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약 성경 다시 읽기] 노블레스 오블리주(noblesse oblige) - 루카 복음 바오로의 동반자, 그의 설교를 모아 하나의 복음서를 만든 이, 리옹의 이레네오가 전하는 루카라는 분의 이야기입니다.(필레 24; 콜로 4,14; 2티모 4,11) 의사였다는 설도, 역사가라는 설도 있는, 나름 엘리트 교육을 받은 분으로 교회는 루카를 기억합니다. 그리스어는 물론이거니와 역사적, 지리적 지식에 있어 상당한 수준을 보이는 루카 복음은 그 문학적 짜임새와 흐름에 있어서도 당시 문헌들에 비견해 결코 모자람이 없는 훌륭한 수사학적 기교를 보여줍니다. 루카는 자신이 쓴 복음서를 ‘존귀하올 테오필로스님’에게 전하고자 했습니다.(루카 1,4) ‘존귀하올’이라고 번역된 그리스어 ‘크라티스토스’는 사회적 권위와 권력을 지닌 이를 가리키는 형용사입니다. 요컨대 루카 복음은 사회적으로 엘리트 계급에 속한 이가 또 다른 사회적 권력가를 향해 쓴 수준 높은 글입니다. 대개 사회적 엘리트와 기득권이 주고받는 글과 말들은 서민들에겐 낯설고 불편할 수 있습니다. 삶의 수준과 계급의 처지가 다르기 때문이고 세상을 대하는 방식과 가치관이 서로 엇나가 부딪히기 때문이지요. 그러나 루카 복음은 읽기에 낯설거나 불편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따뜻한 느낌마저 듭니다. ‘사회적 약자’, 그들을 세심히 챙기고 보듬는 루카 복음은 대개의 사회적 엘리트와 기득권이 지니는 삶의 태도와 결이 다른 ‘더불어 함께 살아가는 삶’에 대한 이야기를 찬찬히 풀어갑니다. 이야기의 시작은 마리아의 노래부터입니다. 마리아의 노래는 사무엘의 어머니 한나의 노래에서 영향을 받아 쓰여진 것이라 여겨집니다.(1사무 2,1-10 참조) 사무엘을 통해 이스라엘 사회는 판관시대에서 왕이 다스리는 중앙집권적 사회로 변모합니다. 정치 권력의 체제가 변할 때마다 사회는 요란스러운 갈등과 혼란을 겪습니다. 마리아의 노래는 예수님을 통해 새로운 세상의 새로운 권력을 미리 알려줍니다. “그분께서는 당신 팔로 권능을 떨치시어 마음속 생각이 교만한 자들을 흩으셨습니다. 통치자들을 왕좌에서 끌어내리시고, 비천한 이들을 들어 높이셨으며, 굶주린 이들을 좋은 것으로 배불리시고, 부유한 자들을 빈손으로 내치셨습니다.”(루카 1,51-53) 대통령을 끌어내리고, 대기업 총수들의 재산을 몰수하며, 노숙자와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떵떵거리며 배불리 살게 되었다고 누군가 외친다면, ‘빨갱이’, ‘종북 좌파’, ‘포퓰리즘적 선동’ 등등의 본디 의미가 뒤틀리고 왜곡된 비난이 쏟아지겠지요. 마리아의 노래는 당시는 물론이거니와 오늘날 역시 사회의 기득권과 권력가들에겐 상당한 불편함을 동반한 저주에 가까운 외침임에는 분명합니다. 루카 복음을 이야기하면서 사회적인 혹은 정치적인 관점을 굳이 끌어들이는 이유는 명확합니다. 루카 복음은 ‘역사의 이야기’, ‘삶의 이야기’이기 때문입니다. 루카 복음은 인간 역사의 연대기적 관점을 구체적으로 드러냅니다. 예수님의 시간은 인간 역사의 흐름 안에 새겨지고 흘러갑니다.(루카 2,1-2;3,1-2;23,12) 말하자면 예수님은 천상의 고귀한 공간과 시간에 갇힌 분이 아니라 현실의 구체적인 삶 안에 오신 분이십니다. 세상의 삶은 수많은 사람이 서로 다른 계급 속에서 서로 다른 가치관을 수놓는 역동적 공간이지요. 계급 간의 갈등과 투쟁 속에 예수님은 이 세상에 오셨고, 그 갈등과 투쟁 안에서 예수님은 구원을 전하십니다. 특별히 루카 복음은 ‘기쁘다’라는 ‘카이레’ 동사를 자주 사용하며, 구원을 누릴 기쁨이 인간 세상 안에 태어나신 예수님을 통해 분명히 시작되었음을 선포합니다.(루카 1,28) 다만 구원의 기쁜 소식이 사회적 주류나 기득권에게만 주어진 것이 아니라 사회의 어둡고 감춰진 곳에서 신음하는 사람들에게도 주어졌다는 사실을 루카 복음은 분명히 짚어냅니다.(루카 4,16-30) 그리고 그 구원은 예기치 못한 그래서 기대하지 않은 우연한 사건이 아니었습니다. 하느님께서 인간 역사 안에서 수없이 약속하시고 다짐하시고 보여주신 필연적 결과입니다. 루카 복음은 ‘데이’라는 그리스어, 곧 ‘… 해야 한다.’라는 당위를 가리키는 그리스어를 자주 사용합니다.(루카 2,49;4,43;9,22;13,33) 예전 구약에서부터 전해져 온 메시아의 약속이 예수님의 삶 안에, 그분을 둘러싼 인간의 역사 안에서 완전히 이루어졌음을 루카복음은 선포합니다.(루카 2,34-35;4,16-27;24,25-27;24,44-47) 유다 사회가 기다려 온 구원의 자리는 예루살렘이었습니다. 