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 이야기] 성경에서 보는 질병과 치유 작년초부터 시작한 코로나19로 인해 순식간에 우리의 생활 모든 것이 너무나 많이 바뀌었습니다. 작년 한국교회 역사상 처음으로 미사 중단이라는 낯선 체험을 했습니다. 일상생활이 부자유스러워지며 매일의 일상이 가장 큰 축복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매일같이 미사를 지내고 신자들과 함께한 일상들이 축복이고 행복이었던 것입니다. 텅빈 성당을 보면 그동안 우리 교회가 세상 속에서 빛과 소금의 역할을 제대로 했는지 반성해봅니다. 모든 것은 시작이 있으면 끝이 있습니다. 이 어려움이 다 지나갈 것입니다. 하느님께 기도하며 그동안의 우리의 잘못을 참회합니다. 알베르 카뮈의 <페스트>의 초반부가 떠오릅니다. “사람들은 재앙이 비현실적인 것이고 지나가는 악몽에 불과하다고 여긴다. 그러나 재앙이 항상 지나가버리는 것은 아니다. 악몽에 악몽을 거듭하는 가운데 지나가버리는 쪽은 사람들, 그것도 휴머니스트들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대비책을 세우지 않았기 때문이다. 우리 시민들이 딴 사람들보다 잘못이 더 많아서가 아니었다. 그들은 겸손할 줄을 몰랐다는 것뿐이다.” 코로나19는 빠른 전염력과 교묘하게 자신을 숨기는 은폐능력이 탁월하다고 합니다. 역설적이게도 이런 숨기고 숨는 능력이 우리 사회의 민낯을 드러나게 합니다. 구약성경에서는 질병을 ‘하느님의 심판과 진노’ ‘재앙’ 등으로 언급하고 있습니다. 구약 시대 사람들은 하느님이 사람에 대한 심판과 훈련의 수단으로 질병을 보내기도 하신다고 믿었습니다(욥 5,17-18). “주님께서는 너희에게서 온갖 병을 없애 주실 것이다. 또 너희가 이집트에서 본 온갖 나쁜 질병을 너희에게는 퍼뜨리지 않으실 것이다. 그러나 너희를 미워하는 모든 자에게는 그 질병들을 내리실 것이다”(신명 7,15). 유다인들은 질병을 ‘하느님의 저주’로 생각했던 것입니다. 에덴에서의 인간 타락 후 인간과 만물에 내려진 하느님 저주의 결과로 본 것입니다. 인간 타락의 결과로 생겨난 ‘질병’은 ‘죽음’과 함께 저주의 상징으로 받아들여졌습니다. 나병과 같은 전염성이 있는 질병은 대단히 전염성과 유전성이 큰 재앙으로 간주되었습니다(레위기 13장 참조). 성서에서는 한센병뿐만 아니라 온갖 종류의 피부병을 나병이라 했습니다. 나병은 전염성이 강해서 나병에 걸린 환자들은 예루살렘과 기타 성곽도시에는 들어가지 못하고 다른 곳에 격리되어 살았습니다(레위 13장 참조). 나병은 최악의 질병으로 여겨졌고, 따라서 죽음과 같은 하느님의 저주의 징표와 같은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나병환자는 공동체 내에 머물 수가 없던 것입니다. 심지어 사람들과 마주쳐서도 안되고 만나는 것도 금지되었습니다. 나병환자를 보기만 해도 다른 사람에게 그 병을 오염시킬 것이라 믿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나병환자는 인적이 많은 도로 근방에도 올 수 없었습니다. 인기척이 들리면 나병환자는 자신이 부정 탄 사람임을 소리쳐 알려야 했다. 결국 나병환자들은 이미 죽음 속에서 살았던 사람들입니다. 고대 유다인들은 문둥병자는 진지 밖으로 쫓아내었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진지 밖에 산다는 것은 하느님이 인간에게 주신 권리와 능력을 상실하는 것을 의미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나병환자를 고쳐주셨을 때(루카 12,12-16 참조) 사제에게 가서 깨끗해진 것을 보이라고 명령하신 것입니다. 나병의 치유 여부는 사제들이 확인하게 되어있기 때문입니다(레위 14장 참조). 따라서 예수님이 나병환자를 고치신 후에 모세의 법대로 제사장에게 회복된 몸을 보이게 하여 종교적, 사회적 권리를 되찾을 수 있게 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유다인들은 나병은 죽음처럼 회복할 수 없는 병이기 때문에 하느님만이 이 병을 고치실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성서의 ‘나병’은 전문의적 지식보다는 사람들의 경험에 의해 검진되었습니다. 그리고 당시에는 질병의 원인을 병리적 것보다는 종교적 원인으로 해석되었습니다. 나병환자가 다행히 몸이 다시 낫게 되면 그는 사제에게 나아가 일주일 동안 관찰을 받고 치료가 되었다고 판명이 되면 정한 제물을 드려 다시 공동체 안으로 들어올 수 있게 되었습니다. 유다인들은 질병에 걸리게 되면 반드시 하느님께 간구해야 했습니다. 왜냐하면 하느님은 질병을 치유하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너희가 주 너희 하느님의 말을 잘 듣고, 주님의 눈에 드는 옳은 일을 하며, 그 계명에 귀를 기울이고 그 모든 규정을 지키면, 이집트인들에게 내린 어떤 질병도 너희에게는 내리지 않을 것이다. 나는 너희를 낫게 하는 주님이다”(탈출 15,26). 그래서 질병의 치유는 하느님 왕국의 도래를 나타내는 수단 중의 하나로 생각됐습니다. “너의 조상 다윗의 하느님인 주님이 이렇게 말한다. 나는 네 기도를 들었고 네 눈물을 보았다. 이제 내가 너를 치유해 주겠다. 사흘 안에 너는 주님의 집에 올라가게 될 것이다”(2열왕 20,5). 신약시대의 예수님의 치유는 단순히 외적이고 육체적인 차원만을 돌보는 것이 아니라 그 이상의 것임을 보여 줍니다. 고통의 뿌리가 된 모든 상처를 근원적으로 치유하심으로써 예수님께서는 그 외적인 병고와 장애까지도 낫게 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환자를 치유하시는 것은 아픈 사람들과 고통 받는 사람들에 대한 자비롭고 온유한 마음 때문입니다.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 그러면 너희가 안식을 얻을 것이다. 정녕 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다”(마태 11,28-30). 예수님의 치유는 인간에 대한 전인적 차원의 치유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병자를 고쳐주심으로써 인간이 본래 지니고 있는 온전함과 건강을 회복시켜 하느님의 구원이 현실로 이루어지고 있음을 보여주십니다(마르 2,1-12 참조). 예수님은 항상 치유를 받은 이에게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고 하셨습니다(마태 9,22). 사실 믿음이 없이는 치유도 구원도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 신앙인에게 중요한 것은 예수님께 우리의 모든 것을 내맡기는 믿음입니다. 병든 몸으로 힘든 가운데에서도, 그분께 나아가 전적으로 의탁하고 믿기만 하면 은혜를 받을 수 있습니다. 우리는 질병을 가진 환자를 치료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통해서 하느님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평화가 넘치는 샘물(전국가톨릭경제인협의회 발행), 2021년 가을호(Vol. 31), 허영엽 마티아 신부(천주교 서울대교구 홍보위원회 부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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