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약 성경의 12 순간들 (3) 약속의 땅으로 모세오경을 보면 한 가지 질문이 생긴다. 왜 하느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광야로 떠돌게 하셨을까? 한 번에 가나안 땅으로 이끌어가셨으면 안 되셨을까? 하지만 하느님께는 그만한 이유가 있으셨다. 하느님이 이 백성을 이끌어낸 이유가 무엇인지 생각해 보자. 이스라엘과 계약을 맺어 당신 소유로 삼으시고 당신을 섬기는 백성으로 만들어, 온 세상에 당신을 알리는 도구로 쓰시기 위함이다. 하지만 백성들은 아직 준비가 되어있지 않았다. 가나안 땅은 그냥 들어가서 ‘이 땅 내게!’ 하면 차지할 수 있는 그런 곳이 아니었다. 그곳은 이미 이집트 문명과 쌍벽을 이루는 메소포타미아 문명이 뿌리를 내렸던 곳이다. 우리나라만 보더라도 지금이야 한류 문화가 지구 곳곳으로 퍼져나가고 있지만, 얼마 전까지만 해도 많은 젊은이들이 일본과 미국의 문화들을 따라 하곤 하지 않았나? 이집트에서 종살이 하면서 하층민으로서 살았던 그들이, 자신들보다 높았던 메소포타미아의 문명을 만나면 어찌 될지는 뻔하다. 고대 사회에서 문화, 문명이란 종교와 떨어질 수 없는 것이었다. 다른 나라의 문화에 물든다는 것은 우상숭배와 직결되는 것이 있다. 결국 이 백성들은 영적인 전쟁을 벌여야 했다. 세상에서 하느님을 증거할 것이냐? 아니면 거꾸로 이방 민족들의 우상들을 섬기며 다시 그것들의 노예로 살 것이냐? 더구나 이들의 몸은 이집트에서 해방되어 자유를 얻었는지 모르지만, 이들의 마음은 아직 종살이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고 있었다. 가나안 정탐 사건(민수 13-14장)은 그런 현실을 잘 보여준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이 약속하신 가나안 땅을 보여주시려 그곳을 정찰하게 하신다. 하지만 그곳을 정탐했던 각 지파 수장들의 반응은 어땠는가? 원주민들의 위세에 눌려 겁에 질려 돌아왔다. 그들을 보니 자신들은 메뚜기 같았다고(민수 13.33 참조) 표현한다. 이 얼마나 어리석은 모습인가? 이들의 낮은 자존감과 열등감을 어찌해야 할까? 하느님은 이제 광야에서 40년의 영적 훈련을 시작하신다. 사실 따지고 보면 하느님께서 일부러 그들을 광야로 돌리신 것은 아니었다. 정작 못 들어가겠다고 거부하며 반란을 일으킨 것은 백성들이 아니었나? 하지만 이것을 계기로 하느님은 이들을 진정한 하느님의 백성으로 거듭나도록 만드신다. 하느님 당신이 누구이신지 알고, 하느님의 율법을 중심으로 똘똘 뭉친 백성, 약속의 땅으로 향하는 광야의 여정에는 이러한 영적 과정이 동반되었다. 그리고 마침내 여호수아의 인도 아래 백성들은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게 되었다. 우연일까? ‘여호수아’(히브리어)라는 이름과 ‘예수’(그리스어)라는 이름이 같은 의미(주님께서 구원하신다)인 것은? 여호수아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약속된 땅, 가나안 땅으로,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자녀들을 약속된 땅, 하느님 나라로 이끄셨으니 말이다. [2022년 3월 27일 사순 제4주일 원주주보 들빛 3면, 정남진 안드레아 신부(용소막성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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