롭고 힘들었을지는 굳이 말할 필요조차 없으리라. 살리에리는 모차르트의 아버지를 자기도 갖고 싶었다. 그랬더라면 자기 역시 모차르트처럼 어려서부터 만인의 사랑과 인기를 독차지할 수 있었을 것이다. 아니 조금 더 깊이 들어가면 살리에리의 질투는 궁극적으로 신을 향하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자기처럼 성실한 인간에게는 음악에 대한 열정만 주고 재능은 주지 않은 야박한 하느님이 모차르트처럼 ‘방탕한’ 인간에게는 어째서 천재적인 재능을 허락했는가 말이다. 자기가 몇날 며칠씩 걸려 머리를 쥐어짜가며 힘들게 완성한 행진곡을 모차르트가 보란 듯이 간단하게 편곡하는 것을 본 뒤로 살리에리는 신을 원망하며 부정한다. 그렇게 불공평하고 편파적인 신을 어떻게 믿고 사랑한단 말인가.[이하 생략]
감사합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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