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약 성경 다시 읽기] 낯선 것에 대한 사랑 - 요한 3서 낯선 일에 맞닥뜨릴 때 대개 우리는 어떤 반응을 보일지 머뭇거리게 된다. 진중한 듯 보이나 실은 내게 득이 되는지 해가 되는지 따져보는 경우가 많다. 제 신념에 따른 판단은 일찌감치 내려놓은 상태다. 그 일이 옳은 것인지 아니면 악한 것인지 본능적으로 우린 안다. 그만큼 세상을 살았으므로. 그만큼 사람됨이 무엇인지 알고 익혔으므로. 머뭇거리는 건 오로지 지금 삶에 대한 미련 때문이다. 잃을 게 없는지, 책임질 일은 없는지, 그래서 지금 삶이 불편해지지는 않는지…. 산다는 건, 점점 더 낯선 것에서 익숙한 것에로의 감금이 아닐까 싶다. 요한 3서는 교회의 한 원로가 어느 교회에 써보낸 글로 인해 벌어진 갈등을 서술한다. 원로가 무엇을 썼고, 무엇을 요구했는지 알 길이 없다. 다만 원로의 글이 디오트레페스에겐 꽤나 불편했던 모양이다. ‘제우스의 아이’라는 뜻을 지닌 디오트레페스라는 이름은 당시 흔한 것이었다. 이름은 흔하되 그는 독보적인 사람이길 원했다. 스스로 최고가 되길 바란 사람이 디오트레페스였다(9절에 “우두머리 노릇하기”라고 번역된 그리스어 동사는 ‘필로프로테우오’로 ‘최고를 사랑하다.’라는 뜻이다). 그에겐 다른 권위와 다른 최고를 허락할 여유나 마음이 없었다. 오직 제 모습이 최고이길 바랐다. 타인들 속에서 최고가 되는 건, 비교우위의 제 능력이나 노력 여하에 따른 문제가 아니다. 객관적으로 능력의 우열을 가리는 것이 도대체가 가능한지를 따져보는 것을 차치하더라도 한 사회의 최고는 제 능력만으로, 제 노력만으로 가능한 게 아니다. 경험칙으로 한 사회에서 최고가 되고자 하는 이들은 능력이 아니라 ‘기회’의 여부에 따르는 경우가 많다. 하여 한 사회의 최고는 모든 이의 능력과 노력에 대한 얼마간의 책임과 빚을 지고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디오트레페스의 행실은 ‘나쁜 말’로 대변된다.(10절) 나쁜 말은 형제들을 헐뜯고(‘헐뜯는다’는 그리스어 동사 ‘필루아레오’는 ‘의미없는 말을 하다, 이해없이 말하다’라는 뜻을 지닌다) 형제들에 대한 환대를 거부하는 행동이라고 구체적으로 묘사된다. 요한 1서에서는 ‘나쁜 말’을 공동체와의 일치에서 나오는 말이 아닌 제 신념과 사상에서 나온 말로 규정한다.(2요한 10-11 참조) 생각이 다르고 관점이 달라서 배타적 자세를 보이는 디오트레페스는 제 스스로 최고이길 원하나 진정한 최고의 책임과 빚에 대해선 외면한다. 요한 3서에 나타나는 ‘원로’는 교회의 지도자로 진리와 사랑 안에서 존경의 대상이었다. 권력이 있어서, 능력이 있어서 원로를 존경하고 사랑하는 게 아니라 진리를 증언하는 데 있어 사랑의 징표와 협력의 기준으로 원로는 이해되었다. 이러한 원로의 직무와 그 가치는 선의의 행동이나 호의의 실천이 아니라 그리스도인에겐 하나의 당위로 작동한다. 8절을 그리스어 본문 그대로 다시 옮겨보자. “그러므로 우리는 그러한 이들을 돌보아 주어야 할 빚을 지고 있습니다. 우리가 진리에 협력할 수 있기 위해서 말입니다.” 우리말 번역은 사랑에 대해 증언하는 형제들과 낯선 이들에 대한 보살핌을 ‘타율적 규정’으로 이해한 탓인지, 명령의 문구로 서술한다.(곧 “우리가 그러한 이들을 돌보아 주어야 합니다.”라고 번역한다) 그러나 사랑에 대한 증언은 ‘규정’이 아닌 ‘빚을 갚는 일’이라고 요한 3서는 증언한다. ‘규정’은 사람을 소극적으로 만든다. 규정을 지킬 경우 그만하면 되었다고 선을 긋고 제 삶을 지키는데 열심하여 낯선 것에로의 관심은 내려놓게 된다. 그러나 ‘빚진 이’는 다르다. 세상 삶에 대해 늘 고민한다. 어떻게 기워갚을지 제 삶의 ‘주어진 것들’에 감사와 미안함을 동시에 지닌 이들이 ‘빚진 자’들이다. 그리스도인에게 빚은 태초부터 우리 생명의 근본이었고 앞으로 살아갈 우리 삶의 이유이자 목적이신 예수님에 대한 빚이다. 그 빚은 기워갚을 수 없는 것으로 늘 되새기고 챙겨야 할 빚이고, 인간으로 오신 예수님에 대한 빚이란 이유로 모든 인간을 향한 빚이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영원히 갚지 못할 빚을 진 것으로 서로 사랑해야 할 삶을 운명처럼 지닌 것이다. ‘그리스도인은 낯선 이에게 친절해야 하는가?’라는 질문은 내가 빚진 이로 사는가에 대한 질문으로 고쳐 볼만하다. 경쟁과 그로 인한 낯섦이 두려움으로 인식되는 오늘, 낯선 이에 대한 친절은 필요한 덕목인가 아니면 오지랖에 가까운가, 늘 되묻는다. 이런 질문은 잘못되었다. 제 존재의 본질에 대한 질문이 빠져있기 때문이다. 빚진 자로서의 그리스도인에게 낯선 이에 대한 친절은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 당위의 문제다. 이미 받은 것에 대해 되갚는 것은 제 선의의 의지가 아니라 제 존재에 대한 충실성과 직결된 것이니까. 낯선 것을 낯선 것으로 내버려 두는 것은 우리 존재의 가치에 비추어 보면 인간으로 오신 예수에 대한 거부이자 자기 상실과 같은 것이 아닐까. 얼마 전 전직 대통령이었으되, 대통령의 예우를 박탈당한 전두환 씨가 죽었다. 그의 죽음은 그의 잔인한 폭정을 언급하기에 앞서, 우리 사회의 이념의 갈등과 상처, 그로 인해 여전히 아파하는 이들을 다시 기억하는 기회이기도 했다. 그 기억은 여전히 낯설고 아파서 마음의 매무시를 가다듬고 겸허히 되짚어 볼 필요가 있다. 그때 낯설고 불편한 일들에 우리는 빚이 있으니까. 예전에 그랬으리라. 옆집에 누가 끌려가도, 건너 집의 누가 맞아 죽어도, 또 저 너머 동네에서 총칼에 찔려 죽어도 우리에겐 낯서니까, 그냥 우리 일이 아니니까 침묵했으리라. 적어도 그러한 침묵이 빚으로 느껴지는가 아니면 아직도 여전히 입다물고 제 일이나 생각하며 사는가, 이런 차이가 그리스도인인가 아닌가의 차이가 아닐까. [월간빛, 2022년 1월호, 박병규 요한보스코 신부(대구가톨릭대학교 신학대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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