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신부가 들려주는 성경 인물 이야기] 사무엘 (1) 사무엘 예언자의 탄생은 특별합니다. 그는 불임의 몸이던 한나가 하느님께 청하여 얻은 아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아이의 이름은 그 의미대로 사무엘이 됩니다. 한나는 이렇게 서원합니다: “그 아이를 한평생 주님께 바치고 그 아이의 머리에 면도칼을 대지 않겠습니다.”(1사무 1,11) 나지르인의 서원처럼 보이죠? 70인 역은 이 구절에 ‘포도주와 독주를 마시지 않겠습니다’라는 말씀을 첨가함으로써 이를 더 분명히 하고 있습니다. 나지르인으로서 사무엘의 사명은 무엇이었을까요? 그가 왕을 세워 이스라엘의 판관 시대를 마무리하고 왕정 시대를 여는 것은 명백히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사무엘의 사명은 단지 왕을 세우는 것에 그치지 않는다는 사실이 사무엘기 첫 부분의 본문 뒤에 숨어있습니다. 한나는 간절히 기도하는 자신을 술 취한 여자로 여기는 엘리 사제에게 ‘좋지 않은 여자’로 보지 말아 달라고 하는데(1,6), ‘좋지 않은’은 히브리어 ‘블리야알’의 번역입니다. 그런데 이 단어는 ‘삼키는 자’로도 번역할 수도 있습니다. 구약성경에서 ‘삼킨다’라는 단어는 종종 죽음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블리야알’은 지하 세계에서 죽음을 관장하는 존재를 가리키게 되었습니다. 즉, 하느님의 반대편에 서 있는 악한 존재를 가리키는 말이 된 것이죠. “그리스도께서 어떻게 벨리아르와 화합하실 수 있겠습니까?”(2코린 6,15) 그런데 이 단어는 1사무 2,12에서 하느님을 올바로 섬기지 않는 엘리 사제의 아들들을 묘사하는 데도 사용됩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구절들은 이들의 행실을 구체적으로 보여줍니다. 엘리의 아들들은 하느님께 바쳐질 제물을 가로채는 불경한 행위도 서슴지 않았습니다. 율법은 제물 가운데 사제의 몫으로 허벅지살을 규정하고 있는데, 이들은 모든 부위를 닥치는 대로 갈취하였습니다. 더구나 생명의 원천인 피를 먹으면 안 되기에 고기를 삶아 피를 뺀 다음 먹게 되어있는데, 이들은 날고기를 구워 먹었습니다. ‘블리야알’은 하느님께 의지하는 한나와 그의 아들 사무엘이 아니라, 하느님을 안중에도 두지 않는 두 아들과 그런 아들을 둔 엘리입니다. 엘리의 뒤를 이어야 할 이들이 이렇게 합당하지 않으니, 엘리 가문의 사제직은 끊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이들을 대신하여 사무엘이 사제직을 수행하게 됩니다. 이스라엘 역사상 최초이자 마지막으로 예언직과 사제직을 겸하게 된 것입니다. [2022년 5월 1일 부활 제3주일(생명 주일) 가톨릭안동 3면, 함원식 이사야 신부(갈전마티아 본당 주임)] [함신부가 들려주는 성경 인물 이야기] 사무엘 (2) 한나는 서원한 대로 사무엘이 젖을 떼자마자 하느님께 바칩니다. 그래서 어린 사무엘은 아직 예루살렘 성전이 없던 시대에 계약의 궤를 모신 실로의 성소에서 봉사합니다. 그러던 어느 날 사무엘은 하느님을 개인적으로 체험하게 됩니다. 엘리가 성소에 붙은 자기 방에서 자고 있을 때, 사무엘은 성소 안에서 자고 있습니다(1사무 3,2-3). 사무엘이 사제인 엘리보다도 하느님께 더 가까이 있음을 공간적으로 묘사하고 있는 것입니다. 