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약 성경 다시 읽기] 역사, 그리고 신앙 - 베드로 2서 예수님의 재림이 너무 더딘 탓일까. 그분에 대한 갈망과 기대가 제 삶의 실재와 괴리를 겪을 때마다 우리는 자주 지치고 헤매게 된다. “그분의 재림에 관한 약속은 어떻게 되었소?”(3,4) 베드로 2서에 등장하는 이 질문을 다시 고쳐 보면 이렇다. ‘지금의 네 삶은 어떤가? 그게 재림을 기다리는 자세인가? 그게 주님이 가르쳐 준 그 모습인가?’ 대개의 신앙인은 하루하루를 열심히 살려고, 보다 훌륭히 살려고 발버등친다. 남을 돕지는 못하더라도 폐를 끼치지 않으려 애쓰며 산다. 교회의 역사 속 많은 이들이 증거하며 살았던 신앙이란 게 결국은 세상살이 안에 하느님이 함께 계심을 기억하는 일이다. 주님이 계시기에 도대체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에 대한 질문은 여전히 유효하다. 하느님을 만나고 그분을 알아가며 그분의 가르침을 살아내는 건, 새로운 것을 익혀가는 일과는 다르다. 신앙을 살아가는 건, 너무나 익숙한, 너무나 진부한 우리 삶에 대한 복기와 반성이어야 한다. 베드로 2서는 신앙의 기억을 되짚어 내길 간곡히 요청한다. “그러므로 여러분이 이러한 것들을 알고 또 이미 받은 진리 안에 굳건히 서 있기는 하지만, 나는 언제나 여러분에게 그것들을 기억시키려고 합니다.”(1,12) 베드로 2서의 저자는 지키고 기억해야 할 신앙이 호기심을 자극하는 신화적 이야기나 좀 더 새로운 지혜와 사상을 다듬어 가는 사변적 논리가 아니라고 강변한다.(1,16) 신앙은 역사다. 실재 인간의 역사 안에 태어나신 예수님은 인간으로 사셨고, 인간으로 죽으셨다. 베드로 2서의 저자는 이런 예수님의 역사성을 그분의 거룩한 변모 사건을 통해 다시 각인시킨다.(1,16-18) 마태오 복음 17장 1절에서 9절에도 서술된 예수님의 거룩한 변모 이야기는 사도들과 목격 증인들을 통해 교회 공동체 안에 전해졌다. 마태오 복음에선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라는 하늘의 소리를 언급한다. 그러나 베드로 2서에서는 예수님의 말씀이 예언자의 말씀으로 확장되어 표현된다.(1,19) 예수님의 삶과 그분의 가르침은 사도들은 물론이거니와 구약의 여러 예언자들의 가르침과 맥을 같이 한다는 게 베드로 2서의 생각이다. 하느님은 역사 속에서 이스라엘 백성을 통하여 그리스도인들 안에서 여전히 말씀하시고 가르치신다는 것이다. 물론 올바른 가르침과 그렇지 못한 거짓 가르침의 식별은 신앙인이 갖추어야 할 기본 자세이기도 하다. 베드로 2서는 교회 공동체 안에 버젓이 횡행하는 거짓 교사들의 가르침에 대한 경고를 잊지 않는다. 거짓 교사들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라 신앙 공동체가 있는 어느 곳에나 존재한다. “이스라엘 백성 가운데에 거짓 예언자들이 일어났던 것처럼, 여러분 가운데에도 거짓 교사들이 나타날 것입니다. 그들은 파멸을 가져오는 이단을 끌어들이고, 심지어 자기들을 속량해 주신 주님을 부인하면서 파멸을 재촉하는 자들입니다.”(2,1) 주님을 부정한다니…. 거짓 교사들 역시 주님의 이름으로 가르치고 선교했을 터인데, 주님을 부정하는 게 도대체 가능한 일이었을까. 베드로 2서는 주님을 부정하는 거짓 교사의 행태를 탐욕의 문제와 연결한다. 말하자면 주님의 이름으로 가르치고 그 가르침이 비록 정통 신앙에 적합한 것이라 할지라도 자신의 탐욕을 위해서 신앙을 이용하는 자들이 거짓 교사들이다. “그들은 대낮의 술잔치를 기쁨으로 삼습니다. 여러분과 함께 잔치를 벌이면서도 자기들의 속임수를 즐기는 너절하고 지저분한 자들입니다.”(2,13) 구약의 미카 예언자 역시 같은 맥락에서 거짓 예언자들을 비판한 바 있다. “그들은 먹을 것이 있으면 평화를 외치지만 저희 입에 아무것도 넣어 주지 않는 이들에게는 전쟁을 선포한다.”