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행전을 따라가는 성경의 세계] 바오로 일행이 거쳐 간 코스, 로도스, 파타라 - 코스 항구(BiblePlace.com). 에페소 교회 원로들과 작별한 바오로는 일행과 함께 다시 배를 타고 밀레토스를 떠나 시리아로 향합니다. 목적지인 예루살렘에 가기 위해서지요. 일행은 코스로 갔다가 다음날 로도스를 거쳐 파타라로 가서 그곳에서 페니키아로 가는 배로 갈아탑니다(사도 21,1-2). 밀레토스 남동쪽, 그러니까 소아시아(오늘날 터키) 남서 연안에는 200개 가까운 크고 작은 섬들이 있는데 도데카니사(Dodecanese) 제도라고 부릅니다. 큰 섬 열두 개가 있다고 해서 붙인 이름입니다. 도데카니사 제도는 터키 연안의 섬들이지만, 터키가 아닌 그리스 영토입니다. 도데카니사 제도의 두 섬 코스와 로도스 코스는 도데카니사 제도에서 세 번째로 큰 섬으로, 소아시아 남서쪽 해안에서 5㎞ 정도밖에 떨어져 있지 않습니다. 이 섬은 ‘히포크라테스 선서’로 잘 알려진 근대 의학의 아버지 히포크라테스(B.C. 470?~B.C. 370?)의 고향이자 활동 지역이었습니다. 코스는 ‘코스의 아스클레피온’으로 유명합니다. 코스의 아스클레피온은 그리스 신화에서 ‘의술의 신’으로 불리는 아스클레피오스를 모신 신전이자 또한 환자들을 위한 진료소이기도 했습니다. 그리스 세계의 다른 수많은 아스클레피오스 신전과 달리 코스의 아스클레피온은 당시로는 꽤 과학적인 방법으로 치료했다고 합니다. 과학적 치료 방법을 창안하고 의술 학교를 열어 제자들을 양성한 히포크라테스의 영향을 받아서였습니다. 따라서 사도행전 저자인 루카는 코스에 잘 알고 있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 자신이 그리스계였을 뿐 아니라 의사 출신이었기 때문입니다. - 로도스의 거상을 상상한 그림(BiblePlace.com)과 코스의 항구에 남아 있는 고대 주랑(BiblePlace.com) 사도행전은 바오로 일행이 코스에서 배에서 내려 해변이나 여관에서 묵었는지 아니면 항구에 정박한 배에서 묵었는지 언급하지 않고 있습니다. 기록으로 확인할 수는 없지만, 바오로 사도가 코스에서 몇몇 사람을 신자로 만들었고 그것이 코스 그리스도교 공동체의 시작이 되었다는 전승이 전해지고 있습니다. 코스는 구약성경 마카베오 상권에서 한 번 언급됩니다(1마카 15,23). 코스 남동쪽에 있는 섬 로도스는 도데카니사 제도에서 가장 큰 섬입니다. 크레타섬과 소아시아 사이에 있어서 크레타와 소아시아를 잇는 중간 기착지 역할도 했습니다. 로도스는 고대 세계의 7대 불가사의 가운데 하나로 꼽히는 ‘로도스의 콜로수스’(Colossus of Rodes)라고 불리는 거상(巨像)으로 유명합니다. 로도스의 여러 도시 국가들이 마케도니아 제국의 침략을 물리친 것을 기념해 기원전 3세기 말에 건립한 이 거대한 상은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태양의 신 헬리오스를 조각한 상으로 높이 15m의 대리석 받침대 위에 세운 신상의 크기가 33m나 되었다고 합니다. 이 거상은 건립되고 나서 50여 년 동안 자리를 지키고 있었으나 기원전 224년 로도스에 발생한 큰 지진으로 무너져 내리고 말았습니다. 하지만 워낙 거대한 상이어서 이후에도 수백 년 동안 수많은 사람이 이 거상의 유적을 보려고 로도스를 찾았습니다. 바오로 일행은 로도스를 거쳐 가며 섬 북동쪽 로도스 항구 근처에 남아 있던 이 거상의 유적을 보았을지도 모릅니다. 일부 학자들은 바오로가 로도스섬 남동쪽에 있는 린도스에 잠시 머물렀다고 추정합니다. 