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검색 자료들 - "참된 단식", "식사도 성사" | 카테고리 | 천주교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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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이삼용 | 작성일2014-04-03 | 조회수1,361 | 추천수2 | 신고 |
(십자성호를 그으며)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좋은 글 오려주신 모든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차제에 검색한 자료를 올려 함께 나눌까 합니다. "식사도 성사다"라는 말씀이 특별히 와닿았습니다. 이하 (인용문) 참된 단식 - 2.24, 이수철 프란치스코 성 요셉 수도원 원장신부님 작성자 김명준(damiano53) 번 호 71438 작성일 2012-02-24 오전 10:10:20 조회수 473 추천수 9
2012.2.24 재의 예식 다음 금요일 이사58,1-9ㄴ 마태9,14-15
참된 단식
중요한 말은 한 글자라 하는데 ''숨''과 ''물''과 ''밥''이 그러합니다. 숨 쉬어야, 물 마셔야, 밥 먹어야 사니 참 절실한 말입니다. 육적 존재로서의 인간의 허약함을 절감케 하는 말입니다. 이런 깨달음에서 저절로 솟아나는 겸손과 감사의 마음입니다. 오늘은 주로 밥과 관련하여 참된 단식에 대한 묵상을 나눕니다. 사는 것은 먹는 것이라 할 정도로 밥은 절대적입니다. 하여 먹는 재미가 없으면 무슨 재미로 사느냐는 말도 하곤 합니다. 에바그리우스 폰티쿠스의 여덟 가지 악덕의 첫 머리에 오는 것 역시 식욕의 탐식입니다. 식욕의 절제가 모든 절제의 기초임을 깨닫습니다. 사실 입에서 나오는 말의 절제와 입으로 먹는 밥의 절제보다 힘들고 중요한 수행은 없습니다.
진정 말의 실수가 없고 식욕에서 자유로운 사람이 있다면 완덕에 도달한 사람이라 할 수 있습니다.
식사(食事) 역시 성사(聖事)입니다. 불교의 오관계의 기도가 우리의 사순시기 식사 전 기도가 식사를 성사로 만듭니다.
-오관계(五觀戒) 計功多少量彼來處(계공다소양피래처) 이 음식이 어디에서 왔는가 헤아려보니 忖己德行全缺應供(촌기덕행전결응공) 덕행이 부족한 나로서는 받기가 부끄럽네 放心離過貪等爲宗(방심이과탐등위종) 마음의 온갖 잘못과 욕심 버리고, 正思良藥爲療形枯(정사양약위료형고) 바른 생각으로 몸을 유지하는 양약으로 삼아 爲成道業應受此食(위성도업응수차식) 깨달음을 이루고자 이 공양을 받습니다-
우리 믿는 이들의 기도로 삼아
식사 전이나 미사 중 영성체전 속으로 되 뇌이며 기도로 바쳐도 은혜로울 것입니다.
-사람이 빵으로만 살지 아니하고, 하느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나이다.
주여 은혜로이 내려주신 이 음식과 우리에게 강복하소서.-
우리의 사순시기 식사 전 기도 역시 육신의 빵과 더불어 말씀의 빵도 생각하게 만듭니다.
이 기도문 역시 식사 전은 물론 미사 시 말씀과 성체를 모실 때 바치면 은혜로울 것입니다.
그러나 침묵처럼 단식도 절대적 가치는 아닙니다. 침묵이 필요한 것은 우울증 환자나 외롭게 살아가는 독거노인이 아니라 말 많은 이들에게 필요하듯 단식 역시 굶기를 밥 먹듯 하는 이들이 아닌 잘 먹고 사는 이들에게 해당됩니다.
침묵이나 단식 역시 사랑의 잣대로 분별해야 함을 깨닫습니다. 사랑과 정의의 실천이 병행할 때 참된 단식입니다. 참된 단식의 열매가 사랑과 정의의 실천입니다. 또 참된 단식은 저절로 기도와 자선으로 직결됨을 깨닫습니다.
단식을 통해 굶주림을 체험할 때 저절로 하느님께 대한 배고픔으로 직결되어 하느님의 말씀을 찾아 기도할 것이며 배고픔의 체험을 통해 굶주린 이들에 대한 연민의 사랑으로 자선을 실천하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십 주야 아무것도 먹지 않고 하느님과 머문 모세와, 역시 사십 주야를 아무 것도 먹지 않고 악마의 유혹을 말씀으로 이겨낸 예수님에게서 단식과 기도, 자비행이 하나로 통합됨을 봅니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오늘 말씀의 이해도 확연해집니다. 예수님이나 예언자들은 결코 단식을 절대화하지 않았습니다. 단식의 참 의미를 밝히고 실천하도록 진력했습니다.
