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약 성경 다시 읽기] 말씀하시는 하느님 - 히브리서 신앙 생활을 한 지 오래되었어도 신앙감은 여전히 흐릿한 상태라는 고백을 종종 듣곤 합니다. 신앙적 지식이라도 차근차근 쟁여왔어야 했는데, 종교적 체험이라도 가슴 한 켠에 선명히 남아있다면 좋을 텐데, 라며 제 신앙의 처지를 부끄럽게 여기는 경우도 많습니다. 그럴 때 마다 신앙이 무언지, 다시 한번 묻습니다. 우리 각자가 노력하면 성숙하고 깊어질 수 있는 게 신앙인지 또 묻게 됩니다. “사실 시간으로 보면 여러분은 벌써 교사가 되었어야 할 터인데, 아직도 하느님 말씀의 초보적인 원리를 다시 남에게서 배워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여러분은 단단한 음식이 아니라 젖이 필요한 사람이 되었습니다.”(5,12) 히브리서에 나타나는 신앙인의 처지를 단적으로 보여 주는 말씀입니다. ‘젖이 필요한 사람’, 아직 거칠고 딱딱한 음식을 삼키지 못하는 어린 아기와 같은 신앙의 미성숙을 안타까워하는 저자의 마음을 읽습니다. 사실 히브리서가 건네진 신앙 공동체는 억압과 박해를 이겨 낸 훌륭한 공동체였습니다.(10,32-34) 믿음의 빛을 받아들이는 그 순간에 신앙은 찬란했고 용맹했으며 슬기로운 식별력을 갖추었습니다. 그런데 어쩌다 불안하고 나약하며 위태로운 믿음의 처지가 되었을까요. 그래서 히브리서는 요구합니다. 하느님 말씀을 일러 준 지도자들을 기억하고 그들의 믿음을 본받으라고요.(13,7) 히브리서의 저자는 수려한 그리스어를 구사하고 유다 전통, 특별히 사제계 전통에 박식한 사람으로 여겨집니다. 전통적으로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나 로마를 집필 장소로 추정하는데, 유다의 본토가 아닌 헬레니즘이라는 이방 문화와 사상 안에 살아가는 그리스도교 공동체의 믿음을 확고히 하는 데 히브리서의 저술 의도가 있음도 명확합니다. 시간이 지날수록 신앙의 순수함이 옅어져 가는 것을 우려한 히브리서는 믿음이 무언지 오늘 우리의 질문에 의미있는 답을 제시합니다. 히브리서는 먼저 ‘말씀’에 대해 묵상케 합니다. 히브리서에서 말씀은 하느님의 역동적인 자기 계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람이 깨닫지 못하는 지고지순한 가르침이나 신비하고 초월적인 진리를 알려주시는 분이 아니라 우리를 위해 역사 속에서 수차례 말씀하시고 심지어 당신이 직접 인간이 되어 오셔서, 그리고 그 인간의 자리에서 당신 스스로 제물로 바쳐짐으로써 그렇게도 애타게 인간에게 말씀하시는 분이 하느님이십니다.(1,1-2) 요컨대 히브리서의 말씀은 끊임없이 우리 인간에게 ‘말씀 하시는 하느님’이십니다. 말씀하시는 하느님은 아들 예수님을 통해 인간의 역사 안에 온전히 함께하십니다. 히브리서는 그런 예수님을 구약의 대사제에 빗대어 묘사합니다.(4,14) 예수님을 대사제에 비유하는 건, 신약 성경의 여러 책들 중에 히브리서가 유일합니다. 예수님을 대사제에 빗대는 점에서 전통적으로 사도 바오로의 서간들과 차별화됩니다. 사도 바오로의 친서에는 율법에 대한 비판적 관점과 예수님의 부활에 관한 사상이 주를 이루고 있어서 예수님을 유다의 대사제로 여기고 대사제의 율법적 관점을 제시하는 히브리서는 사도 바오로의 서간들과는 다소 거리가 있는 것이지요. 