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약 성경의 12 순간들 (7) 남유다의 멸망 200년의 역사동안 북이스라엘의 왕조가 9번이나 교체된 반면, 남유다는 다윗과 솔로몬의 정통 계보를 이으며 350년간 단일한 다윗 왕조를 유지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남유다의 왕들이 다윗처럼 하느님께만 의존하며 살았던 것은 아니다. 그들 역시 북이스라엘처럼 종교 혼합주의 안에서 우상 숭배에 빠져들었기 때문이다. 그래도 남유다에는 진흙속의 진주처럼 하느님 보시기에 좋았던 임금들이 있었으니, 히즈키야와 요시아 임금은 우리가 꼭 기억해둘만 하다. 히즈키야는 즉위하자마자 산당과 우상을 없애 성전을 정화하고 평생 계명을 충실히 지켰던 인물이다. “그의 앞뒤 임금들 가운데에서 그만한 임금이 없었다”(2열왕 18,5)라는 평가까지 받는다. 요시아 역시 그의 할아버지와 아버지 시대에 만연했던 우상 숭배를 없애고, 점쟁이와 영매 등을 금지하며, 지방 성소를 없애는 등 종교개혁을 일으킨 인물이다. “요시아처럼 모세의 모든 율법에 따라,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님께 돌아온 임금은, 그 앞에서 없었고 그 뒤에도 다시 나오지 않았다”(2열왕 22,25)는 평가까지 받으니 이보다 더한 극찬이 있을까? 사실 현실적으로 종교는 정치와 연관되어 있었다. 솔로몬조차 다른 나라들과의 외교 때문에 이방 여인들과 정략 결혼을 하고, 이방신의 산당을 짓지 않았던가? 많은 남유다의 임금들은 정치, 군사적 위기 속에서 하느님이 아닌 주위의 강대국들(이집트, 아시리아, 바빌론 등)에게 의존하며 살아남았었는데, 강대국에 예속된다는 것은 결국 종교적으로도 예속될 수밖에 없는 것이었다. 그러니 이방신들을 섬기지 않는다는 것은 정치적으로도 독립을 한다는 의미였고, 그것은 주위의 강대국들이 아닌 하느님께만 의지하며 하나 된 신앙으로 똘똘 뭉쳐 살아가겠다는 의지의 표현이기도 했다. 그러나 이러한 성왕들의 노력도 잠시뿐, 이후의 임금들은 모두 다시금 우상 숭배의 죄에 빠지며 하느님을 멀리했고, 강대국들에게 휘둘려 이리 저리 동네 북 신세로 전락하고 말더니, 기원전 587년, 바빌론의 네부카드네자르 임금에 의해 남유다 역시 멸망하고 만다. 다윗으로 시작된 새 왕조가 끝이 났다. 이스라엘의 중심이었던 예루살렘, 주님의 성전과 왕궁까지 모두 불타고 무너지고 말았다. 예루살렘은 죽음의 도시가 되었고, 약탈당했으며, 대다수의 지배층들이 바빌론으로 끌려갔다. 이스라엘 역사 최악의 순간이다. 이는 철저한 실패였고 하느님과의 관계 단절을 의미하기도 했다. ‘아! 하느님께서는 정녕 그들을 버리셨는가?’ 하지만, 바빌론 유배는 이스라엘의 역사에 있어서 이집트 탈출에 버금갈 정도로 중요한 순간이다. 하느님은 과연 인간의 약함과 실패를 통해 더 크게 활동하시는 분이셨다. 나라를 잃고 유배시기를 거치며 오히려 유다인들은 엄청난 영적 도약을 이루어냈기 때문이다. 본격적으로 성경이 기록되고 편집되기 시작한 것도 이때가 아닌가? 하느님은 그들을 버리시지 않았다. 오히려 더 가까이에 계셨다. [2022년 5월 15일 부활 제5주일 원주주보 들빛 3면, 정남진 안드레아 신부(용소막성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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