(미카 3,5) 신앙을 위협하고 폄훼하는 위험은 잘못된 가르침이 아니라 신앙의 본디 가치를 제 이익과 제 안온함을 위해 사유화하는 데 있다. 그럴듯한 말로써 사람들을 현혹하는 거짓 교사의 속임수는 가르치는 바에 대한 형제애적 성찰의 부재 때문이다. 오늘날 신앙의 실재적 모습이 개인적 수련이나 사적 마음의 다스림 수준으로 전락한 것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세상이야 어떻든, 나는 성당에 다니며 올바르게 살면 된다는 식의 사고는 사실 그리스도의 신비체인 교회의 모습은 아니다. 부족하고 모나고 심지어 죄를 지은 자에게도 형제애와 친교를 이야기할 수 있는 공동체가 교회다.(마태 25장 참조) 주님은 우리를 참고 기다리신다. “어떤 이들은 미루신다고 생각하지만 주님께서는 약속을 미루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여러분을 위하여 참고 기다리시는 것입니다. 아무도 멸망하지 않고 모두 회개하기를 바라시기 때문입니다.”(3,9) 모두의 회개를 위해 주님 마저 참고 기다리시는데 우리는 제 이익과 욕망과 바람 때문에 서로를 참아내지 못하고 개인주의적 신앙에 만족하고 만다. 제 신앙의 안온함이 조금이라도 상처입을 때 하느님을 원망하고 이웃과 세상을 탓하는 모습은 그리 어렵지 않게 발견된다. 그리고 또다시 제 마음을 다스리려 신앙이란 걸 붙들고 십자가와 묵주를 벗삼아 무릉도원의 도인인양 스스로를 다독인다. 거짓 교사의 행태가 바로 이와 같다. 제 이익을 위해, 제 삶의 평안함을 위해 신앙을 하나의 도구로 전락시키고 만다. 도구화된 신앙은 현실과 역사를 외면한다. 그 현실이 어렵고 그 역사가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며 유토피아적 도피를 위해 신앙은 신화화되어 버린다. 2세기 로마의 클레멘스는 이렇게 말했다. “선과 숭고함을 숭상하는 이방인들이 우리들의 행업이 우리들의 말에 상응하는 것이 아님을 알면 우리들의 입을 통해 하느님의 말씀을 들을 때, 그들은 그것을 전설이나 오류라고 비난한다.”(2클레멘스 13) 사도들로부터 전해들은 신앙은 실제 제 삶으로 옮아갈 때 그 진정한 가치를 발하게 된다. 신앙은 개인적 이익을 위한 도구가 아니라 공동체적 친교를 위한 역사적 실천이어야 한다. 살아 움직이는 모든 피조물이 서로를 위해, 서로를 향해 살아가도록 질서지워졌다는 사실을 깨닫고 실천하는 데서 신앙은 시작되고 완성된다. 새로운 시대에 새로운 사목과 신앙의 실천을 매번 고민하는 게 교회이기도 하다. 그 고민은 공동체적 관점을 견지하는 고민이어야 한다. 아무리 제 눈에 옳게 보이거나 합리적으로 보이더라도, 다른 이의 눈엔 다르게 보인다. 서로가 달라 부딪히고 갈등을 겪어도, 그 다름이 신앙의 고유한 특징이자 특권이다. 신앙은 다름을 조화로 바꾸어내는 예술에 가깝다. 하늘과 땅의 다름이 조화를 이루고 땅의 모든 것들이 함께 공존할 수 있음을 보여주는게 신앙이기 때문이다. 탐욕은 제 안에 갇혀 서로의 다름과 서로의 고유함을 도무지 받아들이지 못하는 완고함에 기초한다. 성경을 읽고 해석하는 것에도 탐욕은 자주 목도된다. “무엇보다 먼저 이것을 알아야 합니다. 성경의 어떠한 예언도 임의로 해석해서는 안 됩니다.”(1,20) 이 말씀을 직역하자면 이렇다. “성경의 모든 예언은 그 자체의 해석으로부터 오지 않는다.” 해석은 해석일 뿐이다. 그 해석의 원천은 하느님이시고 그 하느님은 지금도 우리의 역사 안에서 당신의 방식으로, 당신의 모습으로 우리와 함께 살아계신다. 우리는 단지 역사 속 하느님을 이웃과 세상 안에서 발견하고 소개할 뿐이다. 이 세상이 너희의 하느님이 어디 있냐고 물을때 우리는 이렇게 말하리라. “나의 삶 안에 하느님은 모든 이의 구원을 위해 여전히 살아계신다.”라고. [월간빛, 2021년 8월호, 박병규 요한보스코 신부(대구가톨릭대학교 신학대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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