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 하느님은 사랑인가요?/유다의 역할을 보면서 | 카테고리 | 성경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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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박윤식 | 작성일2014-06-03 | 조회수1,339 | 추천수1 | 신고 |
(십자성호를 그으며)
질문 : 하느님은 사랑인가요?
통상 “하느님은 사랑이시다”라고 하십니다. 하지만 어떤 측면에서는 이러한 말이 허구성에 불과하다고 생각되어지는데 이러한 저의 생각(편견)에 대해서 가톨릭교회의 교리 차원에서 합당한 설명을 부탁드립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희생은 미리 계획된 하느님의 구원사업의 일환이 아닐까요? 그렇다면 예수님의 십자가상의 구원은 제자 중 한분인 인간 가롯 유다의 배반과 희생을 통하여 구원사업이 이루어진 것이 아닐까요? 그러한 유다의 배반과 희생은 유다의 자발적인 행동에서 비롯되었다고 하지만 하느님의 계획된 인류구원사업을 통해 볼 때 우연히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고 생각됩니다.
다만 하느님의 구원계획에 인간 가롯 유다가 이용 희생된 것이 아닐까요? 그렇다면 “하느님은 사랑이다.”라는 말과 가롯 유다의 운명적인 희생관계는 이율배반적이 아닐까요? 따라서 선량한 인간 가롯 유다의 배반이 없었다면 하느님의 십자가 구원은 실패하고 아직도 인류는 원죄에서 해방되지 못하고 살아가고 있지 않을까요?
하느님은 전능하신 분이시니까 인류구원을 위해 아마 제3의 방법이 동원되지 않았을까요? 이러한 점을 통해 볼 때 우리는 가롯 유다에게 감사해야 함과 그분을 위해 기도해야 마땅하지 않을까도 생각되어집니다. 이러한 나의 모든 생각이 잘못되었을까요? 아니면 어린이와 같이 단순히 믿기만 하라는 말입니까? 누가 신앙의 신비를 부정하던가요? 분명 해답은 성경 말씀 속에 있다고 믿는데 그 길을 찾지 못하고 있으니.
언제가 피정을 통하여 저 지옥의 밑바닥에서 들려주시는 주님의 메시지를 기대하고 있습니다. 다만 현재의 나의 상황을 통해 볼 때 신앙상의 갈등과 분심이 일어나는 현상은 사탄의 유혹인가요? 하느님의 계시하신 진리 교회의 가르침을 기다립니다.
답변1 : 요한1 4,8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하느님을 알지 못합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도 사랑을 해 보십시오.
답변2 : 예, 정말 사랑이십니다. '예, 하느님은 사랑이시고, 그분 사랑과 이웃 사랑을 하면서 우리는 믿음의 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사랑 아닌 것을 한번 생각해 봅시다. 우리가 자주 범하는 온갖 죄악입니다. 이 사랑에 역행하는 것이 우리네 삶에 많이 들어와 있습니다. 그렇지만 우리는 그때 마다 매번 회개를 하고 또 새로운 신앙의 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사랑과 용서가 있기 때문입니다. 사랑과 사랑 아닌 이 모든 것을 사랑이신 하느님께서 손수 창조 하셨습니다. 사랑을 더 사랑하게 하시기 위해서 사랑 아닌 것을 그분께서는 만드셨습니다. 그 속에는 이브를 꾀어 죄를 짓게 한 뱀, 세례 받은 예수님을 광야에서 온갖 시험으로 유혹한 사탄이라는 악마, 예수님을 수석 사제들에게 팔아넘긴 열두 제자 가운데 하나인 유다 이스카리옷, 바라빠를 풀어 주고 예수님을 채찍질하게 한 다음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넘겨 준 빌라도, “그러면 메시아라고 하는 이 예수는 어떻게 하라는 말이오?”라는 총독의 물음에 “십자가에 못 박으시오!”라고 예수님 처형을 외치는 성난 군중과 같이 사랑 아닌 것들도 많이 있습니다.
가끔 우리도 이렇게 사랑이 없는 행동을 하는 사람이 되곤 합니다. 사랑을 모르는 행동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회개를 하여 하느님 보시기에 좋은 사람이 되고자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믿음의 삶입니다. 정반합[正反合]이란 말을 되새겨 봅니다. 사랑 아닌 것과 그것에 반대되는 사랑과의 총합된 결실은 더 값진 아름다운 참사랑이 생겨 날 겁니다. 사랑 아닌 것들이 있는 반면, 그 사랑을 더 빛나게 해 주는 사랑인 것은 더 많이 있을 겁니다.
스스로를 우리와 같은 인간 예수님으로 오시어 사랑 실천을 보여 주신 하느님, ‘이 몸은 주님의 종입니다. 지금 말씀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란다.’라고 하느님의 부름에 순명하신 성모님, ‘당신은 자신을 누구라고 생각하고 있소?’라고 그들이 다그쳐 묻자, ‘나는 예언자 이사야의 말대로 주님의 길을 곧게 하라는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요.’라고 일러 주신 세례자 요한, 이 믿음의 사랑 실천을 위해 사신 분들과 그 업적은 사랑의 실체요, 우리들 믿음의 기준들입니다.
이것에 대한 기도를 통해서, 우리는 참된 믿음의 신앙생활을 꾸려 나갈 수 있을 겁니다. 헤로데, 유다 등과 같은 인물도 ‘하느님의 구원 계획에 등장하는 인물도 사랑해야 되지 않느냐?’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그분의 치밀한 계획에 이용 희생된 사람이라 생각하여 감사와 기도까지 해야 마땅하지 않을까 생각할 것 까지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때로는 사랑을 더 사랑하기 위해서, 사랑 아닌 것을 사용할 수도 있습니다. 이 사랑 아닌 것에 감사의 기도를 많이 드리다 보면, 사랑인 것에 대한 참된 기도를 드릴 게 없을 수도 있겠지요. 그렇지만 이런 묵상을 통해서 하느님의 심오한 사랑을 체험할 수 있는 기회를 가질 수 있는 것에 감사를 드립니다. 사랑 아닌 것에 대한 생각을 통해서, 사랑다운 것에 대한 더 큰 사랑을 우리는 배웁니다. 믿음의 신앙생활의 성숙함을 위해서, 이런 정반합적인 묵상을 할 수 있도록 배려해 주신 하느님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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