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역반장 월례연수] 창조를 통해 바라보는 영성의 의미, 사랑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1요한 4,16) For the Love, by the Love, in the Love(1요한 4,16 참조) 창세기의 창조 이야기를 조금 낭만적으로 해석하고자 합니다. 먼저 질문을 드려봅니다. “여러분들은 진정으로 사랑하는 사람이 있습니까? 그럼 그를 위해 무엇을 해주실 건가요?”, “그에게 정말 소중한 것을 주실 수 있으신가요?” 그렇다면 그것은 참된 사랑입니다. 사랑하는 이에게 아낌없이 주는 것은 매우 숭고하고 거룩해 보이기까지 합니다. 아낌없이 주는 나무의 이야기, 이웃을 위해 목숨마저 바쳤던 이들의 이야기가 감동과 행복을 자아냅니다. 사랑이 피어나는 감동적인 순간이기 때문입니다. 어머님들은 생명을 잉태하고 자신의 몸을 헐어 그 생명을 낳는 순간만큼 기쁘고 눈물 나는 때가 없다고 이야기합니다. 그것은 주는 것을 넘어서 사랑하고 희망하는 행위이며, 사랑과 희망이 창조되는 때입니다. 두 개의 창조 이야기 창세기는 여러 전승에 의해 내려오던 구전이 바빌론 유배 이후 최종 편집을 거치면서 완성된 책입니다. 기원과 창조에 관한 이야기를 다루지만, 창세기의 핵심은 하느님께 대한 진실한 믿음입니다. 창세기에는 서로 다른 전승에 의한 두 개의 창조 이야기가 존재합니다. 비록 내용상 상반되지만 모두 다 중요한 교훈이 있기에 최종 편집자가 두 이야기를 창세기 안에 함께 보존했습니다. 첫 번째는 가장 오래된 전승인 ‘비사제계 전승’입니다(창세 2,4-3,24). 기원전 587년의 예루살렘 함락과 바빌론 유배는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가슴 아픈 비극이었습니다. 수많은 이가 고통과 절망에 빠졌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적국에 포로로 끌려가 자신들의 신앙을 돌아보았고, 멸망과 유배의 원인을 하느님께 충실하지 않았음에서 찾았습니다. 이 창조 이야기는 뱀의 유혹과 죄와 벌에 관한 이야기를 통해 신앙에 대한 충실함을 강조합니다. 두 번째는 ‘사제계 전승’(창세 1,1-2,3)으로 유배에서 귀환한 이스라엘 백성이 희망을 찾아 나서는 무렵의 상황을 반영합니다(기원전 537년). 그들은 에즈라와 느헤미야를 중심으로 파괴된 도시와 성전을 복구합니다. 하지만 그 안에서 핵심은 신앙의 회복, 하느님 말씀인 율법에 대한 충실함을 회복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제계 저자는 혼돈에서 질서를 회복하는 하느님 말씀의 창조, 안식일에 대한 중요성을 강조합니다.
사제계(창세 1,1-2,3) 창조 |
사제계 이전(창세 2,4-3,24) 창조 |
혼돈으로부터의 창조(1,2) 말씀을 통한 6일간의 창조 하느님을 닮은 인간(1,26) 남녀가 동시에 창조(1,27) 세상과 피조물을 돌볼 책임(1,28) 7일째는 안식일(2,2) 세상은 근본적으로 좋은 곳 (보시니 좋았다) |
메마른 땅에서 시작(2,5) 흙과 당신 숨으로 사람을 지으심(2,7) 아담을 먼저 창조(2,15) 갈비뼈로 하와를 지으심(2,21) 인간의 죄와 벌(3장 전체) 바빌론 유배라는 비극적 사건을 반영 |
하느님의 사랑 창조 이야기에 이어지는 카인과 아벨, 노아의 홍수, 바벨탑 이야기는 인류에 관한 중요한 문제들인 기원과 죽음, 남성과 여성, 죄와 벌, 죽음과 폭력, 세상의 종말에 관한 이야기를 전합니다. 고대 근동의 창조 이야기와 소재 면에서 유사하기도 하나 결정적인 차이는 탈신화화로서, 고대 세계가 천체나 자연을 숭배하는 데 반해 창조 이야기는 그것이 하느님의 피조물임을 강조하며 하느님의 주권을 부각시킨다는 것에 있습니다. 두 번째는 바로 인간에 대한 하느님의 사랑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인간에게 자유를 주셨고 인간이 잘못을 저지르더라도 인간과 관계를 끊지 않으신다는 사실을 강조합니다. 창조 이야기가 집필 당시의 상황을 반영하는 것과 같은 맥락에서 창조 이야기는 이스라엘 백성이 체험한 구원의 역사를 바탕으로 이해되어야 합니다. 