아직 하느님의 부르심을 들은 적 없던 사무엘은 세 차례나 사제 엘리가 부른 줄로 오해합니다. “사무엘은 아직 주님을 알지 못하고, 주님의 말씀이 사무엘에게 드러난 적이 없었던 것이다.” (1사무 3,7) 사무엘은 경륜 있는 사제 엘리의 조언을 들을 후에야 하느님께 응답을 드리게 됩니다. 그런데 사무엘이 들은 하느님의 첫 말씀은 한밤중의 악몽과도 같은 것이었습니다(1사무 3,11-14). 사무엘 개인이나 이스라엘을 위한 희망의 말씀이 아니라, 그가 공경하는 사제 엘리 집안에 내려질 무시무시한 심판에 대한 말씀이었기 때문입니다. 아론으로부터 이어져 온 거룩한 가문인 엘리 집안이 아들들의 죄악과 그들을 바로잡지 못한 아버지의 탓으로 철저히 몰락하고 말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왜 하느님께서는 사무엘과의 첫 만남을 이렇게 만드셨을까요? 하느님께서 엘리에게 직접 말씀하셨어도 될 텐데, 왜 굳이 사무엘이 중간에서 그 말씀을 전해야 하는 난처한 상황을 만드신 것일까요? 어린 사무엘이 평생 잊기 어려울 강렬한 방법으로 한 가지 중요한 교훈을 주고 계신 것으로 보입니다. 행위에는 반드시 결과가 따른다는 것, 즉 상선벌악(賞善罰惡) 말입니다. 이 교훈은 사무엘 자신은 물론 이스라엘 백성 전체가 절대로 잊지 않게 해야 할 신명기적 신학의 핵심입니다. 그리고 사무엘이 왕정 시대 이전 이스라엘의 지도자가 되기 위해 또 하나의 교훈을 얻게 되는 사건이 발생합니다. 놀랍게도 이스라엘이 실로의 성소에 모시고 있던 계약의 궤를 필리스티아인들에게 빼앗긴 것입니다. 이 사건은 하느님의 무력함을 보여주는 것이 아닙니다. 하느님께서 누구신지, 우리가 하느님을 어떻게 섬겨야 하는지를 가르치고 있습니다. [2022년 5월 8일 부활 제4주일(성소 주일) 가톨릭안동 3면, 함원식 이사야 신부(갈전마티아 본당 주임)] [함신부가 들려주는 성경 인물 이야기] 사무엘 (3) 계약의 궤는 하느님의 지상 현존을 드러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의 백성은 필리스티아인들과의 전쟁 상황이 불리해지자 계약의 궤를 마치 무기처럼 사용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실로에서 주님의 계약 궤를 모셔옵시다. 주님께서 우리 가운데에 오시어 원수들 손에서 우리를 구원하시도록 합시다.”(1사무 4,3). 하지만 이스라엘 백성이 기대한 대로 일이 흘러가지 않습니다. 오히려 하느님을 도구로 삼고자 한 대가가 그들 자신에게 돌아왔습니다. 이스라엘 군대의 진영에 계약의 궤가 도착했다는 소식을 들은 필리스티아인들은 처음에는 공포에 사로잡혔습니다. 그러나 이 일은 결국에는 그들의 사기를 더욱 끌어 올렸습니다. 더는 잃을 것이 없던 필리스티아인들이 절망의 힘으로 싸워 승리를 쟁취하는 데 성공한 것입니다. 그리하여 이스라엘은 계약의 궤를 빼앗기고, 엘리의 두 아들도 이때 죽습니다. 엘리 또한 이 소식을 듣고는 충격을 받아 죽어서 가문의 사제직은 끝이 납니다. 이 이스라엘의 패배는 분명한 교훈을 줍니다. 인간은 하느님을 도구로 삼을 수 없으며 자신의 이익을 위해 이용할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엘리의 며느리가 절망에 빠져 탄식합니다. “하느님의 궤를 빼앗겼기 때문에 영광이 이스라엘에서 떠났다.”(1사무 4,22) 하지만 계약의 궤는 누구의 도움도 없이 스스로 다시 이스라엘로 돌아옵니다. 이 사실 또한 중요합니다. 