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행전을 따라가는 성경의 세계] 안티오키아 귀환과 예루살렘 사도 회의 - 오늘날 안티키아(옛 안티오키아) BiblePlace.com 오늘날 터키 지역인 소아시아의 중남부 리카오니아 지방 데르베에서 복음을 전하고 수많은 사람을 제자로 삼은 바오로와 바르나바는 왔던 길로 돌아갑니다. 두 사람은 리스트라와 이코니온과 피시디아의 안티오키아를 거칩니다. 바오로와 바르나바가 유다인들과 그들의 부추김을 받은 주민들에게 박해를 받고 쫓겨난 도시들입니다. 심지어 바오로는 돌에 맞아 죽을 뻔하기도 했습니다. 인간적으로만 생각한다면, 그 위험한 곳들을 비켜 가는 것이 당연할 것입니다. 그러나 두 사람은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그 도시들에는 그들이 전한 복음을 받아들여 제자가 된 이들, 곧 신자들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두 사람은 위험을 무릅쓰면서 그 도시들로 들어가 믿음에 충실하도록 그들을 격려합니다. 또 도시마다 신자 공동체를 위해 원로들을 임명합니다. 그리고 단식하고 기도한 후에 주님께 그들을 의탁합니다(사도 14,21-23). - 돌기둥이 늘어선 길이 인상적인 고대 페르게 유적.BiblePlace.com 페르게와 아탈리아를 거쳐 안티오키아로 바오로와 바르나바는 안티오키아를 떠나 피시디아 지방을 가로질러 남쪽 팜필리아 지방 페르게로 가서 말씀을 전합니다(사도 14,24-25). 페르게는 두 사람이 키프로스에서 배를 타고 처음 소아시아 땅에 도착한 곳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때에는 페르게에서 별다른 선교를 하지 않고 바로 피시디아의 안티오키아로 올라갑니다(사도 13,13-14). 하지만 선교 활동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는 페르게에서도 말씀을 전합니다. 왜 두 사람은 처음 페르게에 도착했을 때는 복음을 전하지 않다가 나중에 돌아오는 길에서야 복음을 전했을까요? 사도행전은 이에 대해 아무런 언급을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 이유를 추측해 볼 수는 있습니다. 바오로와 바르나바는 선교할 때 먼저 유다인들과 유다인 회당을 찾았습니다. 페르게는 그리스와 로마의 영향을 받아 이방 신들 특히 아르테미스 여신을 모시는 이방인 도시였습니다. 그곳에 유다인이 살고 있었는지 또 회당이 있었는지는 확실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내륙 깊숙한 곳이기는 하지만 유다인들이 많이 살고 있고 회당도 있는 피시디아의 안티오키아로 바로 올라갔다고 볼 수 있습니다. - 아탈리아에 있는 하드리아노 황제 문 BiblePlace.com(위), 옛 아탈리아 항구의 벽 BiblePlace.com 또 한 가지 추측은 마르코라고 하는 요한과 관련됩니다. 요한은 바오로와 바르나바가 선교 여행을 떠날 때 조수로 데려간 젊은이였습니다(사도 13,5). 그런데 키프로스까지 동행했던 요한은 팜필리아의 페르게에 도착하자 무슨 이유인지 두 사람을 떠나 예루살렘으로 돌아갔습니다. 이런 상황에서는 두 사람이 바로 선교 활동을 하기가 쉽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래서 페르게를 통과해 피시디아의 안티오키아로 올라갔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선교 활동을 하고 돌아오는 길에는 상황이 달라집니다. 두 사람은 소아시아 여러 도시에서 말씀을 전하면서 ‘하느님께서 다른 민족 사람들, 곧 이방인들에게도 믿음의 문을 열어 주셨다’(사도 14,27)는 것을 체험합니다. 또 수많은 신자가 생기는 성과도 얻었습니다. 