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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신앙이란? 카테고리 | 천주교
작성자이정임 쪽지 캡슐 작성일2014-03-30 조회수898 추천수1 신고

(십자성호를 그으며)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신앙 ◆   
한자 信仰
라틴어 fides
영어 faith
출처 : [가톨릭대사전]

   신앙이란 믿는 것을 뜻하며 ‘믿는다’는 말에는 크게 보아 두 가지 뜻을 지닌다. 친구를 믿는다고 할 때는 그의 능력과 성실성을 인정하여 그를 신뢰한다는 뜻이고, 교리를 믿는다고 할 때는 그 교리의 내용이 나에게 자명(自明)하지 않지만 교리를 제시하는 권위자가 그 내용을 잘 알고 있고 그것을 있는 그대로 전해 주리라는 사실을 인정하여 교리를 받아들인다는 뜻이다. 그리스도교의 신앙은 양자를 포괄하는 개념이다. 연구의 편의상 우리가 ‘무엇을’, ‘무엇 때문에’ 믿느냐 하는 신앙의 객관적 여건을 살피고 나서, 믿음이란 어떻게 행위하고 처신함을 의미하느냐 하는 신앙의 주관적 요인을 고찰하기로 한다.

   1. 신앙의 객관적 여건 : 신학자들은 흔히 아우구스티노의 표현을 빌어 하느님을(Deum) 믿고[신앙의 직접 대상], 하느님에게(Deo) 믿고[신앙의 근거], 하느님께로(in Deum) 믿는다[신앙의 궁극목적]는 말로써 신앙을 묘사한다.

   ① 신앙의 대상 : 신앙의 집약적 표현인 사도신경에는 직접 하느님에 관한 조항 뿐 아니라 인간세상에 관한 것도 있다. 그러나 이 모든 조항은 하느님과의 관련 하에서만 신앙의 내용이 될 수 있다. 더욱 그것에 대하여 하느님계시가 있으면 신앙의 내용이 된다. ② 신앙의 목적 : 우리가 하느님을 믿고 공경하는 것은 구원받기 위함이며 구원받는다는 것은 창조주인간에 설정한 목적을 달성함을 의미한다. 즉 하느님은 자신을 인간의 목적으로 설정했으므로 하느님에 합일(合一)하는 것이 인간행복이며 목적이다. 이 목적을 인간의 한계를 초월하는 하느님 자신이므로 하느님이 먼저 거기에 이르는 길을 열어 주지 않으면 도달할 수 없다(이사 64:4, 1고린 2:9 참조). 여기에 계시의 필요성이 있고 이를 신앙으로 받들어야 할 이유가 있다. 우리는 피조물을 통하여 하느님의 사정을 이해할 수 있으나(로마 1:20), 그 범위를 초월하는 진리계시에 의존한다(히브 1:1-2). 토마스 아퀴나스에 의하면 인간행복은 신앙의 대상이자 목적인 하느님을 차지하고 뵈옵는데 있다면, 신앙은 이 세상에서 이미 어느 정도 하느님을 차지하는 것이므로 우리에게 있어서 신앙이란 ‘영원한 생명의 시작’이다. 따라서 우리가 신앙으로 추구하는 대상은 신앙 조목이 아니라 그것의 근본인 생활하시고 위격적(位格的)인 하느님 자신이다. ③ 신앙의 근거 : 우리가 하느님을 믿는 것은 하느님이 스스로를 증거하기 때문이지 어떤 사람이 그렇게 말하기 때문이 아니다(요한 6:65 참조). 하느님의 증거하심은 각 인간의 인격 내부에서 작용한다. 하느님사랑은총으로 영혼 안에서 잠잠히 속삭이시며 각 사람을 신앙으로 이끌어 주신다. 이 은총에 순응할 때 인간은 자기에게 내밀어준 어떤 손을 잡고 한 단계를 뛰어넘는 것이다. 하느님의 증거하심은 또한 전 인류의 역사 안에 실현된다. 이것은 바로 하느님께서 말씀하시는 방식이다. 그분은 인간의 입을 빌어 인간에게 말씀하신다. 이 말씀의 최후 증인은 혈육을 취하신 말씀 예수 그리스도이며, 그리스도의 증언을 계속하여 인류사회 안에 재현하고 있는 것이 바로 교회이다. 그리스도교교회를 통하여 전파된 이 증거의 말씀은 살아 계시하느님의 생활한 말씀이다(요한 12:49-50, 3:11, 8:26 · 28, 1요한 1:1-2 참조).

   그리스도와 교회증인이 참되다는 사실을 밝혀 주는 표시는 기적과 기타 하느님섭리를 나타내는 표징(表徵)이다. 하느님을 거짓을 증거하시려고 전능을 발휘하지는 않으시기 때문이다(요한 10:37-38 참조). 이러한 여러 가지 표시 외에, 하나이고 거룩하고 공번되며 사도로부터 전래된 교회존재 자체가 "믿음을 가진 크고도 영구적인 동기요, 하느님과 연관되어 있다는 깨트릴 수 없는 증거"(제1차 바티칸 공의회)이다.