비록 이스라엘 백성의 소행이 계약의 궤를 잃게 했지만, 하느님께서는 자신을 스스로 돌볼 수 있으셨습니다. 필리스티아인들은 의기양양하게 계약의 궤를 전리품처럼 그들의 신전으로 옮겼습니다. 그러나 곧 그 물건이 주변에 특별한 해독을 끼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계약의 궤는 현존만으로도 방사성 물질로 가득 찬 상자보다 더 치명적으로 필리스티아 도시들을 감염시켰습니다. 더 이상 계약의 궤의 현존을 견딜 수 없었던 필리스티아인들은 그것을 다시 이스라엘에 되돌려줘야 했습니다. 그것도 그냥 돌려준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이 계약의 궤를 제발 되찾아가달라는 의미로 보상 제물까지 바쳤습니다. 이렇게 계약의 궤를 빼앗겼다 되찾은 사건은 하느님의 무력함이 아니라 반대로 놀라우신 권능을 증언하고 있습니다. [2022년 5월 15일 부활 제5주일 가톨릭안동 3면, 함원식 이사야 신부(갈전마티아 본당 주임)] [함신부가 들려주는 성경 인물 이야기] 사무엘 (4) 계약의 궤 사건을 겪은 이후에도 필리스티아인들은 끊임없이 이스라엘 백성을 괴롭혔습니다. 땅은 하나인데 차지하려는 민족은 둘이었으니 어쩔 수 없는 일이었을 겁니다. 이에 이스라엘 백성이 하느님께 탄식하자, 사무엘은 오직 회개만이 이스라엘을 구원할 수 있다고 가르칩니다. “여러분이 마음을 다하여 주님께 돌아오려거든, 여러분 가운데에서 낯선 신들과 아스타롯을 치워 버리시오. 여러분의 마음을 주님께만 두고 그분만을 섬기시오. 그러면 그분께서 여러분을 필리스티아인들의 손에서 빼내어 주실 것이오.”(1사무 7,3) 백성이 사무엘의 가르침대로 따르자, 하느님께서는 필리스티아인들을 물리쳐 주십니다. ‘주님께서 큰 소리로 천둥을 울리시어’(1사무 7,10) 이 말씀은 하느님께서 싸우심을 가리키는 전형적인 표현입니다. 이 싸움이 일어난 장소는 에벤 에제르입니다.(1사무 7,12) ‘도움의 돌’이라는 뜻으로, 하느님께서 이스라엘을 도우셨음을 기념하여 붙여진 이름입니다. 그런데 여기는 바로 이전에 이스라엘이 필리스티아에 대패하여 계약의 궤까지 빼앗긴 곳이기도 합니다(1사무 4,1). 같은 곳에서 벌어진 정반대의 일을 두고 이스라엘 백성은 신앙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해보게 되었을 것입니다. 이렇게 사무엘은 훌륭하게 이스라엘 백성을 올바른 믿음의 길로 이끌었습니다. 하지만 이것이 성경이 기록하고 있는 사무엘의 마지막 모습이 아닙니다. 마치 인간은 그 누구도 완전할 수 없음을 보여주기라도 하듯 그도 그릇된 일을 저지르게 됩니다. 사무엘은 엘리 가문의 비극을 누구보다 가까이서 목격했습니다. 그러니 그는 엘리를 반면교사 삼아야 했습니다. 그러나 엘리가 그랬듯이 사무엘 또한 자격이 없는 아들들을 자신의 뒤를 이어 이스라엘의 지도자 자리에 앉힙니다. 그러자 사무엘의 아들들은 잇속에만 치우쳐 뇌물을 받고는 판결을 그르치게 내렸습니다.(1사무 8,3) 이 구절은 신명기 16,18의 규정을 떠올리게 합니다: “너희는 공정을 왜곡해서도 안 되고 한쪽을 편들어서도 안 되며 뇌물을 받아서도 안 된다. 뇌물은 지혜로운 이들의 눈을 어둡게 하고, 의로운 이들의 송사를 뒤엎어 버린다.” 