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Re:묵시록 | 카테고리 | 성경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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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이정임 | 작성일2016-05-20 | 조회수2,081 | 추천수0 | 신고 |
[요한 묵시록의 올바른 이해] 묵시록의 상징체계 (2)
동물의 상징
묵시록에는 우주와 자연에 비해서는 적게 나타나지만 동물들을 지칭하는 용어들을 발견할 수 있다. 생물들(20번), 어린양(29번), 사자(6번), 독수리(3번), 메뚜기(2번), 용(13번, 신약 전체에서 유일하게 묵시록에서만 사용됨), 괴물 또는 짐승(38번), 말(16번), 개구리(1번), 전갈들(3번), 뱀(5번), 개(1번), 새(3번) 등이 사용된다. 묵시록에 나오는 동물의 종류는 신약의 어떤 책과도 비교할 수 없을 만큼 광범위하다.
어떤 경우에 동물들은 현실적인 의미로 사용된다. 예를 들어 지상에 사는 사람들 중 4분의 1을 잡아먹는 맹수들(4,6ㄴ-8ㄱ), 피가 말고삐에까지 닿았다고 할 때의 말들(14,20), 천사의 목소리와 비교된 사자의 울부짖음(10,3), 전갈의 침(9,5) 등이다.
그러나 동물들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과는 자주 다르고 더 뛰어난 활동들을 벌인다. 현실의 어떤 것과도 비교될 수 없는 모습을 지니고(4,6ㄴ-8ㄱ) 찬미의 기능을 담당하며(4,8ㄴ 등), 명령하고(6,1-7; ‘오너라!’), 천사들에게 금 대접을 전달하며(15,7), 경배한다(19,5).
어린양은 현실에서 벗어난 특징들로 표현되는데(5,6) 아주 놀라운 행동들을 한다. 두루마리를 받고(5,7), 봉인을 뜯고(6,1-3), 진노를 터뜨리고(6,16), 생명의 샘으로 이끌고(7,17), 싸우고 이기며(17,14), 결혼식을 거행하고(19,7.9), 옥좌를 가지고 있다(22,1.3). 사자는 이겨서 두루마리의 봉인을 뜯고(5,5),메뚜기들은 전갈처럼 사람들을 괴롭히고 당혹스러운 모습을 지니고 있으며(9,7.9) 독수리는 위협적이고 놀라운 고함을 지르며 이야기를 한다(8,13).
말들은 현실적 의미 외에도 우리가 상상할 수 없는 크기, 색깔, 태도를 지닌다. 용과 두 짐승들은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을 훨씬 넘어서며 마찬가지로 놀라운 일들을 행한다. 용은 별들을 땅으로 던지고(12,4), 하늘에서 싸운다(12,7).
첫 번째 괴물은 하느님의 이름을 모독하고(13,6), 모든 부족들과 백성들 위에 권능을 가지고 있다(13,7). 두 번째 괴물은 용과 같이 말을 하고(13,11) 첫 번째 괴물의 형상을 만들고 그 형상에게 생명을 준다(13,14-15).
이외에도 예를 들자면 한이 없다. 묵시록의 저자는 동물들을 상징으로 변화시키고 있으며, 그 변화는 우주의 변화만큼이나 근본적이다. 동물의 상징에서도 저자의 창조성이 드러나는데, 이 동물들의 상징을 통해 저자는 무엇을 표현하고자 하는가? 우리는 이 동물들의 묘사를 읽으면서 인간의 차원과는 상이하면서 그 수준을 뛰어넘는 존재라는 느낌을 받는다. 이런 첫 인상은 동물들이 수행하는 행동들을 보면 더욱 확실해진다.
동물들은 인간적으로 설명하기 어려운 방식으로 행동한다. 그들의 행위는 인간과 인간 역사를 억압하지만 항상 하느님 능력 아래에 있는 것으로 나타난다.
따라서 동물들은 부정적이든 긍정적이든 종말론적 결론에 이르기까지의 과정 안에서 인간 역사에 개입된 힘이나 세력을 표현한다. 천상 예루살렘에서는 모든 동물이 사라지고 그 중앙에 오직 어린양만 남아 있을 것이다. 이는 역동적인 구원이 있을 것이며, 그 구원은 그리스도의 부활을 통해 그리스도에 의해 주어질 것임을 의미한다.
저자는 동물의 상징을 사용하여 인간 차원과는 다른 상이성과 인간의 수준을 뛰어넘는 초월성을 표현하고자 한다. 인간보다 상위의 존재가 인간들을 자극하고 또 그 위에서 활동하는 것이다.
따라서 동물의 상징들이 현실적 의미에서 무엇을 지칭하는지 구별하려고 하는 것은, 그것이 선이든 악이든 그 의미를 축소시키는 필연적 결과를 낳을 뿐이다. 동물들은 역사 안에서 활동하는 힘이나 세력 그리고 막을 수 없는 생명력을 포괄적으로 의미하고 있으며 구체적인 맥락 안에서 궁극적으로 밝혀질 수 있을 것이다.
이 동물의 상징체계 안에서 저자가 변증법적 형태로 진행되는 인간 역사에 대한 날카로운 인식을 가지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인간 역사는 다양한 구성요소들과 의문점들 그리고 인간이 이해 못하는 부분으로 이루어진 것이다. 그러나 항상 하느님의 의지에 지배되고 어린양에 의해 완성으로 인도되고 이끌어지며 유지되는 것이다.