   이와 같이 신앙의 객관적 여건이란 은총과 말씀과 표징으로써 인간을 당신에게로 부르시는, 생활하시고 위격체이신 하느님 자신이다. 하느님은 당신을 인간에게 주실 때 그리스도라는 인격(人格)을 통하여 나타나셨기 때문에 이러한 의미에서 신앙의 객관적 여건은 그리스도를 통하여 인간에게 주어진 천주성삼(天主聖三)이시다(요한 3:16 참조). 또 한 인류의 구원경륜은 그리스도 안에 예정되고 실현되었다(에페 1:4-5). 그리하여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하느님을 믿고 그리스도께 믿음으로써 하느님께 믿고 그리스도께 나아감이 곧 하느님께 나아감이다.

   2. 신앙의 주관적 요인[인간의 응답]

   ① 신앙행위의 분석 : 신앙이란 하느님계시하신 모든 것을 하느님의 증거 때문에 믿는 덕행(德行)이다(제1차 바티칸 공의회). 일반적으로 무엇을 믿는다는 행위는 자기가 제시된 어떤 사물의 내용을 다 알지는 못하면서도 제시하는 사람의 진실된 성격과 그 사람은 그 일에 관하여 나보다 더 잘 알고 있으리라는 전제하에 일단 인정해 주는 행위를 말한다. 인간의 정신작용을 고전적 학자들은 지성(知性)과 의지(意志)의 활동으로 규정했는데, 이에 준할 때 믿는다는 행위는 지성이 만족하게 파악하지 못한 것을 의지로써 결단을 내려 붙들고 있는 인식작용이라 할 수 있다.

   따라서 어떤 명제를 자명하게 증명할 수 있을 때 이것은 ‘아는’ 것이지 ‘믿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믿음은 추측(推測)처럼 어떤 명제를 인정하면서도 항상 그 반대명제가 성립될 수 있으리라는 우려를 가지면서 인정하는 태도가 아니고, 반대명제의 두려움을 완전히 극복해 버린 결단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지성이 만족하게 알지 못하는 것을 왜 의지가 간섭하여 믿게 하는 의지가 문제된다. 본래 지성이 추구하는 것은 진리의지의 추구대상은 선(善)이다. 그러나 지성이 추구하는 그 참됨이 거짓이 아니고 진실이면 이것은 동시에 좋은 것이기도 하므로 의지의 대상도 되는 것이다. 토마스에 의하면 신앙이란 하느님은총의 충동을 받은 의지의 명령에 의하여 지성이 하느님진리를 승인 파악함이다. 이 정의를 분석하면 하느님을 믿는다는 행위는 곧 하느님계시하신 초자연적 진리가 비록 인간의 미약한 지력으로 다 깨우쳐 알아들을 수 없을지라도 그것을 믿고 실천하는 자들에게 허락하신 영원한 생명은 지극히 좋은 것으로 인식되기 때문에 이 최고의 선은 인간의지를 잡아끌어 결단을 내리게 한다는 뜻이다. 하느님은 최고의 진(眞)이요 최대의 선이므로 지성의 대상인 동시에 의지의 대상이다. 따라서 하느님을 신앙한다는 것은 지성과 의지의 동시적 작용이다.

   ② 신앙행위의 종합 : 지성과 의지의 작용은 독립된 별개의 기능이 아니고 인간의 기능이므로 신앙행위란 구체적인 한 인격체의 행위이다. 한 인격체인 인간이 다른 한 인격체인 하느님부르심응답하는 행위가 곧 신앙이다. 그러므로 신앙이란 두 인격의 만남이라 할 수 있다. 신앙의 만남은 나의 인격을 전적으로 네게 ‘맡기는’ 것이다. 그러므로 참된 신앙이란 제시된 어느 이론이 그러한 것이라고 인정해 두는 메마른 두뇌만의 활동이 아니라 원초적인 사랑을 겸비한 자기봉헌(自己奉獻)이다.

   신앙을 가진다는 것이 자기의 인격을 위대한 상대방의 인격에 주는 것이라면 신앙의 선택이야 말로 하나의 탈피 이상의 희생을 요하는 거창한 결단이다. 그것은 한 인격이 지녀온 묵은 세계관과 인생관의 붕괴를 의미하며 여태껏 영위한 세속생활과의 절연(絶緣)을 강요하고 ‘지금까지의 나’[小我]의 파탄내지 죽음을 결과하는 것이다. 이러한 붕괴와 절연과 죽음의 선을 넘지 않고는 절대자이신 ‘당신’에게 나를 온전히 맡겨 버릴 수 없다.