성경은 사무엘이 절대로 해서는 안 되는 일을 저질렀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사무엘의 잘못은 이것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하나의 잘못은 또 다른 잘못을 낳게 됩니다. [2022년 5월 22일 부활 제6주일 가톨릭안동 3면, 함원식 이사야 신부(갈전마티아 본당 주임)] [함신부가 들려주는 성경 인물 이야기] 사무엘 (5) 이스라엘 백성은 사무엘 예언자에게 왕정 제도를 세워 달라고 요구합니다. 이러한 요구까지 나오게 된 데는 사무엘의 잘못이 큽니다. 전부터 여러 지파로 나뉘어 있던 이스라엘 백성은 주변 다른 민족들이 왕을 중심으로 일치단결하여 힘을 하나로 모으는 점이 부러웠을 것입니다. 그런데 사무엘이 자격 미달의 아들들을 이스라엘의 차기 지도자로 삼은 일은 백성들의 왕에 대한 갈망에 불을 붙인 격이죠. 그래서 백성은 단순히 사무엘의 아들들 대신 다른 지도자를 원하지 않고 왕을 요구하게 된 것입니다. 상황이 이런데도 백성의 요구를 들은 사무엘은 자신의 잘못을 되돌아보는 대신 언짢아합니다(1사무 8,6). 과연 이 언짢음의 이유는 무엇일까요? 하느님께서는 백성이 원하는 대로 왕을 세워주라고 하십니다. 사실 구약성경은 훌륭한 왕도 있었고 악한 왕도 있었던 이스라엘의 역사를 반영하고 있기에 왕정을 긍정적으로 보는 신학과 부정적으로 보는 신학이 공존하고 있습니다만, 신명기의 율법은 왕정에 대하여 중립적인 태도를 보이고 있습니다. 즉, 왕정이 하느님의 뜻과 반대되는 것은 아니라는 말입니다. 하지만 사무엘은 백성에게 왕정의 부정적인 면만을 구구절절이 설명합니다. 예를 들어, “그는 여러분의 가장 좋은 밭과 포도원과 올리브 밭을 빼앗아 자기 신하들에게 주고, 여러분의 곡식과 포도밭에서도 십일조를 거두어, 자기 내시들과 신하들에게 줄 것이오.”(1사무 8,14-15) 하느님께서 하신 적이 없는 말씀까지도 덧붙입니다. “여러분은 스스로 뽑은 임금 때문에 울부짖겠지만, 그 때에 주님께서는 응답하지 않으실 것이오.”(1사무 8,18) 사무엘의 말은 마치 ‘이런데도 너희들은 내 아들들을 거부하고 왕을 원하겠느냐?’라고 백성을 협박하는 것처럼 들립니다. 사무엘은 한 아버지로서 아들들을 거부하는 백성에 대한 개인적인 감정 때문에 하느님께서 이미 허락하신 일을 반대하는 것 같습니다. 이로써 사무엘은 하느님의 뜻을 거스를 뿐 아니라, 그분을 부정하고 부패한 아들들의 통치를 강요하는 분으로 만드는 잘못을 범하고 있습니다. 사무엘은 한 예언자로서 신명기의 왕에 관한 규정을 백성에게 가르쳤어야 합니다. “반드시 주 너희 하느님께서 선택하시는 사람을 임금으로 세워야 한다. 너희는 너희 동족 가운데에서 임금을 세워야 하며, 너희 동족이 아닌 외국인을 임금으로 삼아서는 안 된다.”(신명 17,15) [2022년 5월 29일(다해) 주님 승천 대축일(홍보 주일, 청소년 주일) 가톨릭안동 3면, 함원식 이사야 신부(갈전마티아 본당 주임)] [함신부가 들려주는 성경 인물 이야기] 사무엘 (6) 사무엘이 이스라엘의 첫 번째 왕이 될 사울을 만납니다. 사울에 대한 첫 번째 묘사는 매우 긍정적입니다. 이스라엘 자손들 가운데 그처럼 잘생긴 사람은 없었고, 키도 모든 사람보다 어깨 위만큼은 더 컸다.(1사무 9,2) 우리말 성경에 ‘잘생긴’으로 번역한 히브리어는 토브인데, 좋다는 뜻입니다. 하느님께서 당신이 창조한 세상을 보고 하셨던 말씀이기도 합니다. 사울은 외모뿐만 아니라 내면도 훌륭한 사람이었다는 말입니다. 사울은 잃어버린 암나귀들의 행방을 묻기 위해 사무엘을 찾아갑니다. 사무엘은 하느님으로부터 사울이 올 것이니 그를 이스라엘의 지도자로 삼으라는 말씀을 이미 들은 상태였습니다. 그런데 사무엘은 하느님께서 시키지 않은 일을 합니다. 