린도스 항구 남쪽에는 ‘바오로만(灣)’이라고 부르는 만이 있어 이런 가설을 뒷받침하기도 합니다. 로도스는 구약성경에 두 번 나옵니다. 마카베오기 상권 15장 23절에는 로마의 집정권 루키우스가 보낸 편지의 수신처로 코스와 함께 언급되고 있고 에제키엘서 27장 15절에는 로도스 사람들이 티로와 교역하는 상대로 언급됩니다.(우리말 <성경>에는 “드단 사람들”로 나오지만, 영어 성경 <New American Bible> 2011년 개정판에는 “로도스 사람들(Men fo Rhodes)”로 나옵니다.) - 로도스 섬 린도스에 있는 정교회의 바오로 사도 기념 경당(BiblePlace.com)과 로도스 섬 린도스에 있는 바오로 만(BiblePlace.com). 소아시아 남부 리키아의 항구 도시 파타라 바오로 일행이 로도스를 거쳐서 도착한 파타라는 섬이 아니라 육지입니다. 로도스섬 동쪽에 있는 파타라는 소아시아 남부 리키아 지방의 중요한 항구 도시였습니다. 서기 43년 로마제국이 리키아와 그 동쪽의 팜필리아 지방을 합쳐 로마의 속주로 만들었을 때 속주의 로마 총독은 파타라에서 지내며 행정을 폈습니다. 파타라가 그만큼 중요한 도시였음을 알게 해줍니다. 이 시기에 즈음에서 파타라에는 높이 20m가 넘는 큰 등대가 세워져 수많은 배들의 길잡이 역할을 했습니다. 바오로 일행이 파타라 항구에 도착했을 때는 아마 이 큰 등대를 보았을 것입니다. 바오로 일행은 파타라에서 페니키아로 가는 상선을 만나고는 그 배로 옮겨 갑니다. 배를 갈아탄 것은 그때까지 타고 온 배로는 섬들이 많고 비교적 잔잔한 에게해 연안을 다니기에는 큰 무리가 없지만, 지중해를 가로질러 페니키아로 건너가기에는 적합하지 못했기 때문이었으리라고 봅니다. 바오로 일행이 탄 배는 키프로스 섬 남쪽 바다를 통해 시리아로 항진해서 시리아-페니키아의 항구 도시 티로에 닿았습니다. 파타라에서 티로까지는 뱃길로 대략 640㎞ 정도여서 최소한 며칠이 걸렸을 것입니다. 티로는 바오로가 목적한 도시가 아니었습니다만, 바오로 일행이 탄 배가 티로에서 짐을 부리기로 되어 있어 티로로 오게 된 것입니다(사도 21,3). 티로에 관해서는 다음 호에서 구체적으로 살펴봅니다. 바오로가 파타라에서 직접 복음을 선포하지는 않았지만, 파타라에는 일찍부터 복음이 전해졌고, 4세기 초에는 주교좌를 둔 교회로 성장합니다. 제1차 세계 공의회인 325년 니케아 공의회에 파타라의 주교 에우데무스가 참석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파타라는 또 산타클로스 이야기의 주인공인 미라의 주교 성 니콜라스(370~343)가 태어난 도시이기도 합니다. 파타라는 12세기까지도 항구 도시로서 기능을 했습니다. 특히 소아시아에서 팔레스티나로 성지 순례를 가려는 그리스도인들이 이 항구를 이용하곤 했습니다. 하지만 파타라 인근을 흐르는 크산토스 강에 쓸려온 퇴적물들로 파타라는 항구로서 기능을 점차 상실하고 마침내는 모래더미에 파묻히고 늪지로 변하고 말았습니다. 모래 속에 파묻혀 있던 고대 항구 도시 파타라는 1990년대에 들어와 발굴 작업이 시작되면서 로마 시대의 야외극장, 곡물 창고, 지진으로 무너진 등대 같은 흔적들이 조금씩 드러나고 있습니다. 교회 터로 여겨지는 유적도 네 곳이나 있어 이곳이 한때 그리스도교가 번성한 성경의 도시임을 짐작하게 해줍니다. [월간 레지오 마리애, 2022년 4월호, 이창훈 알퐁소(전 평화신문 편집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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