   이처럼 신앙의 선택은 묵은 자아의 파괴에서 비롯하고 새로운 나의 건설에서 귀결되며 이 건설은 나의 중심인 하느님을 모심으로써 가능하게 된다. 그분이 내 안에서 나의 모든 사고와 원의와 행동을 운동하도록 길을 막지 말아야 한다. 그리고 나를 사랑으로 채워야 한다. 진리와 선과 나 자신에 대한 사랑절대자에 대한 사랑으로 승화되고 통일되어야 한다.

   ③ 신앙행위의 특성 : 본래 정신적 실존(實存)을 파악하는 것은 비록 그 실존이 자연적 인격체라일지라도 언제나 그 파악은 불투명한 인식임을 면하기 어렵다. 더구나 신앙에 있어서 우리가 추구하는 실존은 그 자체로써 이미 초자연적 존재 곧 신(神)이기 때문에 신앙의 인식은 본질적으로 장막에 싸인 어두운 인식이다. 그래서 바울로는 "우리가 지금은 거울에 비추어보듯 희미하게 보지만 그때에 가서는 얼굴을 맞대고 볼 것"(1고린 13:12)이라 하고, 토마스는 신앙을 가리켜 "장래에 올 직관의 전주(前奏)"라 한다. 신앙인식의 이 같은 특성은 믿는 이로 하여금 항상 긴장된 기다림 속에 처하게 하므로 신앙은 종말론희망이다. 언제나 이 신앙의 구름을 헤치고 하느님영광을 얼굴을 맞대고 보려는 갈망으로 차 있는 상태

   이다.

   확실성은 객관적 자명성(自明性)과 주관의 굳은 집착(執着)을 의미한다. 신앙에서는 그 대상이 인간에게 자명하게 인식되는 것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순교자들이 목숨을 버리기까지 굳이 믿는 이유는 그 대상을 자명하게 아시는 분께 대한 굳은 집착 때문이다. 이 집착은 그 대상을 열렬히 사랑하지 않고서는 있을 수 없다. 그리하여 토마스는 신앙의 견고성은 지성의 세계 에 있지 않고 의지의 영역에 속한다고 하였다. 신앙개조에 대한 지식이 풍부한 사람이 반드시 굳은 신앙을 가지는 것이 아닌 것도 그 때문이다.

   신앙은 삶에서 도저히 분리할 수 없는 내재적(內在的) 제문제에 대한 정면의 대결이요 이 대결을 통하여 해결에 이르기까지 자기희생까지도 불사하는 결연한 행동이다. 진지한 신앙인은 참된 신앙을 끈기 있는 용기로써 계속한다. 이 같은 겸손과 성실과 관용은 위대한 인간가치이므로 가톨릭 세계관은 근본적으로 낙관적이며 긍정적이다. 인간자연존재이면서 동시에 초자연적 목적에로 지정되어 있는 존재이기 때문에 자연존재로서의 모든 적극적인 인간가치를 인정하면서도 그 인간가치들은 영원한 가치인 하느님의 경륜 안에서 긍정되고 질서지어져야 한다. 이것이 가톨릭의 세계관이요 인생관이다.

   이상에서 논한 바와 같이 신앙은 일종의 인식(認識)이기만 공허한 주관적 사색이 아니고, 철석같은 신뢰심이지만 공허한 느낌이 아니다. 그것은 적극적이고 인격적인 긍정이며, 신앙자가 결단으로써 자기 전인격을 내걸어 쟁취하는 답변(Yes)이다. 신앙은 하느님은총으로 점화되고, 하느님의 증언을 동기로 하며, 하느님을 차지하는 시동적(始動的) 행위이다. 인간하느님의 도우심에 힘입어 지성적 인식과 의지의 결단에 의하여 신앙을 가지며, 희망으로 신앙이 지탱되고 사랑으로 생활화 한다. 한마디로 신앙은 인간하느님 앞에 인간답게 존재하고 행위하게 하는 실존적 지혜(實存的智慧)이다.

   [참고문헌] 鄭夏權, 가톨릭 신앙의 개념, 신학전망, 32, 1976 / J. Ratzinger, 그리스도 신앙의 어제와 오늘, 분도출판사, 1974; 신앙과 미래, 가톨릭출판사, l975 / 崔昌武, 신앙생활, 신학전망, 32, 1976 / Juan, Alfaro, 신앙의 양면성, 전망, 11, 1970 / B. Cooke, 신앙의 형성,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1967 / P. Berger, 신앙과 종교심의 구별은 가능항가?, 신학전망, 11, 1970 / H. Kung, 진리의 조작, 전망, 9, 1970 / K. Lutti, 현대와 더불어 대화하는 신앙, 기독사상, 11, 1967 / J. Mouroux, 신앙에 있어서 이성의 역할, 전망, 9, 1970 / P. Nemechegyi, 하느님을 찾아서, 분도출판사, 1975 / P. Nemeschegyi, 신앙과 영성, 신학전망, 26, 1974 / C. Duquoc, 신앙은 사적인 것인가?, 신학전망, 29, 19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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