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약 성경 다시 읽기] 마지막 절규 – 요한묵시록 ‘아포칼립시스 예수 크리스투(Αποκάλυψιϛ Ιησου Χριστου)’ 요한묵시록의 시작이다. 풀어내자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당신을 열어 보이신다.’는 뜻이다. 요한묵시록은 그리 신비한 책도, 엄중한 책도, 그렇다고 수수께끼처럼 난해한 책도 아니다. 우리가 알고, 믿고, 따르는 예수님에 대한 이야기다. 한때, 그리고 지금도 여전히 신천지로 인해 요한묵시록이 장안의 화제가 된 듯하다. 묵시문학과 그 속의 다양한 상징들에 대한 전이해 없이 우리말로 번역된(혹은 오역된) 성경을 들고 제멋대로 해석한 결과가 이단들의 무리 속에서 횡행한다. 비단 이단들 뿐만 아니다. 가톨릭이든 개신교든 잡다한 현실 논리와 성글게 익은 영성의 이름으로 요한묵시록에 생채기를 내는 경우를 참 많이도 목격한다. 어떤 경우든 올바르고 절대적인 해석이란 없다. 우리는 다만 말씀의 해석에 봉사할 뿐이다. 봉사가 교조주의적 훈계로 둔갑하는 순간 말씀은 왜곡된다. 요한묵시록 역시 이렇게 말한다. “나는 이 책에 기록된 예언의 말씀을 듣는 모든 이에게 증언합니다. 누구든지 여기에 무엇을 보태면, 하느님께서 이 책에 기록된 재앙들을 그에게 보태실 것입니다.”(22, 18) 요한묵시록을 읽는다는 건, 예수님을 읽어내는 일이다. 묵시록의 예수님은 역사 속에 살아간 나자렛 사람이 아닌 천상과 지상을 이어주고 엮어내는 ‘어린양’으로 다시 재해석된다. “나는 또 어좌와 네 생물과 원로들 사이에, 살해된 것처럼 보이는 어린양이 서 계신 것을 보았습니다.”(5,6) 어린양의 자리를 찬찬히 살펴보자. 창조주 하느님을 가리키는 어좌, 이 땅 위에 그 창조주가 함께한다는 것을 상징하는 네 생물, 그리고 하느님 백성의 총체를 암시하는 원로들과 온전히 하나된 어린양이다.(‘사이에’라고 번역된 ‘엔 메소(έν μέσω)’는 ‘한가운데’의 의미를 지닌다.) 하늘과 땅이 만나는 지점에 어린양이 서 있으되 쓰러져 있다. 땅이 하늘을 갈망하여 얻어낸 것이 이른바 ‘생명’, ‘구원’, ‘행복’ 등등의 것이어야 할 텐데 묵시록의 어린양은 서 있고 또한 쓰러져 있다. 생명과 죽음이 하나로 묘사되는 걸 어떻게 이해해야 하나. 어쩌면 요한묵시록은 기존의 의식 체계를 다르게 바꾸어내는 매개체가 아닐까. 세상은 늘 이원론적 사고에 익숙한 듯하다. 옳고 그름이 있고, 선악이 분명하며, 행복과 불행이 맞서서 반복되는 게 세상이라고 배우고 익힌다. 그래서 세상엔 긴장감이 없다. 선과 악이 선명히 그어져 있는 울타리를 넘지 못한 채 저들끼리 선하네, 저들끼리 악하네 떠드는 건 재미없다. 요한 묵시록은 세상을 다르게 보는 듯하다. 6장에서 세상의 혼탁함을 보여주는 네 마리의 말이 등장하는데, 첫 번째 말이 희망과 영광, 그리고 기쁨을 상징하는 흰색 말이다. 그 뒤로 전쟁과 살인의 빨간 말, 결핍과 기근의 검은 말, 끝내 죽음을 가리키는 푸르스름한 말이 등장한다. 세상이 힘들더라도 요한묵시록 저자의 눈엔 그럼에도 세상엔 희망이 있다는 얘기일 터. 7장의 ‘144,000’ 역시 그러하다. 구원의 상징적 숫자인 144,000은 ‘무한대’의 가치, ‘셀 수 없는’ 수적 가치를 담아낸다.(7,9) 그 셀 수 없는 군중이 구원을 외치는 자리는 ‘환난 중’이다.(7,14. ‘환난을 겪어 낸’이라고 번역된 우리말은 약간 수정되어야 한다. ‘환난을 겪다’라는 동사가 현재분사 형태로 사용되었다. 하여 ‘환난을 겪고 있는’으로 번역하는 게 타당하다.) 환난 끝 행복 시작이 구원이 아니다. 오히려 주어져 피할 길 없는 삶의 고통과 아픔을 예수님의 수난을 모범 삼아 담대히 살아내는 게 구원에 더 가까운 일이다. 