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 톺아보기] 시편, 저마다의 사연 - 시편 3편: “주님께만 구원이 있습니다.” 국민에게 널리 알려지고 또 많은 국민의 사랑을 받는다는 의미로 ‘국민 **’이라는 수식어를 붙여 ‘국민 배우’, ‘국민 가수’, ‘국민 여동생’하고 부릅니다. 요즈음 자주 듣게 되지요. 이 수식어는 한때 반짝 흥행하거나 혹은 특정 세대의 특별한 인기에 힘입어 ‘국민’ 수식어를 붙이기는 하지만, 본래는 세대 전체를 두루 아우르는 표현이었습니다. 오늘날 표현을 빌려 말하자면 다윗은 분명 ‘이스라엘의 국민 가수’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시편 150편 중 다윗이 저자로 되어 있는 시편이 무려 73편이나 되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가 함께 둘러볼 시편 3편 역시 다윗의 자작곡입니다. 1 [시편. 다윗. 그가 자기 아들 압살롬에게서 달아날 때] 2 주님, 저를 괴롭히는 자들이 어찌 이리 많습니까? 저를 거슬러 일어나는 자들이 많기도 합니다. 3 “하느님께서 저자를 구원하실 성 싶으냐?” 저를 빈정대는 자들이 많기도 합니다. 셀라 4 그러나 주님, 당신은 저를 에워싼 방패, 저의 영광, 저의 머리를 들어 올려 주시는 분이십니다. […] 이 시편의 표제, 곧 머리말이 이 곡에 대하여 몇 가지 정보를 줍니다. 우선은 시편 3편의 저자가 나타납니다. 하지만 표제에 나온 저자가 꼭 그 시의 원저자는 아닐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 다윗이 지은 노래일 수도 있고 또는 다윗의 삶에 비추어 그 시를 볼 때 더 잘 이해할 수 있다는 의미일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또 다른 정보는 이 시편이 지닌 역사적 맥락입니다. 곧 “다윗이 자기 아들 압살롬에게서 달아날 때”라고 첨부한 내용입니다. 성경을 보면 다윗의 문제는 가정에서 시작됩니다. 그에게 너무 많은 아내가 있었기 때문이었지요. 비록 정략적 결혼이었다 하더라도 많은 아내와 아들들로 ‘가지 많은 나무에 바람 잘 날’이 없었습니다. 이 시편의 역사적 배경이 되는 사건을 요약하면 이렇습니다. 다윗의 아들 압살롬이 친여동생 타마르가 이복형 암논에게 강간당한 사건이 발생하자 그를 죽이고 도망치게 됩니다. 세월이 흐른 뒤 아버지 다윗의 사법적 사면으로 귀환은 했지만, 다윗은 압살롬을 살갑게 대하지 않았습니다. 아버지로부터 거부당한 수치심, 모멸감을 느낀 압살롬은 왕자의 난을 도모합니다. 그는 백성들에게 환심을 사며 힘을 키웠습니다. 하지만 히브리어 성경은 그런 압살롬이 백성의 마음을 얻은 것이 아니라 ‘훔쳤다’며 부정적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배후에 부당한 음모가 있었기에 백성의 마음을 도둑질한 것이라고 표현한 것 같습니다. 만약에 다윗이 암논의 잘못을 따끔하게 야단쳤더라면 역사는 어떻게 되었을까? 귀향에서 돌아온 압살롬을 아버지 다윗이 부성애로 따뜻하게 품어 주었더라면 어떻게 되었을까? 생각해 보게 됩니다. 어쨌든 이 시는 이런 상황을 염두에 두고 읽으라며 우리를 초대하는 것입니다. 이 시편은 개인 탄식 시편으로 구분됩니다. 시편을 크게 찬양시와 탄식시로 나눌 수 있는데, 찬양은 하느님의 현존을 경험할 때이고 탄식은 하느님의 부재를 경험할 때라고 하겠습니다. 우리의 삶이 어쩌면 이처럼 찬양과 탄식의 줄타기일지도 모르겠습니다. 하느님의 부재 체험에서 부르는 탄식 시편은 하느님이 안 계신다고 부정하는 것이라기보다는 오히려 나에게 와 주시기를 소망하는 것입니다. 다윗 역시 이 괴로운 상황에서 ‘주님’을 부르며 자신의 기도를 시작합니다. ‘주님’, ‘하느님!’하고 부르짖는 이 간결한 말마디에는 장황한 수식어나 미사여구보다 더 강한 간절함이 배여 있습니다. 이 시편은 또한 원수들에 대한 정보도 제공합니다. 그들은 수적으로도 ‘많고’ 또한 ‘조롱하며’, ‘빈정대는 자’들입니다. 수가 ‘많음’은 ‘저를 거슬러 일어나는’ 이들로서 저 ‘홀로’와 대조를 보입니다. 원수가 ‘많다’는 표현이 다섯 번이나 등장하는 동안 시편 저자는 줄곧 ‘혼자’입니다. 또 다른 정보는 반란을 일으킨 압살롬은 사람들에게 자신의 분노를 표출하지만 다윗은 자신의 괴로움을 하느님께만 쏟아내고 있다는 것 역시 대조적이라고 하겠습니다. 이 시편의 특이한 점은 전쟁에나 등장할 법한 군사 용어가 빈번히 사용된다는 것입니다. ‘방패’, ‘에워싸고’, ‘거슬러 둘러선’, 그리고 ‘함성(일어나소서)’ 같은 표현은 다윗이 맞닥뜨린 비극적 상황이 전쟁의 참상 한가운데에 놓인 것과 같음을 토로한 것이라 하겠습니다. 그런데 4절에서 갑자기 큰 반전이 일어납니다. 하느님을 기억하고 그분께 대한 신뢰를 되찾으며 마음에 변화가 만들어집니다. 탄원시가 우리에게 일관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바로 이러한 전환입니다. 시련이 어느 순간 하느님 안에서 새로운 희망과 의미를 얻게 되는 절묘한 전환인 것입니다. 이 시편의 원수들은 다윗을 이렇게 조롱합니다. “하느님께서 저자를 구원하실 성싶으냐?” 그리고 ‘빈정대는 자’들 도 많습니다.(3절) 그러나 시편 끝부분에는 하느님께서 그들의 ‘턱을 치시고 이를 부수신다.’(8절)고 나옵니다. 말로 조롱하고 빈정대던 자들의 ‘턱’과 ‘이’를 부수신다는 것입니다. 놀라운 것은 이러한 고백을 하는 순간에도 다윗이 처한 상황에는 아무런 변화가 없었다는 데에 있습니다. 그런데 저자는 마치 이 모든 일이 다 이루어진 듯 표현을 합니다. 하느님에 대한 신뢰가 있다면 그 어떤 어려움 속에서도 하느님을 찬양할 수 있음을 이 시편이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시편 1편과 2편이 시편에 입문하려는 사람들을 ‘어느 길’, ‘누구 편’이라는 질문으로 선택의 기로에 세웠다면 시편 3편은 하느님을 내 편으로 선택한 사람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시편 3편이 하느님의 이름을 부르며 시작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제부터 시편은 삶의 현장으로 우리를 인도해 갑니다. “주님께만 구원이 있습니다!”라는 다윗의 고백이 우리 각자의 삶의 현장에서도 높이 울려 퍼지길 빕니다. [월간빛, 2022년 2월호, 임미숙 엘렉타 수녀(툿찡 포교 베네딕도 수녀회 대구 수녀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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