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약 성경 다시 읽기] 세상이 왜 이래? - 마태오 복음 ‘세상이 왜 이래?’라며 트로트로 우리의 일상을 일깨운 나훈아의 일침은 두고두고 곱씹을만 합니다. 오늘날 한국 사회는 내세울 만한 ‘어른’이 없는, 지켜야 하는 ‘신념’이 없는 혼란을 학습하는 듯 합니다. ‘학습’이라는 단어가 불편하신 건 아닌지 조심스럽습니다. ‘그게 무슨 학습이야, 그냥 혼란이지!’라고 반문하고 싶으신 건 아닌지요. 혹여 신문이나 인터넷에 떠도는 이야기에 제 신념과 사상을 몽땅 저당잡힌 채 ‘세상이 왜 이래?’ 하며 자조섞인 푸념만 늘어놓거나 괜한 분노로 세상을 탓하는 건 아닌지요. 우리는 분명 ‘학습’하는 기회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세상이 혼란스러울수록 제 신념의 근거와 본디 지향점이 무언지 제대로 살펴 볼 기회로 삼는 건 꽤나 어려운 학습의 시간입니다. 마태오 복음의 공동체 역시 어려운 세상을 살아갔었지요. 전통적으로 마태오 복음은 팔레스티나 땅 북쪽에 위치한 시리아 지역에 피난 간 신앙 공동체를 위해 쓰여졌다고 전해집니다. 때는 아마도 70년 이후인 듯 합니다. 예루살렘 성전이 붕괴된 후 성전을 중심으로 권력을 유지해 온 사두가이파가 무너지고 율법과 그 가르침을 견지한 바리사이파에 의해 세상이 재편되는 시절이었습니다. 하나의 권력이 몰락하고 다른 세력이 새로운 권력의 중심으로 부각할 때마다 우리는 사상과 신념의 혼란을 겪게 됩니다. 그리고 지난 권력의 부패와 적폐를 부각시켜 새로운 권력의 정당성을 확보하게 되지요. 그 틈바구니 속에 ‘그리스도교 공동체’는 새로운 권력인 바리사이들에게 있어 ‘잘못된 사상과 신앙’을 지닌, 그리하여 사회 속에서 제거되어야 할 세력으로 규정됩니다. 그리스도인들에 대한 박해와 모욕, 그리고 겁박은 새로운 세상 안에서는 지극히 정의로운 것이었고 지극히 상식적인 것이었습니다. 그런 생각이 유다 사회를 가로지르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을 따르며 그분의 가르침을 삶의 현장에서 지켜내야 했던 신앙 공동체에겐 예수님을 믿는 것이, 그분의 가르침을 지키고 전하는 것이 과연 올바른 것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이 필요했습니다. 이에 마태오 복음은 명징한 답을 제시합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것, 그분의 가르침을 견지하는 것, 그것은 그릇된 것이 아니라 오히려 바리사이들의 의로움보다 더 큰 의로움을 지켜내는 것이라고 말입니다.(마태 5,20) 나아가 마태오 복음은 유다 사회가 그리스도교 공동체에 적대감을 드러내더라도 유다 사회를 품어 안아야 된다고 역설합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은 유다 사회의 율법과 상반된 낯설고 새로운 가르침이 아니라 오히려 유다 사회가 믿고 기다려온 성경의 완성을 선포하는 것이라고 말입니다.(마태 5,17)아브라함의 후손으로(마태 1,1) 유다의 역사 안에서 줄곧 약속되어 온 구원을 완성하러 오신 분이 바로 예수님이라는 사실을 마태오 복음은 자주 언급합니다.(마태 1,23;2,6.18.23;4,15-16;8,17;12,18-21;13,14.35;21,5;27,9-10) 구원의 완성은 율법에 대한 새로운 접근을 요구합니다. 율법은 지켜야 할 규칙이나 어겼을 때 단죄할 심판의 기준이 아니라, 나누고 품고 보듬고 챙기는 형제애를 실천할 자리가 됩니다. 마태오 복음은 크게 다섯 부분으로 나누어 예수님의 가르침을 소개하는데(마태5-7;10;13;18;23-25), 특별히 첫 번째 가르침인 산상설교의 시작은 행복에 대한 선언으로 시작합니다.(마태 5,3) 우리 모두는 행복해지길 원하지요. 행복에 대한 담론이 넘쳐나는 오늘, 대개 행복을 개인의 노력으로 얻어지는 성과물로 이해하는 경우가 많은 듯 합니다. 