여유로워진 두 사람은 이제 안티오키아로 돌아가는 길에 페르게에서 좀 넉넉한 마음으로 복음을 선포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페르게에서 말씀을 전하고 난 두 사람은 아탈리아로 내려갑니다. 아탈리아는 페르게에서 10km 남짓 떨어진 지중해 연안 항구도시였습니다. 오늘날에는 안탈리아로 불리는데 터키에서 다섯 번째로 큰 도시로 인근의 고대 유적들과 아름다운 해변을 찾아 수많은 관광객이 찾는 관광 도시입니다. 이 아탈리아에서 두 사람은 배편을 이용해 출발지인 시리아의 안티오키아로 돌아갑니다. 두 사람은 안티오키아에 도착한 즉시 그 교회 신자들에게 “하느님께서 자기들과 함께해 주신 모든 일과 또 다른 민족들에게 믿음의 문을 열어주신 것”을 보고한 후 안티오키아에 머무릅니다(사도 14,27-28). 바오로의 1차 선교 여행이라고도 하는 이 선교 활동은 45~49년 사이에 이루어졌을 것이라고 학자들은 봅니다. 예루살렘 사도 회의 그런데 안티오키아 교회에 문제가 생깁니다. 유다에서 내려온 사람들이 ‘모세의 관습에 따라 할례를 받지 않으면 구원을 받을 수 없다’라고 가르친 것입니다. 이것은 바오로와 바르나바가 선교 활동을 통해 체험하고 깨달은 것과는 다른 가르침이었습니다. 그래서 두 사람과 그들 사이에 분쟁과 논란이 일어납니다. 결국 안티오키아 교회는 예루살렘 교회에 자문을 얻기로 하고 바오로와 바르나바를 비롯한 대표단을 예루살렘 교회에 보냅니다. - 1세기 예루살렘 모형도 BiblePlace.com 이렇게 해서 예루살렘에서는 이 문제를 검토하기 위해 베드로를 비롯한 사도들과 원로들이 한자리에 모여 회의를 합니다(사도 15,1-22). 이 모임이 바로 그리스도교 역사에서 첫 번째 교회 회의인 예루살렘 사도 회의입니다. 오랜 논란 끝에 베드로가 나서서 다른 민족 출신 그리스도인에게 율법의 멍에를 지우는 것은 부당하다고 설파합니다. 비유다인 신자들에게는 할례를 비롯해 유다인들이 전통적으로 지켜오던 율법 조항들을 지키도록 하는 것은 합당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바오로와 바르나바는 자신들이 선교 활동을 통해 체험한 것들을 이야기하면서 베드로의 주장에 힘을 실어줍니다. 그러자 야고보가 나서서 제안합니다. 다른 민족 사람들 가운데서 믿게 된 이들에게는 △ 우상에게 바친 음식 △ 불륜 △ 목 졸라 죽인 짐승의 피와 고기, 이 세 가지를 삼가도록 하자는 것입니다(사도 15,7-21). 사도들과 원로들은 주님의 형제이자 교회의 세 기둥 중 하나(갈라 1,19 참고)인 야고보의 제안을 받아들입니다. 그리고 그 내용을 편지로 써서 바오로와 바르나바 편으로 안티오키아 교회에 보내면서 예루살렘에 있는 유다스와 실라스 두 사람을 함께 보냅니다. 이들은 안티오키아 교회에 이 편지를 전하고 그곳 형제들에게 힘을 북돋우며 격려합니다(사도 15,22-32). 예루살렘 사도 회의의 결정은 이후 교회의 복음 선포 활동에서 다른 민족 사람들이 말씀을 받아들이는 데에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하지만 유다인들, 특히 율법을 엄격히 지키고자 하는 유다인들에게는 그리스도인들과 그 지도자들에 대한 반감을 갖는 원인이 되기도 합니다. 예루살렘 사도 회의의 결정은 또 베드로를 비롯해 바오로와 바르나바의 선교 체험이 뒷받침했다는 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여기서 한 가지를 깨닫게 됩니다. 규정은 중요합니다. 그러나 규정 자체에 얽매여 살아 있는 체험을 부정할 때 그 규정은 죽은 규정이 될 위험이 있습니다. “그분께서는 죽은 이들의 하느님이 아니라 산 이들의 하느님이시다”(루카 20,38). [월간 레지오 마리애, 2021년 3월호, 이창훈 알퐁소(전 평화신문 편집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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