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 안 상징 읽기] 복음사가들을 표상하는 네 가지 동물
사람, 사자, 황소, 독수리 물질세계는 영적 세계의 모상 한때 신앙이 대자연 안의 모든 것에, 심지어는 인간의 사고방식에도 절대적인 영향을 끼치던 시기가 있었다. 신앙의 시대라 일컬어지던 그 시기, 곧 중세 시대에는 지식을 갖춘 학자들뿐만 아니라 순박한 농민들도 또한 나름의 감수성과 상상력을 바탕으로 창조된 세계와 그 안의 사물들, 초목들, 동물들을 보면서 거기에서 풍부한 상징적 의미를 읽어낼 줄을 알았다. 가령, 생 빅토르 학파(파리 근교의 생 빅토르 수도원을 중심으로 철학과 신학의 통합을 지향하며 신비신학을 구축함으로써 12세기의 신학 부흥에 중요한 역할을 한 신학의 한 학통)의 뛰어난 신학자인 후고는 비둘기를 보면서 교회를 떠올렸다. 이를테면, 그리스도인이 두 가지 형태의 삶(활동적인 삶과 관상적인 삶)을 살아가는 것처럼, 비둘기에게는 두 날개가 있는데, 그 푸르스름하고 윤기 나는 날개는 하늘나라를 향한 그리스도인의 염원을 가리킨다는 것이다. 그리고 비둘기의 노란색 눈은 교회가 내세에 대한 가르침과 예지로 충만함을 나타내 보이고, 비둘기의 붉은색 발은 교회가 순교자들이 흘린 피로 물든 발을 내디딤으로써 세상과 함께함을 드러내 보인다는 것이다. 그런가 하면, 학식이 깊지 않은 농민들은 겨울이면 낮의 길이가 짧아지고 어둠이 빛을 이기는 것처럼 보이는 현상을 묵상하면서, 그리스도께서 오실 것임을 예고하는 듯 오랜 나날들에 걸쳐 조금씩 밝아 오는 여명을 생각했다. 그러고는 하느님께서 섭리하시는 드라마에는 빛과 어둠이 함께 부딪치고 만나는 접점이 있다고 이해했다. 그 접점은 빛이 다시금 나타나서 점점 강성해지고 낮이 길어지기 시작하는 때인 동지였다. 그리고 그 시점에 하느님의 아드님께서 인간으로 태어나셨다고 생각하기에 이르렀다. 확실히 이러한 성찰과 깨달음은 저 우매하던 암흑기의 사람들이 지녔던 한낱 원시적이고 미신적인 사고가 아니었다. 그리고 이렇듯 거리낄 것 없이 명쾌한 이해와 해석은 이미 교회 초기부터 시작되었다. 교부들은 저술을 통해서 일관되게 물질세계는 영적 세계를 미루어 알게 해주는 모상이라고 이해했다. 성경에서 기술되는 자연의 모습조차도 이러한 관점에서 해석했다. 이를테면 엘리야 예언자가 아합 왕에게 쫓겨서 숨어 들어간 광야의 싸리나무(1열왕 19,4-5 참조)와 레바논의 높은 산들과 거기에 높이 우뚝 솟아 있는 향백나무(이사 2,13-14 참조)는 하느님의 심오하고 자애로운 의중과 섭리를 뜻한다고 보았다. 그리고 장미는 순교자들의 피를 뜻하고, 쐐기풀은 선을 질식시키는 악을 나타낸다고 풀이했다. 네 가지 동물의 상징성 이런 맥락에서 동물들 또한 상징성을 지닌다고 이해하고 해석했다. 그중에서 특히 네 가지 동물이 4명의 복음사가를 나타내는 상징으로서 알려져 왔다. 에제키엘 예언자는 크바르 강가에서 네 가지 생물의 형상을 환시로 보았다(에제 1,5-10 참조). 사람, 사자, 황소, 독수리였다. 그리고 성 요한 사도 또한 하느님의 어좌를 에워싼 네 생물을 환시로 보았다(묵시 14,3 참조). 이를 바탕으로 교회는 일찍부터 사람, 사자, 황소, 독수리를 4 복음사가를 상징하는 동물로 이해했다. 이 네 가지 동물과 4복음서 사이에는 그럴 만한 연관성이 있다고 본 것이다. 단, 비둘기의 두 날개가 인간 삶의 현세적 차원과 영적 차원이라는 이중의 의미를 나타낸다고 보았듯이, 네 가지 동물이되 그저 예사로운 동물이 아니라 차원도 다르게 날개가 달린 동물을 복음사가들의 상징으로 받아들이게 되었다. 날개 달린 사람은 마태오 복음사가를 상징한다. 이는 마태오 복음서가 인간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를 소개하는 것으로 시작된다는 점과 관련된다. 날개 달린 사자는 마르코 복음사가를 상징한다. 이는 마르코 복음서가 그 첫머리에서 광야에서 외치는 소리에 대해 말한다는 점과 관련된다. 날개 달린 황소는 루카 복음사가를 상징한다. 