요한묵시록에 어린양과 대비되어 나타나는 상징이 대탕녀 바빌론이다. 화려한 옷과 보석으로 치장한 대탕녀 바빌론은 성도들의 피와 예수님의 증인들의 피에 취해있다고 요한 묵시록은 증언한다.(17,6) 누군가의 아픔을 제 탐욕과 욕망의 제물로 갖다 바치는 대탕녀 바빌론은 로마의 ‘사치’를 가리킨다. 세상 이곳저곳에서 약탈하고 착취해 온 금, 은, 보석, 진주, 비단, 상아 공예품, 몰약, 그리고 노예, 포로 등을 흥청망청 소비하고 탐닉한 대탕녀 바빌론.(18,9-11) 그녀는 그 옛날 인간을 유혹하여 하느님으로부터 멀어지게 한 뱀의 육화이고(12,9), 세상 권력에 취해 경쟁과 성공만이 살길이라 외치는 이들의 우상이다.(13,3-4) 그 우상은 궁색한 ‘현실 논리’를 당위로 채색하고 세뇌시키는 ‘유토피아적 마약’과 같다.(13, 14) 신앙인이라면 이런 대탕녀 바빌론에 대해 적대감을 가지는 건 당연한 듯하나 요한묵시록은 이런 대립의 사고를 휘청거리게 만든다. 결전의 투지를 여지없이 무너뜨린다. “무너졌다, 대탕녀 바빌론이!”(18,2) 싸우지도 않고, 제대로 한번 저항해보지도 않고, 대탕녀 바빌론이 무너졌다고 단언한다. 로마는 여전히 건재했고, 여전히 부유했으며, 그 속의 귀족과 왕족은 여전히 도도했다. 그럼에도 신앙인의 눈에는 그런 대탕녀 바빌론이 의미 없음, 그것 뿐이었다. 흔히 요한묵시록을 미래에 다가올 섬뜩한 심판의 전조 현상이나 세상 끝날에 암울하게 펼쳐질 심판의 공포로 성급히 해석하곤 한다. 인간은 그만큼 미래를 희망하나 불안하게 사유하는 것이다. 요한묵시록을 빌려 제 삶의 다가 올 시간에 대한 불안 섞인 희망을 사유하는 것만큼 어리석은 게 있을까. 제 삶은 제 것이니 제 스스로 다듬어가면 될 일을, 굳이 다른 것에 비추어 제 삶의 가치와 무게를 저울질 할 필요가 있을까. 요한묵시록은 벌하거나 짓밟거나 꾸짖는 책이 아니다. 오히려 우리 각자의 삶이 하느님의 거처가 된다는 사실을 일깨운다.(21,3) 인간의 시선이 자꾸만 미래로 향하는 것은, 실은 지금의 자리에 대한 무의식의 거부감 때문이 아닐까. 적어도 지금은 아니라는 생각을 켜켜이 쌓아가며 지금 아닌 시간에 대한 동경을 무의식적으로 반복하는 우리는 미래의 시간 감각을 불안 아니면 횡재의 천박한 몽상으로 덧칠해 버리는 건 아닐까. 하느님의 거처는 지금 여기에 있다. “보라, 인간들과 함께 있는 하느님의 거처!”(21,3) 마태오 복음 끝자락에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보라, 내가 세상 끝 날까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겠다.”(마태 28,20) 요한묵시록은 예수님에 대한 책이고 예수님과 함께하고자 쓰여진 책이고, 예수님과 함께 지금을 살아내자는 책이다. 어찌 되었건 예수님과 함께 사는 지금과 화해하자는 책이다. 지금 여기가 하느님과 함께 살아가는 새 예루살렘이라는 사실을 요한묵시록은 우리에게 당부하며 가르친다. 그럼에도 지금이 힘들다, 지금이 꽤나 불편하고, 지금이 때론 너무 모질어 눈물이 분노로 뒤바뀐 채 지금이 끝내 절망이 되어 버릴 경우가 많다. “이젠 그만 살고 싶다.”라고 말하는 이들에게 요한묵시록은 마지막 호소의 자리가 아닐까. 세상이 까맣게 타버린 후에 그 세상이 하얗게 보일 수 있도록 제발 예수여, 오시라고 끝끝내 참고 참았던 절규가 요한묵시록이 아닐까. “아멘. 오십시오, 주 예수님!”(22,20) * 그동안 ‘신약 성경 다시 읽기’를 애독해 주신 독자 여러분과 연재를 맡아주신 박병규 신부님께 감사드립니다. [월간빛, 2022년 3월호, 박병규 요한보스코 신부(대구가톨릭대학교 신학대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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