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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구약] 시편 톺아보기: 시편 137편, 차마 부를 수 없는 노래
작성자주호식 쪽지 캡슐 작성일2022-05-20 조회수2,900 추천수0

[시편 톺아보기] 시편 137편 : 차마 부를 수 없는 노래

 

 

타향살이 몇 해던가 손꼽아 헤어보니

고향 떠난 십여 년에 청춘만 늙어.

부평같은 내 신세가 혼자도 기막혀서

창문 열고 바라보니 하늘은 저쪽…

 

망향의 설움과 아픔을 노래한 오래된 대중가요, 한두 번 쯤은 들어보셨을 것입니다. 고향은 동요, 민요, 가곡, 대중가요의 단골 소재입니다. 바빌론으로 끌려와 유배 중이었던 이스라엘 백성들 역시 고향에 대한 깊은 그리움과 성전을 향한 애틋함을 노래했습니다. 시편 137편이 그러합니다. 유배살이의 서러움을 노래한 시편 137편은 듣는 이의 간장을 토막토막 썰어대는 단장곡이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유배살이를 하는 동안 이러한 시온의 노래를 부르며 서로를 다독이고 민족의 정체성을 지켜 나갔습니다.

 

바빌론 강 기슭 거기에 앉아 시온을 생각하며 우네.

거기 버드나무에 우리 비파를 걸었네.

우리 어찌 주님의 노래를

남의 나라 땅에서 부를 수 있으랴?

예루살렘아, 내가 만일 너를 잊는다면

내 오른손이 말라 버리리라.

내 혀가 입천장에 붙어 버리리라.

 

첫 구절만으로도 기막힌 슬픔이 가슴을 저립니다. 시구 어느 한 소절도 이스라엘인의 서러운 체험이 묘사되지 않은 곳이 없다고 해도 과언은 아닙니다. 절절히 묻어나는 한스러움과 애달픔이 눅진하게 붙어 있는 이 시편에서 아픔도 음악으로 흘려보냈던 그들의 마음이, 그 처절함이 애틋하게 다가옵니다. 빼앗긴 조국을 그리워하는 그들의 마음이 더 실감나게 안타깝고 뼈아픈 이유는 우리 역시 일제 강점기를 견뎌 왔기 때문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성경 속의 히브리 민족은 얼룩진 역사도 그대로 보존하는 것 같습니다. 성경 곳곳에서 유배지의 비참한 삶과 애환을 표현하기를 주저하지 않았음을 볼 수 있습니다. 어찌 보면 감추고 싶은 치욕스러운 역사일 수 있는데도 과거를 잊지 않고 후손들이 기억하게 하되, 비굴하지도 격분하지도 않고 담담히 새겨가는 그들의 역사의식이 엿보입니다.

 

이 시편에 표제가 따로 붙어 있지 않아 저자에 대한 정보를 전혀 알 수 없습니다만 내용상으로는 역사를 회상하는 시편으로 분류됩니다. 유배라는 역사적 배경이 있는 까닭에 전체 분위기는 비통함과 비애감으로 가득합니다. 저자는 바빌론을 ‘우리를 포로로 잡아간 자들’, ‘우리의 압제자들’이라고 표현합니다. 그래서 이 노래는 타향살이에서 부르는 포로의 노래입니다. 하느님의 성전에서 하느님을 찬양하던 그 시절에 대한 그리움일 수도 있고, 또한 그렇게 하지 못했던 과거에 대한 참회 일 수도 있습니다.

 

저자는 자신의 비파를 나무에 걸어 두었다고 말하는데 이것은 더 이상 악기를 연주하지 않음을 나타냅니다. 하느님의 도성과 성전이 폐허가 되었는데 악기를 타며 즐거운 노래를 부를 수 없다는 단호한 의지의 표현입니다. 하지만 ‘나무에 걸어 둔 비파’는 단순히 연주를 멈추었다는 것 이상의 더 깊은 의미도 담고 있습니다. 성경에서 ‘나무에 걸다’라는 동사는 사람을 매달아 ‘사형’을 집행할 때에 주로 사용되는 말이었습니다.(신명 21,22; 여호 8,29; 10,26; 2사무 4,12; 21,12; 에스 2,23; 5,14; 9,13) 따라서 ‘나무에 걸린 비파’는 흥겨운 소리를 내던 악기가 처형된 죄수처럼 매달려 있는 모습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저자는 나무에 걸려 있는 비파를 통해 끌려온 이스라엘 사람들과 자신의 자화상을 보는 듯합니다. 곧 나무에 매달린 비파가 마치 자기 자신들 임을 고백하는 것 같습니다.

 

비탄과 애통이 너무나 컸기 때문일까요? 애상곡 분위기의 시편에서 압제자들에 대한 거침없는 저주의 말이 쏟아집니다.

 

행복하여라,

네가 우리에게 행한 대로 너에게 되갚는 이!

행복하여라,

네 어린것들을 붙잡아 바위에다 메어치는 이!

 

오늘날 우리 그리스도교의 전례에서는 저주를 담고 있는 7-9절이 주는 거북함 때문에 이 부분은 기도로 바치지 않습니다. 차마 입에 담기 힘든 험한 말들이 ‘원수 사랑’과 ‘용서’를 강조하는 그리스도교의 윤리에 부합하지 않기 때문일 것입니다. 하지만 시편이 토해내는 분노와 독설은 어찌 보면 하느님의 도성과 성전에 대한 애끓는 그리움의 또 다른 표현일 것입니다. 표독한 저주가 깊을수록 자신들이 당한 고통이, 또 하느님의 집과 고향에 대한 그리움이 그만큼 크다는 방증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사실 시편에 나타나는 저주와 악담은 하느님의 통치를 염원하는 간절함에서 생긴 것입니다. 이러한 분노의 표출을 통하여 어찌할 수 없었던 현실과 아픈 마음을 달래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당혹스러운 독설과 그 내용의 잔인함은 우리를 불편하게도 하지만 이러한 저주의 말들도 기도 안에서 표출된다는 점에서 볼 때 엄연한 ‘기도’입니다. 시편에 나타나는 저주는 실질적이고 직접적이라기보다는 시적 표현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 저주의 말들은 개인적으로 쌓인 원한을 표출한 것이 아니라 ‘예루살렘’의 궁극적 적대자에 대한 독설입니다. 그들에게 시온의 노래는 압제자들 앞에서는 차마 부를 수 없는, 고향에 대한 사무치는 그리움의 노래였던 것입니다.

 

[월간빛, 2022년 5월호, 임미숙 엘렉타 수녀(툿찡 포교 베네딕도 수녀회 대구 수녀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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