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 속의 여인들] 에스테르 에스테르는 페르시아 제국에 끌려간 유다인으로 페르시아 임금의 왕비까지 된 여인이다. 고아였으나 그녀의 사촌오빠 모르도카이에 의해 길러진 이유로 왕비가 된 이후에도 에스테르 곁에는 모르도카이가 늘 함께했다. 에스테르의 이야기는 페르시아 궁궐에서 일하던 모르도카이와 재상의 자리에까지 오른 하만과의 갈등에서 시작한다(에스 3,5 참조). 모르도카이는 하만을 인정하지 않아 인사조차 거부했고 그런 모르도카이를 하만은 불쾌하게 생각했다. 하만의 불쾌함은 유다 민족 전체를 겨누게 되고, 임금에게 페르시아의 법과 문화를 거부하는 유다인들의 배타적 자세를 고발케했고, 유다인들의 절멸을 향한 분노로 변질된다. 임금은 하만의 원의에 따라 칙령을 내려 유다인들을 없애도록 허락하고 만다. 모르도카이는 이렇게 말한다. “당신은 만물의 주님, 주님이신 당신께 맞설 자 없습니다.”… “저의 주님이신 당신 말고는 아무에게도 무릎 꿇고 절하지 않으오리니 제가 이렇게 함은 교만 때문이 아닙니다.”(에스 4,17(4.7)) 기도 형식으로 남겨진 모르도카이의 속내는 아주 투박하고 무모한 논리를 품고 있다. 자신이 하만에게 인사하지 않은 개인적 자존심을 주님 외엔 무릎 꿇지 않겠다는 배타적 믿음으로 둔갑시키는 투박함. 현대의 독자는 이런 질문을 던져봐도 좋으리라. 자신에게 불편한 것을 공동체의 심각한 위기로 둔갑시켜 문제를 확대한 경솔함을 어쩔텐가, … 무릎 꿇고 인사하는 게 뭐가 어렵나, … 에스테르가 왕비가 되는 건 괜찮고, 인사하는 건 그토록 하느님께 불충한 일인가. 모르도카이는 에스테르에게 도움을 청한다. 그녀만이 유다 민족을 구할 수 있음을, 에스테르가 민족에 대한 책임이 있음을 기어코 주지시키면서. 에스테르는 하느님께 이렇게 기도한다. “당신 손으로 저희를 구하시고 주님, 당신밖에 없는 외로운 저를 도우소서.”(에스 4,17(25)). 에스테르는 임금에게도 같은 청을 올린다. “아, 임금님, 제가 임금님의 눈에 들고 또한 임금님도 좋으시다면, 제 목숨을 살려 주십시오. 이것이 저의 소청입니다. 아울러서 제 민족을 살려주십시오. 이것이 저의 소원입니다.”(에스 7,3). 에스테르에게 호의적인 임금은 유다 민족을 없애지 못하게 했고, 하만을 처형시킨다. 참 거칠고 투박한 이야기다. 미움과 대립, 그리고 죽음이 뒤얽힌 잔인한 이야기다. 에스테르기가 작성된 시기는 페르시아 제국이 아니라 기원전 2세기 셀류코스 왕조 안티오코스 4세 때로 추정된다. 유다 백성의 문화와 종교를 억압했던 안티오코스 4세의 통치 방식에 저항하는 하나의 교훈적 역사서로 에스테르기는 작동한다. 이를테면 가냘픈 여인을 통해 하느님은 유다 백성을 지켜주신다는 사실을 강변함으로써 억압받는 백성들에게 위로와 격려를 전해주고자 했던 것이 에스테르기다. 그럼에도 찜찜한 교훈이다. 민족을 위해, 가문을 위해, 제 자식을 위해 희생을 강요당한 어머니들이 떠올라서다. 남성들의 철없는 자존심 싸움을 민족 대 민족의 거대담론으로 비틀어 놓고 거기다 힘없는 여성이 대립의 이야기를 해소했다는 서사는 얼마나 잔혹하고 천박한 남성 위주의 의식을 품고 있는가. 어머니가 지니는 이른바 ‘모성애’는 자식을 향한 사랑이 아니라 남성이란 집단이 회피하는 궂은일, 천한 일, 비겁한 일을 혼자 감내해야 한다는 ‘희생양 메커니즘’의 다른 말마디일 뿐이 아닌가. 이대남, 페미충이란 단어로 남성과 여성을 갈라치기 하는 남성 정치모리배들이 들끓는 내나라 대한민국 안에서 여전히 여성들은 남성들의 천박하고 투박한 자존심 싸움의 피해자로 남아있는 건 아닌지. 에스테르기는 위로와 격려가 아니라 애잔하고 씁쓸한 뒷맛을 남긴다. [2022년 3월 27일 사순 제4주일 대구주보 3면, 박병규 요한보스코 신부(대구가톨릭대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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