사랑과 정의가 빠진 껍데기 헛된 단식을 질타한 이사야 예언자입니다. “내가 좋아하는 단식은 이런 것이 아니겠느냐? 불의한 결박을 풀어주고 멍에 줄을 끌러주는 것, 억압받는 이들을 자유롭게 내보내고, 모든 멍에를 부수어 버리는 것이다. 네 양식을 굶주린 이와 함께 나누고, 가련하게 떠도는 이들을 네 집에 맞아들이는 것, 헐벗은 사람을 보면 덮어주고, 네 혈육을 피하여 숨지 않는 것이 아니겠느냐?”
구구절절 공감이 가는 말씀입니다.
이렇게 참된 단식인 사랑과 정의를 실천할 때 우리의 빛이 새벽빛처럼 터져 나오고, 우리의 상처는 곧 바로 아물게 되리라는 주님의 은혜로운 약속입니다. 복음의 주님 역시 타성에 젖은 단식이 아닌 적절한 때의 단식을 권합니다.
“혼인 잔치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는 동안에 슬퍼할 수야 없지 않느냐? 그러나 그들이 신랑을 빼앗길 날이 올 것이다. 그러면 그들도 단식할 것이다.”
타성적이고 의례적인 단식이 아니라 당신의 십자가의 수난과 죽음을 상기하며 적절한 때 고난을 함께 하는 마음으로 단식하라는 말씀입니다.
하여 우리는 사순시기 재의 수요일 아침에 단식하였고 또 자발적으로 사순 시기나 적절한 때에 단식하기도 합니다.
오늘도 주님은 참된 단식의 삶을 지향하는 우리들에게 성체성사를 통해 당신 말씀과 성체의 생명의 빵으로 우리를 충만케 하십니다.
아멘. *********************************************************************************** 오늘 저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고
주님의 기도안에서 우리는 주님께 이렇게 기도합니다.
"오늘 저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고.." 그리고 그 기도의 응답으로 우리는 또 이렇게 기도합니다. "주님 은혜로이 내려주신 이 음식과 저희에게 강복하소서."
그리스도교 신자들이 다른 사람들에게 자신이 그리스도교 신자임을 알리는 가장 상징적이고 외적인 모습은 바로 음식앞에서 기도하는 것입니다.
처음 신앙생활을 하는 이에게 이것은 매우 쑥스럽고 어색한 행동입니다. 그러나 분명 이 행위는 우리의 외적인 신앙고백입니다.
하느님께서 이 자연과 인간를 위해서 지금도 일하고 계신다는 가장 분명한 증거가 바로 우리 식탁에 놓인 음식이요, 그 창조사업을 계승한 우리들도 일하고 있음을 드러내는 표지이기도 합니다.
우리 앞에 놓인 음식은 우리 노동의 선물이요 또한 여성들의 노동을 통해 재료가 음식으로 변화된 은총의 선물입니다. 그 짧은 기도 안에 생각해야 될 것도 많고, 감사드려야 할 대상도 참으로 많습니다. 그러나 언제부터인가 그 식사전 기도는 우리의 마음이 담겨져 있지 않고 형식으로만 남게 되었습니다. 오늘은 내 밥상앞에 놓은 음식 앞에서 최대한의 감사를 표현해보면 어떨까요?
저는 당신께 두 가지를 청하였습니다. 제가 죽기 전에 그것을 이루어 주십시오. 저를 가난하게도 부유하게도 하지 마시고 저에게 정해진 양식만 허락해 주십시오.
그렇지 않으면 제가 배부른 뒤에 불신자가 되어 "주님이 누구냐?"하고 말하게 될 것입니다. 아니면 가난하게 되어 도둑질하고 저의 하느님 이름을 더럽히게 될 것입니다.(잠언30,7-9)
- 염주제준성당 공동체 ''일곱천사의 방’ 중에서 -
********************************************************************************** 어느 법학도가 친구의 권유로 세례를 받기 위해 교리시간에 배운대로 기도를 아주 열심히 하기 시작 했다.
식사 전 후 기도는 기본이었고 아침 저녁으로 아침기도와 저녁기도, 하루 세번 삼종기도를 빠트리지 않았다.
그런데 하루는 대부가 될 친구과 부페 식당에 가게 되었는데 접시에 음식을 담아 올 때마다 식사전 기도를 하는 것이었다.
함께 간 친구가 그에게 식사전 기도는 한번만 하면 된다고 하자, 법학도가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식사전 기도문에 ''주님 은혜로이 내려주신 이 음식과 저희에게 강복하소서'' 라고 되어 있지 않나?
그런데 아까 기도한 ''이 음식은'' 다 먹고, 지금 이 음식은 아까 기도한 그 음식이 아니니 다시 한번 강복해 주십사고 기도하는 것이네."
그러자 친구는
"이보게 나는 그래서 항상 ''이 음식과 앞으로 먹을 음식과 저에게 강복하소서'' 라고 했다네. 자네도 그렇게 하게"라고 했다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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