황소는 구약시대에 희생제물로 봉헌되던 대표적인 동물이고, 루카 복음서는 요한 세례자의 아버지 즈카르야가 제관으로 뽑혀 제사를 봉헌한 이야기로 시작된다는 점과 관련된다. 독수리는 요한 복음사가를 상징한다. 독수리는 오래전부터 태양을 똑바로 응시할 수 있는 유일한 동물로 여겨져 왔는데, 요한은 자신이 쓴 복음서에서 마치 태양을 향해 날아오르는 한 마리 독수리인 듯이 하느님께서 인간으로 강생하신 신비라는 주제를 자연스럽게 넘나들며 그 신비를 심오하게 관조한 것으로 평가받는다는 점과 관련된다. 네 가지 동물의 또 다른 상징성들 12세기에 이르러 중세 교회 학자들은 네 가지 동물의 상징성의 폭을 넓혀서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에서 일어난 중요한 사건들을 상기시키는 데에도 적용했다. 사람은 하느님이 강생하셔서 인간이 되신 사실을 되새기게 해준다. 황소는 새로운 계약을 위한 희생제물로 봉헌되신 예수 그리스도와 그분의 수난을 되새기게 해준다. 사자는 잠을 자는 동안에도 눈을 뜨고 지켜보는 동물로 여겨졌고 그래서 경계와 불침번의 상징으로 받아들여졌기에, 비록 예수 그리스도의 육신은 한때 숨을 거두었지만, 그분의 거룩한 본성은 결코 죽는 일 없이 줄곧 지켜보셨고 마침내 되살아나셨다는 사실을 되새기게 해준다. 그리고 독수리는 알 수 없을 정도로 높은 데까지 날아오른다고 생각했기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저 높은 하늘나라로 오르신 것을 되새기게 해준다. 한편 네 가지 동물은 인간이 실행해야 할 덕목들을 나타낸다고도 이해되었다. 인간, 곧 이 세상에서 살면서 하느님 나라를 향해 험난한 여정을 가야 하는 순례자는 사람이 되어야만 한다. 왜냐하면 하느님께서는 사람에게만 ‘이성’이라는 선물을 주셨고, 그러기에 사람은 하늘나라에 도달하기 위해서 그 이성을 사용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순례자는 희생제물인 황소가 되어야만 한다. 왜냐하면 순례자에게는 회개하고 육체적으로 절제하는 희생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또한 이 순례자는 사자가 되어야만 한다. 왜냐하면 순례자는 사자처럼 용기와 고결한 마음을 바탕으로 행동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런가 하면 이 순례자는 독수리가 되어야만 한다. 왜냐하면 독수리가 태양을 똑바로 응시하는 것처럼, 순례자는 하느님께 기도하고 하느님과 영원의 것들에 대해 묵상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교회 안에서 상징들이 지녔던 풍부한 의미들은 많이 잊히고 말았다. 네 가지 동물의 상징성들 중에서도 이제는 복음사가와 관련된 것만 남았다. 중세 시대에는 궁극적 진리는 성경에 나와 있다는 신념을 바탕으로 어떤 권위에 의존해서 모든 것을 해석하는 것이 학문이었다. 그러나 새로운 시대에는 그것을 거부하고 실험의 결과나 경험을 통해 직접 확인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개신교의 혁명이 불어 닥쳤다. 그 와중에 교회의 상징들과 거기에 내포된 신비로운 의미들은 상당 부분 제거되었다. 저 옛날 필리스티아 사람들이 삼손을 사로잡았을 때 가장 먼저 그를 보지 못하게 만든 것처럼, 누군가는 믿는 이들의 눈을 가려 창조된 세계가 품은 심오한 의미들을 보지 못하게 하려고 애썼는지도 모른다. 그렇다 하더라도 상징성을 읽어내고 거기에 담긴 신비로운 의미들을 묵상하는 것은 여전히 가치 있는 일로, 창조된 세계에서 하느님을 발견하고 알아볼 수 있도록 눈을 열어 줄 것이다. [월간 레지오 마리애, 2021년 8월호, 이석규 베드로(자유기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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