마태오 복음은 산상설교 안에서 행복을 서로에 대한 형제애로 가르치고 형제애의 실천이 모든 율법과 예언서의 핵심이라고 가르칩니다.(마태 7,12) 프랑스 리옹의 인문학자 미셸 포쉐는 행복을 서로에 대한 ‘개종(회개)’이라고 말한 바 있습니다. 몇몇 율법 조항을 지키는 것으로, 다른 이에게 해를 끼치지 않는 수준에서 제 삶을 챙겨보는 것으로, 함께 살아가는 세상에 대한 책임을 다하는 것이라 여기는 형식주의와 법치주의는 마태오 복음의 입장에선 오히려 불법입니다.(마태 7,21-23) 서로를 챙기며 보듬는 일이, 서로에 대한 관심과 회개가 더욱 풍성히 살아 숨쉬는 곳이 율법이 제 가치를 확연히 드러내는 곳이고 그곳에서 우리는 비로소 ‘행복’을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교회’라는 곳이 그러하지요. 마태오 복음을 ‘교회의 복음’이라고 흔히들 말합니다. ‘엑클레시아(공동체, 교회, 모임이라는 뜻)’라는 그리스말을 품고 있는 복음서라 그렇고(마태 16,18;18,18), 산상설교부터 시작된 하늘 나라의 가치를 이 땅 위에 온전히 드러내야 하는 곳이 ‘교회’여야 한다는 것이 복음서의 주된 가르침이라 그렇습니다. ‘교회’ 안에 사는 것은 서로에 대한 끊임없는 사랑과 용서를 학습하는 것입니다.(마태 18,21-22) 제 아무리 천한 사람이라도 ‘교회’ 안에서는 ‘형제’가 됩니다. 제 아무리 원수라도 교회 안에서는 형제가 됩니다. 불쌍하게 보이는 이에게 돈 한푼 쥐어주는 적선은 쉬울지라도 같은 처지에서 함께 살아가는 형제로 인식하는 건 꽤나 어렵습니다. 마태오 복음은 평소 우리가 생각하는 형제의 개념을 ‘모든 민족’에로 열어놓고 생각하며(마태 28,19-20) 종말에 맞닥뜨릴 심판의 기준점으로 세워 놓습니다.(마태 25,31-46) 형제라는 개념은 다른 이들(다른 민족, 다른 계급, 다른 성을 지닌 이들)에 대한 명백한 경계와 혐오를 가진 채 저들끼리 나눠 먹는 헤게모니의 성벽을 쌓는 게 아닙니다. 경쟁이 치열하고, 치열한 만큼 지쳐가는 오늘의 한국 사회 안에서 보수와 진보, 우파와 좌파, 적폐와 개혁이란 이름으로 대립과 갈등이 첨예한 이유는 제대로 된 현실적 분석과 사회적 성찰이 거세된 제 앞날에 대한 불안과 절망에 기인한 듯 합니다. 지금의 권력이 과거의 적폐를 개혁하겠다는 결기도, 과거의 권력이 지금의 권력더러 새로운 적폐로 규정하는 적대감도, 모두가 하루 벌어 하루를 힘겹게 살아가는 서민들과는 거리가 있는 ‘저들끼리의 기득권 싸움’일 뿐이지요. 이럴 때일수록 신앙인은 다시 한번 ‘교회’를 생각해야 하지 않을까요? 형제애를 독점한 것처럼 세상을 가르치겠다는 오만한 교회를 말하는 게 아닙니다. 혼란스러운 세상이 곧 내 형제요 자매이며 교회 자체라는 생각을 품자는 것입니다. 시끄러운 세상이 우리 집안 이야기고, 내 형제 자매의 이야기이며, 그리하여 내 삶의 이야기로 여기자는 것입니다. 어딜 가든 TV 속 뉴스 아나운서가 전하는 권력가들의 이전투구에 귀를 쫑긋 세우며 이유없는 감정 소모를 제 일상인양 살아가는 이라면, 지금 제 삶은 누구와 어떤 만남을 이어가고 있는지, 그 만남이 근거없는 배타성과 경계심에 매몰되어 있는 건 아닌지 살펴야 합니다. 마태오 복음 25장은 최후 심판 이야기에서 저 멀리, 저 세상 끝날에 가 있는 우리의 시선과 갈망을 지금 여기, 내가 만나고 소홀히 하고 업신여기고 귀찮아하는 사소한 만남 안으로 끌어 당깁니다. ‘세상이 왜 이래?’라고 푸념을 늘어놓는 건 쉽습니다. 다만 그 세상을 제 일로, 제 형제의 일로 여기는 이만이 참 이스라엘이고 참 하느님 백성이며 구원의 완성을 살아가는 행복한 신앙인입니다. 제 일이고 제 형제의 일이라면 우리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은 푸념이 아니라 ‘함께 아파하는 일’입니다. [월간빛, 2021년 3월호, 박병규 요한보스코 신부(대구가톨릭대학교 신학대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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