예루살렘 성전과 관련된 사제 직분의 율법적 규정과 예배의 형식이 히브리서에 고스란히 적혀 있습니다. 대사제는 하느님과 그분 백성의 화해와 일치를 위한 중재자적 역할을 도맡았습니다. 그러나 구약의 대사제의 중재자적 역할은 천상 성소의 그림자에 지나지 않는 지상의 공간적 한계에 갇혀 있었다는 게 히브리서의 관점입니다.(8,5;9,1) 이를테면 구약의 시간은 아직 하느님과의 완전한 일치에 들어가지 못한 것이고(9,8) 성전에 얽매인 여러가지 율법 규정은 그 일치를 명확히 드러내지 못하는 외적 법규일 뿐이라는 것입니다.(9,10) 그러나 새로운 시대, 새로운 대사제로 오신 예수님을 통해서 하느님과의 일치와 친교는 완전히 이루어졌습니다.(10,19) 성전에서 매일같이 반복되었던 율법 규정들의 실천이 아니라 예수님의 피로써, 다시 말해 예수님께서 단 한번 당신을 제물로 바치심으로써 모든 이들을 거룩하게 해 주셨습니다.(10,10.14) 이렇게 구약의 시대와 예수님의 시대는 확연한 차이를 보입니다. 하느님께서 아들 예수님을 통해 이 세상에 말씀하고자 하신 뜻은 분명합니다. 하느님을 믿어 생명을 얻는 것입니다.(10,39) 그 생명을 위해 하느님은 역사 안에서 수도 없이 말씀하고 계시고 아들 예수님의 희생을 통해 어떻게든 인간에게 죽지 않고 살기를 바라시는 것입니다. 생명에 대한 끊임없는 하느님의 초대는 인간 역사 안에서, 믿는 이들이 살아낸 삶의 `흔적 안에서 계속된 것이었습니다. 히브리서 11장부터 믿음의 역사가 서술됩니다. ‘믿음으로써’로 시작하는 문장이 반복되면서 인류 역사가 믿음으로 이어져 왔음을, 그 믿음 안에 하느님께서는 여전히 함께하고 계심을 강조합니다. 이 세상을 위해 당신 아들의 생명마저 아낌없이 내어주신 하느님께 맞갖는 자세는 다시 하느님을 찾아 나서는 믿음, 바로 그것입니다. 맥이 풀린듯 힘이 빠진듯 건조한 신앙에서 벗어나(12,12) 그리스도의 동료로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느님과 온전한 일치를 이루는 것이 히브리서가 말하는 믿음의 본디 의미입니다.(2,7-19) 믿음은 개인적인 수련이나 단련이 아닙니다. 이른바 개인의 ‘노력’으로 얻어지는 게 아니라 하느님과의 친교 안에서 주어지는 선물입니다. 믿음은 그래서 천상의 위대한 대사제이신 예수 그리스도께 나아가는 순례의 여정입니다.(4,14-16) 그 여정의 길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당신을 온전히 이 세상에 나누셨듯이 우리 역시 ‘선행과 나눔’의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13,14-16) 그렇지요. 믿음은 저 혼자만의 평화나 안식을 위한 도구가 아니라 함께 살아가는 삶, 그 자체입니다. 하느님께서 인간의 역사 안에서 인간을 향해 늘 말씀하시듯, 우리 역시 이웃과 이 세상을 향해 늘 사랑과 나눔의 말을 건네는 것, 그것이 믿음입니다. 신앙감이 떨어지고, 신앙적 성숙이 제자리 걸음인듯 느껴질 때 ‘나의 형제와 자매는 어디에 있는가?’ 라는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져보는 것도 좋을 테지요. [월간빛, 2021년 1월호, 박병규 요한보스코 신부(대구가톨릭대학교 신학대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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