그 역사란 하느님의 놀라운 구원을 체험하고 그들이 그분의 크신 사랑과 자비를 체험한 시간입니다. 물론 이스라엘의 역사 안에는 하느님을 거부했던 반항과 불충의 기억이 존재합니다. 그러나 훨씬 많은 순간 하느님의 사랑을 체험했고 그 체험 때문에 신앙을 목숨처럼 지켜왔습니다. 유대인들이 오늘날까지 율법을 목숨처럼 지키는 이유입니다. 그 당시에도 그들의 허물들이 신앙의 소중함을 지워버린 것이 아닙니다. “인간이 무엇이기에 이토록 기억해 주십니까?”(시편 8,5)라는 위대한 고백은 고통과 시련의 역사의 이면에 존재했던 믿음의 체험에서 자라났습니다. 어머니의 사랑보다 더 큰 사랑이 바로 하느님의 사랑이고(이사 49,15 참조), 그 사랑은 달콤하고 감미로우며 죽음보다 강하고(아가 8 참조), 하느님께서는 그 사랑을 받아주지 않는 이스라엘 때문에 애가 타십니다(호세 11,8 참조). 강대국의 침략과 압제, 삶의 곤궁함과 가난함, 사랑하는 이의 죽음과 피폐한 삶에서 이스라엘은 그 사랑을 잃지 않았습니다. 바빌론 유배와 페르시아-그리스-로마의 침략, 그들의 성전에 우상이 들어서고, 신앙을 포기할 것을 강요받았지만 그들은 오히려 신앙을 위해 순교를 선택했습니다. 그러므로 창세기는 하느님의 사랑에 대한 신앙 고백이자 그분께 감사하는 찬미의 노래이고, 세상 삼라만상에는 하느님의 사랑과 선하심이 깃들어 있고 필요하다는 신학적 사유의 결실입니다. 창조의 영성적 의미들 살면서 세상을 과학적 시각으로만 바라볼 수 있을까요? 용서, 화해, 자비와 나눔, 회심 등. 이런 것들을 과학적으로 설명할 수 있습니까? 신앙과 이성은 더 높은 진리를 향한 두 날개라는 통찰처럼 과학만이 아니라 사랑과 영성의 시각도 절실히 필요합니다. 삶과 세상을 신앙과 하느님 안에서 바라볼 때 얻어지는 지혜가 바로 사랑과 영성입니다. 창조 이야기는 세상과 인간이 하느님과 연결되어 있다는 관계성(친교)을 이야기합니다. 또한 하느님의 선하신 사랑과 생명이 인간과 세상의 바탕이자 길이 되어야 함을 이야기합니다. 인간과 세상이 하느님과 단절되지 않고 친교를 이룰 때 생명과 행복, 즉 구원을 얻는다는 구원의 신비를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창조는 사랑이자 구원입니다. 이러한 창조의 영성적 의미를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겠습니다. 1) 하느님의 창조는 사랑 안에서, 사랑에 의해서, 사랑을 위한 신적(神的) 행위이다. 2) 하느님을 닮은 인간은 사랑이신 하느님을 통해 내 삶의 자리를 가꾸어 가야 한다. 3) 사랑을 지향하는 창조는 우리 삶을 위한 치유와 회복, 구원의 길이다. 4) 창조가 전하는 사랑의 구체적인 방법은 돌봄, 섬김, 나눔, 봉사이다. 나가는 말 하느님께서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당신의 아드님을 보내주셨습니다(요한 3,16 참조). 하지만 완고한 세상은 그 사랑을 알아보지 못하고 거부했습니다. 오늘날의 세상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로 하여금 하느님을 잊게 하는 것은 너무도 많습니다. 만연한 황금만능주의, 이기적인 욕심과 이웃과 신앙에 대한 무관심 등입니다. 하지만 그런 삶이 정녕 행복할까요? 그것이 우리가 가야 할 삶의 길일까요? 선택은 우리에게 달렸습니다. 시련과 어려움에도 신앙을 선택하고 하느님을 바라보는 이가 행복함을 오랜 신앙의 역사가 증언합니다(시편 1 참조). 비록 고되고 어렵지만, 그것이 생명과 구원의 길임을 증언합니다. 그러므로 오늘날 창조의 참된 영성을 살아가는 것은 우리의 신앙심을 회복하고, 신앙의 가르침을 실천하는 일입니다. 그것은 십자가를 지고 주님의 길을 걷는 것이며, 하느님과 이웃을 제 몸처럼 사랑하는 길이고 나와 세상을 치유하는 길입니다. 동영상 보기 https://youtu.be/MjrdoASikDk [소공동체와 영적 성장을 위한 길잡이, 2022년 5월호, 이주형 세례자요한 신부(서울대교구 성서못자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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