사무엘이 사울을 서른 명의 손님과 함께 잔치에 초대합니다. 이 잔치는 매우 정치적입니다. 사무엘이 앞으로 왕이 될 사울의 주변에 자기 사람들을 심는 자리이기 때문입니다. 사무엘은 왕이 생겨도 이스라엘의 지도자로서 자신이 누리던 권력을 완전히 잃고 싶지 않은 것입니다. 사울은 세 번이나 왕위에 오르게 됩니다. 첫 번째는 사무엘이 사울과 단둘이 있는 자리에서 기름을 붓고 왕으로 삼습니다.(1사무 10,1) 하느님의 명령을 이처럼 은밀히 수행한 까닭을 사무엘이 자기 권력이 사울에게 넘어가는 모습을 백성에게 보이고 싶지 않았기 때문으로 해석하기도 합니다. 두 번째는 사무엘이 미츠파에 백성을 모아 놓고 제비를 뽑아 사울을 왕위에 올립니다.(1사무 10,17-27) 그런데 이때는 사무엘이 사울에게 기름을 붓지 않습니다. 즉, 왕으로서의 정당성을 부여해주지 않습니다. 그러니 몇몇 불량한 자들은 “이 친구가 어떻게 우리를 구할 수 있으랴?” 하면서, 사울을 업신여기고 그에게 예물도 바치지 않았다.(1사무 10,27) 사울을 하느님께서 내리신 왕이 아니라 우연히 제비뽑기에 당첨된 운 좋은 젊은이로 생각할 여지를 남겨둔 것입니다. 사울이 세 번째로 왕위에 오르는 장면은 1사무 11장에 나옵니다. 암몬족이 쳐들어왔을 때 하느님의 영이 사울을 이끌어 대승을 거둡니다. 그러자 백성이 사무엘에게 말하였다. “‘사울 따위가 우리 임금이 될 수 있겠느냐?’ 하던 자들이 누굽니까? 그런 자들을 죽여 버리겠으니 우리에게 내주십시오.”(1사무 11,12) 그리고 온 백성은 길갈로 가 주님 앞에서 사울을 임금으로 세우고, 주님께 친교 제물을 바쳤다.(1사무 11,15). 사무엘이 부여하지 않은 왕으로서의 정당성을 하느님께서 직접 주신 것입니다. [2022년 6월 5일(다해) 성령 강림 대축일 가톨릭안동 3면, 함원식 이사야 신부(갈전마티아 본당 주임)]
[함신부가 들려주는 성경 인물 이야기] 사무엘 (7) 1사무 12장은 이스라엘의 지도자 자리를 사울 왕에게 넘긴 사무엘 예언자의 고별사를 담고 있습니다. 여기서 사무엘은 자신이 이스라엘을 이끄는 동안 흠도 티도 없었음을 강조합니다: “내가 누구의 소를 빼앗거나 누구의 나귀를 빼앗은 일이 있소? 내가 누구를 학대하거나 억압한 일이 있소? 누구에게 뇌물을 받고 눈감아 준 일이 있소?”(1사무 12,3) 이 말은 진실입니다. 그런데 사무엘은 자기 아들들이 일으킨 문제 때문에 왕정이 시작된 사실을 잊고 있는 듯합니다. 상식적이라면 사무엘은 먼저 자식들을 잘못 키운 일에 대하여 사과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하지만 사무엘은 오히려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늙어 백발이 되었고 내 아들들이 여러분과 함께 있소.”(1사무 12,2) 이 말은 사무엘의 아들들이 늙어 은퇴할 때가 된 아버지의 뒤를 잇기에 충분하다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습니다. 그러한 아들들을 제쳐두고 왕을 요구한 백성들에 대한 섭섭한 마음도 담고 있죠. 사실 남들은 모두 알고 있는 자식들의 잘못을 정작 부모만 모르는 경우는 드물지 않습니다. 그리고 자초지종이야 어떠하든 이미 백성은 새로운 왕을 맞이하였고, 하느님께서도 그 왕을 인정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사무엘은 이제 새로운 시대를 향하여 앞으로 나아가야 할 백성에게 덕담을 건네야 했겠죠. 