예루살렘은 하느님 현존의 자리였고, 모든 민족이 모여야 구원의 기쁨을 잔치로 승화시키는 자리였습니다. 이를테면 종말론적인 모든 희망과 위로의 자리가 예루살렘이었습니다. 그러나 현실의 예루살렘은 권력과 부의 상징이자, 약함과 가난에 대해 배타적이고 폐쇄적인 곳이었습니다. 그런 예루살렘을 향한 루카 복음의 여정은 다른 복음과 달리 10개의 장에 걸쳐 아주 길게 서술됩니다.(루카 9,51-19,28) 하느님이 계신다는, 그러나 특권층과 몇몇 계급에게만 허락된 배타적 장소 예루살렘을 향하는 루카 복음의 여정은 놀랍게도 세상에서 버려진 이들을 하나하나 언급하고 챙겨가는 연대의 여정으로 거듭납니다. 특별히 착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루카 10,29-37)는 예루살렘으로 향하는 예수님의 발걸음의 가치를 확연히 드러내는 이야기입니다. 율법은 더이상 유다 민족만의 것이 아닌 모든 이를 향한 하느님의 끊임없는 사랑의 구체적 형태로 드러나야 한다는 사실이 착한 사마리아인의 비유 속에 담겨있습니다. 사랑을 실천할 대상은 ‘사랑받을 만한 사람’이 아니라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결국 문제는 나에게 있습니다. 내가 사랑 안에 속한 사람이라면 상대가 누구든 사랑의 눈으로, 사랑하는 마음으로 처신할 것입니다.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라고 근엄하게 말할 줄 아는 신앙인이, 사랑하는 일에 지쳐 자신의 사랑을 잃어버리면 속된 말로 ‘폭망’하고 맙니다. 사랑의 일은 그야말로 ‘일’이 되어버려 지쳐가게 됩니다. 루카 복음이 말하는 사랑의 정점은 15장에 연이어 나오는 ‘잃어버린 양과 은전과 아들’의 이야기입니다. 루카 복음의 관점은 잃어버린, 죄를 지은, 혹은 배타적인 형제에 대한 회개에 머물러 있지 않습니다. 잃어버렸건, 죄를 지었건, 배타적인 형제가 되었건 하느님의 자비와 사랑을 보다 강조하는 게 루카 복음입니다. 이유인즉, 구원이 완성되었고 더 이상 기다리며 갈고 닦아야 할 절제와 인내와 노력이 필요치 않다는 것이지요. 다만 필요한 건 서로에 대한 사랑과 자비의 마음, 그것뿐이라는 사실을 루카 복음은 예루살렘을 향한 여정 안에서 외치고 있습니다. “네 형제가 죄를 짓거든 꾸짖고, 회개하거든 용서하여라. 그가 너에게 하루에도 일곱 번 죄를 짓고 일곱 번 돌아와 ‘회개합니다.’ 하면, 용서해 주어야 한다.”(루카 17,4) 어렸을 때는 성당에 가난한 사람들,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이 꽤나 있었던 걸로 기억합니다. 요즘은 이른바 ‘사회복지’를 하려면 성당 밖을 찾아 나서야 합니다. 그만큼 성당은 ‘고만고만’ 먹고 사는 사람들, 혹은 그보다 형편이 좀 나은 여유로운 사람들의 자리가 된 것이겠지요. 세상 살이가 힘든 사람을 바라볼 때 대개의 신앙인은 감성적 차원에서 함께합니다. 예컨대, 동정심이나 측은지심이 자연스레 작동되어서 힘들고 어려운 사람들을 안타까워하고 도와주곤 하지만 이내 그 감성은 식고 무뎌져 가곤 합니다. 서로 다른 삶의 처지에 속한 이들이 함께 살아갈 것이라는 연대의 책임을 갖추기란 여간 어려운 게 아닙니다. 능력있고 힘이 있으며 부유한 이들이 남루하고 비천하며 모자란 듯 행동하는 사람을 이웃으로 여기며 함께 살아간다는 건, 유토피아적 상상에서나 가능한 일일지 모릅니다. 그럼에도 신앙인은 그 유토피아를 좇고 살아가는 사람이 아닐까요. 다른 이의 아픔이나 부족함을 내 아픔과 한계로 인식할 수 있는 것, 폼나고 풍족한 삶이 특정인에게만 부여된 배타적 특권이 아니라 살아가는 모든 이가 함께 누릴 하느님의 선물로 이해할 수 있는 것, 그것이 신앙인이 누리고 베푸는 구원의 기쁨입니다. ‘노블레스 오블리주(noblesse oblige)’라는 말, 부유하고 힘을 가진 사람일수록 그에 따르는 책임과 의무를 지닌다는 말은 구원을 얻어 누리는 힘을 가진 신앙인이라면 이 세상에서 구원의 기쁨을 누리지 못하는 이들에 대한 책임과 의무를 지닌다는 신앙의 당위를 설파하는 루카의 모습을 가장 잘 드러내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월간빛, 2021년 4월호, 박병규 요한보스코 신부(대구가톨릭대학교 신학대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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