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 그리스도의 조상들] 룻(룻 1~4장) 룻은 유다의 8대손 보아즈와 혼인하여 다윗의 증조모가 된 모압 여인입니다(마태 1,5). 이는 ‘암몬족과 모압족은 주님의 회중에 들 수 없다.’(신명 23,4)는 모세의 율법을 초월하는, 하느님의 자유로운 섭리와 보편적 구원 의지를 보여줍니다. 판관 시대에 유다 베들레헴 출신 엘리멜렉은 기근을 피해 아내와 두 아들을 데리고 모압 땅으로 이주했는데, 둘째 며느리였던 룻은 자식 없이 남편과 사별합니다. 시어머니 나오미는 남편과 두 아들을 모두 여의고 고향 베들레헴으로 돌아가는 길에, 과부가 된 두 모압인 며느리들이 고향에서 새 삶을 살도록 놓아주려 했지요. 서로가 나를 책임지라 다툴 법도 하지만, 세 과부는 서로의 처지를 안타까워하며 서럽게 웁니다. 그 가운데 첫째 며느리 오르파는 떠나갔지만, 둘째 룻은 시어머니에게 안겨 떨어지지 않았지요. “어머님 머무시는 곳에 저도 머물렵니다. 어머님의 하느님이 제 하느님이십니다. 오직 죽음만이 저와 어머님 사이를 갈라놓을 수 있습니다.”(룻 1,16-17) 예로부터 룻의 이 말은 가족애와 하느님 사랑에 무뎌진 이들의 가슴에 큰 울림을 주곤 했습니다. 가난과 편견에 부닥쳐도 시어머니와 함께 살며 하느님을 섬기겠다는 룻의 결심은, 모두가 예수님을 떠나갈 때 “주님, 저희가 누구에게 가겠습니까? 주님께는 영원한 생명의 말씀이 있습니다.” 고백하며 그분 곁에 머물렀던 베드로의 모습을 떠올리게 합니다(요한 6,68). 자기 고향에 찾아든 이방인을 받아들여 가족이 되어주었다가, 도리어 자신이 이방인의 삶을 살게 된 그 처지가 참 고약해 보입니다. 그러나 타향에서의 나그네살이라 해도 하느님과 함께라면 구원의 여정이 된다는 사실은, 이미 성조 아브라함(창세 12,10-20; 20,1-18)과 이사악(26,1-33)과 야곱(46-50장)이 보여준 바이지요. ‘이방인 과부’ 룻은 이스라엘의 최하층민으로서 아무런 보호나 기반 없이, 남의 추수밭에서 ‘하루 종일 쉬지 않고’(룻 2,7) 이삭을 주워 늙은 시어머니를 봉양합니다. 배가 고파 밀 이삭을 잘라 먹었던 예수님의 제자들처럼(마태 12,1-8), 룻은 가난하고 주린 일상 속에서도 하느님과 함께였지요. 고된 노동을 마친 저녁이면 집에 돌아와 나오미와 하루 동안 있었던 일에 대해 도란도란 이야기 꽃을 피우는 룻의 평범한 일상 속에서(룻 2,19-22; 3,16-18) 하느님의 구원이 싹을 틔웁니다. 마침내 룻은 하느님께서 섭리하신 대로 가문의 구원자 보아즈와 혼인하여, 훗날 다윗의 조부가 될 오벳(주님의 ‘종’이란 의미)을 낳습니다. 룻기의 히브리어 본문의 마지막 단어는 다름 아닌 (다윗)인데요, 이는 가난하고 보잘 것 없는 이의 초라한 일상이라 해도 하느님과 함께라면 바로 그 곳에서 구원이 탄생한다는 사실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룻기에서 하느님의 현존은 겉으로 드러나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시어머니의 하느님을 자신의 주님으로 받아들이며 그녀를 봉양했던 룻, 진심으로 며느리의 행복을 바랐고(1,8-9) 딸처럼 아꼈던 나오미(2,2.22; 3,1.16), 이방인에게 자비를 베풀며 하느님의 계명(레위 19,9-10; 신명 25,5-10)에 충실했던 보아즈, 그렇게 가족들 모두가 서로에게 보이는 신뢰와 선의를 통하여 하느님의 구원은 이루어집니다. 구원의 길을 애써 먼 데서 찾을 필요가 없습니다. 고된 삶 속에서 간직한 가족 간의 유대와 사랑, 상호이해와 관용이라는 소박한 덕목들로 구원의 이삭을 거두며, 우리 가족들 모두의 구원으로 향하는 삶을 새롭게 시작합시다. [2022년 1월 30일 연중 제4주일(해외 원조 주일) 대구주보 3면, 강수원 베드로 신부(대구가톨릭대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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