하지만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여러분은 임금을 요구한 일이 주님 보시기에 얼마나 커다란 악인지 깨달으시오.”(1사무 12,17) 이스라엘 역사상 전무후무하게 예언자이며 사제였고 판관이기까지 했던 사무엘은 자신이 권력의 중심에서 밀려나고, 자기 후손들이 권력을 잇지 못하게 된 일이 못내 언짢았나 봅니다. 고별사의 마지막은 저주에 가까운 경고로 끝납니다: “만일 여러분이 여전히 악행을 일삼는다면, 여러분도 여러분의 임금도 모두 쫓겨날 것이오.”(1사무 25,25) 물론 이것은 사무엘기를 쓴 신명기계 역사가들의 근본 입장이기도 합니다. 바빌론 유배를 겪으며 이스라엘의 역사를 돌이켜 본 그들의 생각에 나라의 멸망은 왕정이 도입되면서부터 시작된 것입니다. 그런데 그러한 신학적 입장을 떠나, 사무엘이 이전에 해 온 말과 행동을 생각할 때, 이 고별사의 마지막 말이 왠지 개인적인 감정을 담은 악담처럼 들리는 것은 착각일까요? [2022년 6월 12일(다해) 지극히 거룩하신 삼위일체 대축일 가톨릭안동 3면, 함원식 이사야 신부(갈전마티아 본당 주임)] [함신부가 들려주는 성경 인물 이야기] 사무엘 (8) 사울 왕의 통치가 시작됩니다. 이스라엘의 왕으로서 사울의 첫 번째 일은 필리스티아인들로부터 백성을 보호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사무엘은 이 중요한 일을 해야 하는 사울을 방해합니다. 전쟁에 나가기 전 사무엘이 하느님께 제사를 바쳐주어야 했는데, 약속한 7일을 기다려도 나타나지 않은 것입니다. 철기 무기로 무장하고 속속 집결하는 필리스티아 대군을 본 병사들이 겁에 질려 흩어지기 시작하자 다급해진 사울은 결코 해서는 안 되는 일을 하게 됩니다. 사제가 아닌데도 직접 제사를 바친 것입니다. 그런데 사울이 제사를 바치자마자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사무엘이 등장합니다.(1사무 13,10) 어떻게 보면 사무엘이 놓은 덫에 사울이 걸린 것이라고 볼 수도 있습니다. 사무엘은 사울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주님께서 명령하신 것을 임금님이 지키지 않으셨으므로, 주님께서는 당신 마음에 드는 사람을 찾으시어, 당신 백성을 다스릴 영도자로 임명하셨습니다.”(1사무 13,14) 이 말을 가만히 보면 과거형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사울의 왕위 박탈을 이미 결정된 일, 번복할 수 없는 일로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상황이 이렇게 되고 나니 백성들도 더는 사울을 따르지 않습니다. 사울의 곁에는 오직 칼도 창도 없는 병사 600명만 남아있었습니다. 그런데 사울의 아들인 요나탄의 용맹한 활약을 보고는 도망치거나 배신했던 백성들이 다시 결집하여 전투에서 승리하게 됩니다. 성경은 이 승리를 요나탄 개인의 뛰어남이 가져온 결과가 아니라, 사무엘이 버린 이스라엘을 하느님께서 도와주신 것이라고 합니다.(1사무 14,23) 이스라엘에 분열을 일으킨 사무엘의 행위는 하느님의 뜻이 아니었다는 말이죠. 사무엘은 이제 더는 하느님의 예언자도 이스라엘의 지도자도 아닌 모습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사울도 점점 그릇된 길을 가기 시작합니다. 비상 상황이었다고는 해도 사울은 이미 해서는 안 되는 사제직을 수행하였습니다. 