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활 속의 성경] 떠남 생각의 문을 여는 것은 늘 어렵다. 말하는 방법처럼 또 글 쓰는 습관처럼, 생각도 익숙한 길이 있어 이 길을 벗어나면 불안하다. 오래 알고 듣던 노래가 어느 순간 변하면 원래 멜로디와 서로 긴장 상태를 이루게 되고, 본능적으로 원래의 그것이 귀에 들리기를 바란다. 귀도 익숙한 길이 있는 모양이다. 우리 마음 씀씀이도 익숙한 길이 있을까? 누군가는 ‘자기 앎의 지평을 확장하는 것’이 ‘회개’라고 정의 내리던데, 익숙함을 너무 사랑하는 사람에게 회개란 불가능한 것일까? 익숙하지 않음에서 오는 두려움과 불안함에 늘 직면해야 하는 것이 ‘회개’일까? 분유 냄새나는 생각이 스멀스멀 올라온다. 지난 ‘깨어남’에 이어 다룰 주제는 ‘떠남’이다. 잠에서 깨어 하루를 시작한 가정의 아침 풍경은 ‘떠남’을 준비하는 분주함으로 가득하다. 고단하지만 가정을 벗어나 삶을 풍요롭게 하는 노동과 교육의 현장으로 떠나야 한다. 거울을 보며 옷매무새를 정돈한 후 현관문을 힘껏 열며 밖으로 나간다. 채 몇 분 지나지 않아 날이 선 맵시와 산뜻한 화장품 향기는 교통체증과 사람들의 파도로 흐트러질 것이고 회사에서는 꼰대 상사 때문에 ‘오늘 사표를 안 내면 손가락에 장을 지진다’는 생각이 천만번도 더 나게 될 것이다. 떠나서 오게 된 곳은 정글과도 같다. 구약성경 탈출기의 이스라엘 백성 역시 하느님께 사표 쓰고 싶어 한다. 이스라엘 백성은 하느님의 힘으로 이집트 종살이에서 떠나왔지만, 오게 된 곳은 광야였다. 광야에는 마실 것도 먹을 것도 없으며 모래바람으로 앞을 선명하게 내다볼 수도 없다. 이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은 불평한다. 익숙한 이집트의 고기 맛이 생각났기 때문이다. 익숙한 고기 맛이 하느님을 잊게 한다. 그렇다고 하느님께서 이스라엘을 굶긴 것도 아니다. 날마다 하루 한 사람이 충분히 먹을 수 있는 만나를 보내주셨다. 다만 만나를 다음 날을 위해서 보관하는 것은 금지하셨는데 만나를 모아 저장하는 행위가 다른 사람들이 만나를 먹지 못하게 하는 것이었고 매일 만나를 주시는 하느님께 신뢰를 두는 데에도 지장을 주는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떠나서 오게 된 광야에서 이스라엘은 시련을 겪는다. 무엇이 떠나온 이스라엘로 하여금 광야가 시련으로 느껴지게 했을까? 도착할 곳이 명확하지 않아서? 만나로 만족하지 못해서? 하느님을 믿지 못해서? 예수님께서 하신 비유 중에 씨 뿌리는 사람의 이야기가 있다(마르 4,1-9). 이 비유 이야기의 씨 뿌리는 사람은 참 애달프다. 긍정적인 결과가 오리라는 희망이 사라지는 모습을 체계적으로 등장시키기 때문이다. 뿌리를 내리지 못한 거리에서, 뿌리를 내리기는 했지만 성장하지 못하는 바위틈에서, 성장하기는 했지만 숨을 쉴 수 없는 가시덤불에서 수확을 내리라는 밝은 미래는 그 빛을 잃는다. 씨를 뿌리는 이유는 단순하다. 열매를 얻기 위함이다. 그런데 열매를 맺지 못한다는 시련을 그렇게도 세세하게 그려 강조할 필요가 있었을까? 그러나 이렇게 조직적으로 이뤄진 부정적 장면은 아이러니하게도 정반대의 긍정적 결과를 돋보이게 한다. 씨앗이 성장하면서 겪는 여러 어려움을 상세히 묘사함으로써 나중에 올 예상치 못한 큰 수확이 더 큰 기쁨으로 다가온다. 그렇다면 이 비유의 중요한 의미는 시련과 실패로 낙담하지 말라는 데에 있다. 어느 한 부분에만 씨가 뿌려져 뿌리를 내렸다 하더라도, 그 수확의 열매는 부족함이 없다. 익숙함에서 떠나 시련을 마주하는 일은 두렵고 떨리는 일이다. 여태 나를 사랑한다고 믿었던 사람에게서 낯선 향내를 느꼈을 때와 비길 수 있을까? 그 사람을 사랑했는지 익숙함을 사랑했는지 뒤죽박죽 된다. 그러나 이 일은 매혹적인 일이기도 하다. 익숙함의 지평을 떠나 전보다 그 사람을 더 사랑할 수 있는 여지와 희망을 남겨주기 때문이다. 회개로 떠나는 일은 두렵지만 매혹적이다. [2022년 1월 30일 연중 제4주일(해외 원조 주일) 전주주보 숲정이 3면, 이상훈 안토니오 신부(노송동성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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