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예수님의 재림과 휴거 | 카테고리 | 성경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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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김병민 | 작성일2014-08-26 | 조회수1,844 | 추천수1 | 신고 |
(십자성호를 그으며) 그리스도교 초기 공동체로부터 간절히 기대한 희망은 예수그리스도의 파루지아 였다. 통상 그리스어인 파루지아를 우리말로 재림이라고 번역한다. 예수님이 2,000년전에 나자렛에서 동정 마리아께 성령으로 탄생하시고 이 세상에 오신 것이 첫 번째라면,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예수가 다시 오시는 것을 재림이라고 한다. 그런데 이 용어를 보면, 지금 여기에 예수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지 않는 것으로 이해되어 자칫 오해의 소지가 있다. 그러나 마태복음 (28,20)에서는 주님은 “내가 세상 끝 날까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겠다”고 말씀 하셨다. 그러므로 교회는 예수님이 ‘성체’안에 신비로 현존하신다고 가르치고 있다. 또한 “두 사람이나 세 사람이라도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함께 있겠다(마태18,20)고 말씀 하셨다. 교회는 더 나아가 예수님이 형제들의 사랑 안에 계신다고 가르치고 있다. 따라서 파루지아를 단순히 지금 여기에 부재한다는 의미를 지닌 재림으로 번역될 수 없다. 그래서 교회의 공식 문헌은 파루지아를 ‘영광스럽게 오심’ 혹은 ‘영광스럽게 당신의 현존을 드러내심’이라고 표현한다. 오늘날 잡다한 그리스도교내의 이단분파들인 시한부 종말론자들의 휴거설로 인하여 그리스도의 재림(영광스럽게 오심)에 대한 희망이 불안과 공포로 바뀌고 있다. 그들은 자신들이 세상 마지막 날까지 살아 남아있을 사람이라고 생각하며, 바오로의 말처럼 공중에 들리어 올라가서 재림하시는 주님을 마중하게 될 것이라고 주장한다. 바오로가 파루지아를 통해 의도한 것은 세상 권력자가 고향 방문시 고향 사람들이 화려하게 환영하는 것 처럼, 만왕의 왕이신 예수님이 영광스럽게 오시면 살아 남은 사람들이 그 분을 마중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세상 권력자와 달리 초월적 세계에서 이 세상으로 당신의 모습을 드러낸다. 그래서 바오로는 그 환영 장소를 공중이라고 표현했을 뿐 인것이다. 그 공중이 대기권이나, 성층권, 또는 우주 공간의 어떤 지점이 아니다. 하느님이 하늘에 계시다는 의미로서 초월적 세계로부터 이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신다는 것을 공중이라고 에둘러 표현한 것이다. 주님의 재림은 그리스도인에게 희망이다. 자비하신 예수님의 심판은 정의로우시므로 그리스도인에게 희망이고, 세상 종말 역시 하느님의 창조의 완성이므로 희망인 것이다.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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