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약성경 순례 - 구원 역사의 발자취를 따라] 미디안 땅으로 달아난 모세(탈출 2,11-22) 스물다섯 번째 순례는 파라오의 궁에서 출발하여 미디안 땅에까지 이르는, 대략 500킬로미터가 넘는 긴 여정이 될 것이기에 여장을 단단히 꾸리시길 바랍니다. 우리가 동행하게 될 인물은 파라오의 딸에게 입양되어 이집트의 왕궁에서 성장한 모세입니다. 우리는 그가 미디안까지 가는 여정에 함께하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궁정에서 살아야 할 인물이 왜 미디안까지 가게 되었을까요? 파라오의 중요한 임무를 띠고 그곳까지 가는 것일까요? 그랬다면 아마도 그는 수행원들을 데리고 길을 떠났을 것입니다. 그런데 보아하니 모세는 홀로, 그것도 제대로 여장을 꾸리지도 못한 채 서둘러 길을 떠나는 듯합니다. 그럴 만한 사정이 있음이 분명합니다. 여러분에게만 살짝 그 사정을 말씀드릴까 합니다. 혹시라도 도중에 호기심을 참지 못하고 그에게 말을 걸어 그렇지 않아도 불편한 그의 심기를 건드리는 일이 없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어느덧 성인이 된 모세는 자기 동포들이 강제 노동하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이집트인 사람 하나가 자기 동포에게 모질게 구는 것을 본 모세는 그 사람을 때려죽이고 모래 속에 묻었습니다. 다음날 다시 그곳에 갔을 때 모세는 히브리인 두 사람이 서로 싸우는 것을 보고 말리려고 하다가 자신의 살인 행위가 탄로 났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파라오 역시 이 사실을 전해 듣고 모세를 죽이려 하였습니다. 그래서 모세는 지금 급히 미디안 땅으로 달아나는 중입니다. 사도행전 7,23에 의하면 이때 모세의 나이는 40세였습니다. 모세는 120세에 세상을 떠났으므로 자기 인생의 1/3을 파라오의 궁정에서 보낸 셈이 됩니다. 그런데 탈출기 2장이 전해주는 이 사건이 모세에게 의미하는 바는 무엇일까요? 모세는 파라오의 궁정에서 자라났지만, 그는 자신이 히브리인임을 알았습니다. 그리고 자기 민족이 처한 불행을 인식하고 있었습니다. 모세는 이런 상황에 어떻게 대처하였습니까? 그는 폭력을 폭력으로 맞서고자 하였습니다. 그러나 결국 그는 폭력을 폭력으로 맞서는 것의 한계에 직면하였습니다. 폭력을 폭력으로 막아내고자 하면 결코 폭력의 사슬을 끊을 수 없다는 것을 모세는 알게 된 것입니다. 그가 미디안에서 보내게 될 또 다른 40년은 불의한 폭력의 고리를 끊어낼 수 있는 새로운 길을 배우는 시간이 될 것입니다. 자, 이제 우리도 모세를 따라 길을 나섭시다. 그런데 성경의 저자는 이집트에서 시나이반도를 가로질러 미디안까지 가는 긴 여정에 대해서는 일언반구도 하지 않습니다. 곧바로 모세가 미디안의 어떤 우물가에 다다르게 되었다고 말합니다. 사실 이 여정은 위험천만한 여정입니다. 파라오가 자객을 뒤따라 보내어 쥐도 새도 모르게 모세를 죽일 수도 있습니다. 그렇지 않다고 하더라도 시나이 광야를 가로질러 가야 하는 이 여정은 목마름과 굶주림을 동반한 험난한 여정입니다. 그런데 모세가 무사히 미디안의 한 우물가에 도착하였다는 것은 그의 모든 여정에 하느님께서 함께하시어 그를 온갖 위험에서 손수 지켜주셨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모세도 이것을 분명히 알았을 것입니다. 모세가 미디안의 한 우물가에 앉아 있을 때 미디안의 사제인 르우엘의 일곱 딸들이 물을 길으러 왔습니다. 아버지의 양 떼에게 물을 먹이려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목자들이 나타나 그들을 내쫓자 모세가 나서서 이 딸들이 양 떼에게 물을 먹이도록 도와주었습니다. 이런 인연으로 모세는 르우엘의 집에 머물게 되었고, 그의 딸 치포라와 결혼하여 아들 게르솜을 얻었습니다. 이는 곧 모세가 미디안 땅에 정착하였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집트에서 노예살이하는 그의 동포들의 고된 삶은 이제 모세의 기억에서 지워진 듯합니다. [2021년 9월 12일 연중 제24주일 가톨릭마산 8면, 김영선 루시아 수녀(광주가톨릭대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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