죄를 짓는 일은 한번이 어렵지, 그다음부터는 수월한 법입니다. 그리고 왕위를 박탈당하리라는 예언까지 들었습니다. 희망을 빼앗겼으니 하느님의 뜻에 충실할 이유도 잃었습니다. 그래서 아말렉족을 쳐서 모든 사람과 짐승을 죽이라는 하느님의 명령을 따르지 않고 전리품을 챙깁니다. 이에 하느님께서는 정말로 사울의 왕위를 거두기로 하십니다. ‘좋은’ 사람이었던 사울이 이렇게 망가지는 데에 사무엘의 책임이 없었다고 할 수 있을까요? [2022년 6월 19일(다해) 지극히 거룩하신 그리스도의 성체 성혈 대축일 가톨릭안동 3면, 함원식 이사야 신부(갈전마티아 본당 주임)] [함신부가 들려주는 성경 인물 이야기] 사무엘 (9) 아말렉족과의 전쟁 이후 사무엘은 사울과 완전히 결별합니다. 사무엘은 죽는 날까지 사울을 다시 보지 않았다. 그러면서도 그는 사울을 두고 슬퍼하였다.(1사무 15,35) 비록 사무엘이 사울을 시기하고 질투했을지는 몰라도, 막상 그의 불행한 운명이 결정되자 슬픈 감정이 생기는 것은 인지상정으로 보입니다. 그의 타락에 작지 않은 책임이 있을 뿐 아니라, 바로 자신이 암나귀를 찾아다니던 ‘좋은’ 젊은이를 위험천만한 권력의 길로 이끌었기 때문입니다. 일이 이렇게 되고 나니 사울에게 기름을 부어 왕으로 세우라 명하신 하느님도 원망스럽습니다: 사무엘은 화가 나서 밤새도록 주님께 부르짖었다.(1사무 15,11) 시간이 흘러 사무엘이 죽어서 온 이스라엘이 애도하는 가운데 라마에 묻힙니다. 그런데 사무엘은 죽은 뒤에야 사울을 다시 만나게 됩니다. 필리스티아인들과의 전쟁을 앞두고 두려움에 사로잡힌 사울이 하느님의 뜻을 알고자 하였으나 어떤 방법으로도 응답을 얻지 못하자 영매를 찾아가 사울의 혼을 불러온 것입니다.(1사무 28장) 이렇게 초자연적인 힘에 의지하는 것은 율법이 금하는 행위죠. 그래서 사울은 이스라엘에서 영매와 점쟁이들을 쫓아냈습니다.(1사무 28,3) 그런데 자기 손으로 쫓아낸 영매를 찾아온 것입니다. 율법의 수호자가 되어야 할 왕이 이렇게까지 망가져 버렸습니다. 이 장면을 두고 과연 초혼술이 가능한가 하는 논쟁을 벌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성경은 어떤 초혼 의식도 기록하고 있지 않습니다. 영매는 아무 일도 하지 않고 갑자기 나타난 사무엘의 혼을 바라볼 뿐입니다.(1사무 28,12) 그래서 이것은 초혼 의식의 효력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하신 일로 해석합니다. 아무튼 이 이야기는 사울은 사무엘과 정치적 경쟁 관계에 있었지만, 그래도 그를 크게 의지했었음을 보여줍니다. 하지만 사울은 사무엘로부터 희망적인 말을 듣지 못합니다. 아말렉족과의 전쟁 때 사울의 운명이 이미 결정되었거늘, 사무엘이 달리 무슨 말을 할 수 있었겠습니까?(1사무 28,28) 결국 사울은 필리스티아인들과의 전쟁에서 패하여 스스로 목숨을 끊습니다. 그리고 왕위는 사무엘이 죽기 전에 이미 기름을 부어 놓은 다윗에게 넘어가게 됩니다. 사무엘의 이야기는 여기서 끝이 납니다. 어린 시절 성소에서 밤을 지새우던 사무엘이 변해가는 모습을 지켜보는 것이 유독 씁쓸한 까닭은 그만의 일이 아니기 때문일 겁니다. [2022년 6월 26일(다해) 연중 제13주일(교황 주일) 가톨릭안동 3면, 함원식 이사야 신부(갈전마티아 본당 주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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