숫자의 상징
묵시문학의 일반적 특징인 숫자의 상징은 묵시록에서도 폭넓게 사용되고 있다. 숫자의 상징에서 나타나는 의미의 변화는 자체로는 중성적인 양을 숫자로 표현하고, 그것을 인위적으로 선택하거나 변화시킴으로써 질적 가치로 만드는 것이다. 이런 변화가 더욱 강조되면 양적 가치를 전부 상실하고 전혀 다른 것으로 변화한다.
아라비아 숫자가 도입되기 전에는 알파벳으로 숫자를 표현했는데, 알파벳으로 표현된 숫자의 배열이 고유한 이름을 나타낸다. 가장 분명하면서도 유일한 예는 13,18에 언급되는 짐승의 숫자인 666이란 숫자이다. 이 숫자가 지시하는 것에 대해 여전히 확정된 것은 없지만, 가장 일반적인 이론은 666이 아람어 알파벳으로 나타낸 네로 황제의 이름이라는 것이다(NRWN QSR : N=50, R=200, W=6, N=50, Q=100, S=60 R=200으로 전체의 합은 666).
다음에는 다른 형태의 문학에서도 볼 수 있는 것처럼 숫자의 과장이 있다. 이것은 “그들의 수는 수백만 수억만이었습니다.”(5,11)고 한, 어린양을 찬송하는 천사들의 숫자에서 볼 수 있다.
더욱 단순한 구조를 지닌 경우로 넘어가 보자.
7은 구약에서 이미 완전성, 전체성을 의미한다. 묵시록의 저자는 자신이 속한 문화적 환경에서 이를 받아들인다. 따라서 이는 묵시록 저자의 독창적인 것은 아니지만, 7개의 구성요소를 열거하는 것(예를 들어, 7교회, 7봉인, 7나팔, 7잔 등등)이나 문학적 구조로 적용하는 것은 그의 독창적인 것이다. 모든 경우에 7은 어떤 전체성을 가리키고 있으며 그다음의 문맥이 그것이 무엇인지 밝혀준다.
3과 2분의 1은 7의 반으로서 둘로 나뉜 전체성, 곧 부분성을 나타내며, 여기에서도 문맥이 그 분명한 내용을 밝혀준다. 우선 기간이나 정도의 부분성을 나타낸다. 예를 들어, 42달(3년 반)은 거룩한 도시가 짓밟히는 기간(11,2)으로 한정된 기간을 의미한다. 연 단위가 아니라 달수로 표시하는 것은 그것이 한정적임에도 길게 느껴지리라는 것을 의미한다. 3년 반은 날 수로도 표시되는데, 1,260일은 두 증인이 예언하는 기간이다(11,3).
이런 인위적인 전개는 두 증인의 예언이 날마다 일어나는 일이면서 어쨌든 한시적인 일임을 의미한다. 따라서 1,260일은 두 증인이 매일 존재하리라는 것과 교회가 위급상황에 처했을 때 활동하리라는 것을 확신시키려고 사용된다. 이는 여인이 광야에서 보살핌을 받는 기간(12,6)이기도 한데, 구약의 만나처럼 적대적 세력과 대립하는 동안 하느님께서 베푸시는 일상적 도움을 뜻한다.
3분의 1(8,7-12) 또는 4분의 1(6,8)은 전체성이 조각남으로 인한 부분성을 나타낸다.
3은 7다음으로 자주 신적인 것을 지시한다.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시간(과거-현재-미래)이나 공간(앞-여기-뒤, 위-여기-아래)이 셋으로 구분되는 현상들을 통해 3을 완성과 관련된 것으로 이해하고 신의 속성에 적용했던 것으로 보인다.
숫자 4는 지상의 네 방위, 곧 동서남북과 관련된 것으로, 총체적이고 전 세계적인 전망에서 이해된다. 묵시록에서도 상징적으로 사용되어 주로 땅과 관련된 총체성을 표현한다.
1,000은 하느님과 그리스도의 업적 차원에서 고유한 전체성을 의미한다. 시간은 자체로 중성적이지만 그리스도의 현존과 업적을 생각하면 거룩한 것이 된다. 예를 들어 1000년 왕국(20,1-6)이 있다.
10은 2,10 “(열흘 동안 환난을 겪을 것이다.”)에서 보는 대로 그렇게 보이지 않은 상황임에도 지니고 있는 한정성, 한계성을 의미하며, 5 역시 마찬가지 의미이다(9,5.10). 예를 들어 용과 짐승은 열 개의 뿔을 지니는데, 일곱 뿔을 가진 어린양(5,6)과 비교하면 완전하지 않은 한정된 힘을 나타낸다.
12는 묵시적 상징이라기보다 12지파 또는 12사도에서 나온 숫자이다.
그다음으로는 합성 숫자가 있다. 환난을 당하지 않고 구원을 받을 144,000명은 12×12×1,000으로 12지파와 어린양의 12사도가 다수화한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이는 하느님 백성 전체를 의미하는 상징이다.
* 이성근 사바 신부 - 1991년 사제로 수품, 교황청 성서대학을 졸업했다. 성베네딕도회왜관수도원 서울분원장이다.
[경향잡지, 2015년 3월호, 이성근 사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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