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 속의 여인들] 하와(창세 2,18-22) 사람의 이야기입니다. 여자에 대한 이야기의 시작은 남자와 다른, 여자만의 독특한 이야기가 아닙니다. 태초에 하느님은 ‘사람’을 만드셨습니다. 남과 여의 대립이 아니라 서로 다름이 하나일 수 있다는 신비를 담은 옹기장이 하느님의 작품이 사람이었습니다. ‘사람’은 ‘함께’라는 말마디를 운명처럼 지닌 존재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사람이 혼자 있는 것이 좋지 않다고 하셨습니다.(창세 2,18) 사람에게 ‘알맞은 협력자’를 찾아 나선 하느님은 직접 하와를 만드십니다. 그런데 여자는 사람의 ‘결핍’에서 제 존재를 시작합니다. 깊은 잠(히브리 말을 직역하자면, ‘무의식 상태’를 가리킵니다)에 빠진 사람의 갈비뼈에서 여자의 존재는 시작합니다. 사람은 이렇게 외쳤지요. “이야말로 내 뼈에서 나온 뼈요 내 살에서 나온 살이로구나! 남자에게서 나왔으니 여자라 불리리라.”(창세 2,23) 혹여 ‘갈비뼈’ 이야기를 두고 여자에 대한 비교우위적 관점으로 남자를 바라보는 무지한 사람은 없을 테지요. 사람은 여자에 대해 궁금해하지 않았습니다. 깊은 잠을 자는 순간에 하느님에 의해 지어진 여자가 도대체 누구인지, 자신과 비교해서 어떤 점이 다르고, 어떤 점이 더 낫고 더 못한 것인지 궁금해하지 않았습니다. 사람의 외침은 하느님도, 여자에게도, 그 누구에게도 아닌 자신에게 외치는 비장한 선언이었습니다. 자신에게서 나온 여자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라 바로 자신에 대한 이야기로 여자를 바라봅니다. 여자라는 존재를 통해 남자 사람은 제 정체성을 새롭게 되새기게 됩니다. 여자에 대해 전혀 모르되, 어떻게든 제 인식의 확신 안에서 여자를 이해합니다. 여자에 대한 영원한 ‘모름’은 여자와 영원히 하나 되는 제 본디 모습을 확인하는 자리가 됩니다. 남자를 가리키는 히브리 말은 ‘이쉬’인데, 여자는 ‘잇샤’입니다. 두 말마디는 같은 어근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이되 서로 다른 남자와 여자는 서로를 향한 끊임없는 신뢰의 여정을 떠날 때, 비로소 서로가 서로에게 알맞은 협력자인 사람으로 거듭나 만납니다. 그러나 불행히도 서로에 대해 더 알려고 덤비는, 그 앎이 제 처지에 대한 비관으로, 타자에 대한 질투와 욕망으로 변질되는 이야기를 성경은 이어갑니다. 여자는 뱀의 이야기를 듣고 말지요. 여자는 ‘결핍’을 견디지 못했습니다. 하느님처럼 더 알아야 되고, 더 지혜로워야 한다는 욕망이 여자를 짓누르고 말았습니다.(창세 3,6) 제 욕망에 휘둘린 결과를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너는 네 남편을 갈망하고 그는 너의 주인이 되리라.”(창세 3,16) 결핍의 자리를 신뢰와 믿음의 자리로 만들어 갔던 사람의 본디 모습은 욕망과 결핍에 대한 갈망으로 짓눌린 고통과 힘겨움의 ‘주종 관계’로 변질됩니다. 바로 이때, 사람은 자기 아내의 이름을 ‘하와’라고 짓습니다. 마치 동물의 이름을 지어주던 그때의 모습처럼, 아직 하와라는 알맞은 협력자를 찾지 못한 쓸쓸하고 외로운 사람의 그때처럼 말입니다. 하와라는 이름은, 모든 이의 어머니라는 뜻을 지닌 그 이름은 이렇게 남자와 여자의 주종 관계에서 시작합니다. 여자가 잘못했다는 말이 아닙니다. 인간 세상이 무수한 갈등과 충돌로 늘 시끄럽고 피곤해지는 것은 제 삶의 고유한 본디 의미를 잃어버렸기 때문이 아닌가 합니다. 여자에 대한 이야기의 시작은 사람의 본디 의미에 대한 오래된 이야기를 다시 끄집어 내는 것이기도 합니다. 사람은 서로를 모릅니다. 모르는 것은 경외와 신뢰의 대상이지 비교와 질투의 대상이 아닙니다. 여자 이야기는 사람다움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사람다움에 대한 이해와 질문은 끝없는 경외와 신뢰에 대한 성찰입니다. [2021년 1월 17일 연중 제2주일 대구주보 3면, 박병규 요한보스코 신부(대구가톨릭대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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