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약 성경 다시 읽기] 내일이 아닌 오늘 - 마르코 복음 마르코 복음은 복음이라 하기엔 꽤나 무겁고 슬픈 이야기입니다. 하느님의 아드님이 십자가에 처형된 끔찍한 이야기입니다. 마태오 복음과 루카 복음도 모두가 십자가에 돌아가신 예수님에 대해 이야기하는데, 유독 마르코 복음만 더 끔찍한 이야기라고 할 수 있는가, 반문도 하시겠지요. 그러나 저는 마르코 복음에서 슬픔에 대한, 참혹함에 대한 이야기를 좀 해볼까 합니다. 2세기 말엽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스는 마르코 복음이 쓰여진 자리를 로마로 생각했습니다. 다양한 민족과 문화를 배경으로 구성된 로마의 그리스도교 공동체는 유다의 율법과 관습에는 낯설어했겠지요. 그래서인지 마르코 복음은 이방인들에 대한 선교를 암시하는 이야기를 많이 소개합니다.(7,27;10,12;11,17;13,10;14,9;15,39) 로마라는 다민족, 다문화의 어지러운 자리에서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는 건,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굳이 네로 시대에 그리스도인이 로마 화재의 주범으로 몰려 모진 박해를 당한 기억을 언급하지 않아도 로마의 그리스도인들은 사회 하층민으로 억압과 차별 속에 살아야만 했지요. 마르코 복음 13장의 묵시문학적 표현이 네로의 박해를 빗대어 묘사한 것이라고 합니다. 막강한 권력과 상업적 번성의 상징인 로마의 그늘 아래 숨죽이고 신음하며 살아간 그리스도인들, 마르코 복음은 그들의 애환 한가운데에 울려 퍼진 예수님의 슬픈 이야기입니다. 산다는 게 끔찍하고 서러울 때 제 삶 속으로 파고드는 이기심은 매우 강렬하게 작동합니다. 산다는 건, 모두가 제 몸뚱아리 하나 건재하는 것으로 치환되고, 세상과 그 속에 살아가는 이들을 경쟁 혹은 대결의 대상으로 규정한 채 지금 오늘의 세상을 전쟁터로 여기며 지쳐가지요. 이때 등장하는 새로운 세상이 있으니, 바로 ‘내일’이라는 세상입니다. ‘내일은 괜찮겠지.’, ‘내일 더 나은 내가 될 수 있을 거야.’, ‘내일은 성공하고 행복할 거야.’… 마르코 복음은 성공이 아닌 실패의 하느님, 행복이 아닌 불행의 하느님, ‘내일’이 아니라 오늘, 이 팍팍한 삶 안에 함께 계시는 하느님의 아들, 예수님께 집중합니다. 복음서의 시작에서 ‘하느님의 아드님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시작’이라는 간결한 외침을 듣게 됩니다.(1,1) 천상의 고결한 권능 속에 계셔야 할 하느님의 아들께서 이 지상의 구체적 삶에 함께하신다는 사실이 복음이라고 마르코는 선포합니다. 갈릴래아에서 예루살렘으로 향하는 인간 예수의 발걸음은 역사 안에 살아 숨쉬는 하느님께서 당신을 드러내시는 계시의 여정이며 그 여정은 십자가상 죽음으로 끝이 납니다. 예수님은 당신의 수난을 시작하기에 앞서 이런 질문을 던지셨지요.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8,27) 이 질문에 대한 답은 마르코 복음 막바지에 이르러서야 제대로 듣게 됩니다. “참으로 이 사람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셨다.”(15,39) 바로 십자가에서 죽어간 예수님을 바라본 백인대장의 외침이 마르코 복음이 원하는 예수님에 대한 참된 신앙고백이었습니다. 십자가와 하느님의 아드님, 이 두 단어가 조우할 수 있느냐에 대한 질문을 우린 잃어버린 듯 합니다. 십자가의 형벌이 잔혹하다 못해 끔찍한 이미지로 이해되는 건, 2000년 전의 일로 각인된 지 오래인 듯 합니다. 집안의 십자가는 ‘예쁜 것’이어야 하고, 손과 목에 걸려있는 십자가는 겉치레의 편린으로 전락한 건 아닌지 되물어 봅니다. 다른 공관복음과 달리 마르코 복음은 십자가의 수난 이야기를 가장 처절히, 가장 고통스럽게 묘사하는 데 주저하지 않습니다. 하느님의 아드님이 인간의 가장 끔찍한 죽음을 겪어야만 한다는 이야기를 받아들이는 건 ‘내일’의 희망을 완전히 꺾어놓는 잔인한 이야기일 수 밖에 없습니다. 적어도 하느님의 아드님은 이 세상 어떤 권력에도 굴하지 않는 왕중의 왕, 주님 중의 주님이어야 하니까요. 베드로가 그랬습니다.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고백한 베드로에게(8,29) 하느님의 아들은 세상을 뒤집어 엎을 만한 권력을 지녀야 했습니다. 아시다시피 베드로의 고백은 예수님으로부터 차갑게 거부당했지요. ‘사탄’이라는 비난까지 들어야만 했던 베드로는 십자가의 메시아가 아니라 세상이 바라는, 세상에서의 성공과 평안을 가져다주는 메시아를 기다렸고 예수님에게 그 메시아의 이미지를 투사하여 갈망했었습니다. 사실 마르코 복음의 예수님은 당신에 대해 제대로 알지 못한 채, 믿지 못한 채 고백하는 모든 외침들에 대해 침묵하길 가르칩니다. 회당에서의 더러운 영에게(1,24이하), 예수님에 의해 치유된 병자들에게(1,44-45;5,43;7,36;8,26), 심지어 베드로와 야고보, 그리고 요한에게조차 예수님은 침묵하길 바라셨습니다.(9,9) 이 침묵의 명령은 ‘내일’의 허황된 기대에 빠져 역사 속에서 인간의 고통에 함께 아파하고 함께 살아가는 하느님의 아드님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완고함에 대한 질타였습니다. 마르코 복음은 본디 16장 8절에서 끝이 났습니다. 그 뒤의 이야기들은 후대에 첨가된 부분이지요. 16장 8절은 이렇습니다. “그들은 무덤에서 나와 달아났다. 덜덜 떨면서 겁에 질렸던 것이다. 그들은 두려워서 아무에게도 말을 하지 않았다.” 그들이 느꼈던 두려움은 일상 속 박제가 된 현실감각이 여지없이 무너졌기 때문입니다. ‘당연한 것’은 없습니다. 복음의 가치는 ‘본디 그러해야 하는 것’에 대한 저항일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교의 신성한 가치는 십자가를 지신 하느님에게서 시작하는 것이지, 구름을 타고 오시는 화려한 임금에게서 시작한 게 아닙니다. 그리스도교는 오늘 아파하는 이들 안에 제 정체를 드러내며 기뻐합니다. 십자가의 고통과 슬픔을 함께 나눠지며, 그 나눔으로 기쁨을 이야기할 줄 아는 게 그리스도교입니다. ‘내일’의 희망과 성공, 그리고 행복은 하느님께서 그려 나가시도록 맡겨드립시다. 우리는 그저 오늘을, 이 힘든 오늘을 차근차근 묵묵히 즈려밟고 걸어갈 뿐입니다. [월간빛, 2021년 2월호, 박병규 요한보스코 신부(대구가톨릭대학교 신학대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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