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예수의 평화는 성령의 활동입니다. | 카테고리 | 성경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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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남충희 | 작성일2016-06-21 | 조회수2,277 | 추천수0 | 신고 |
아주 중요한 질문입니다. 사실 예수는 복음서 곳곳에서 세상에 평화를 주러 왔다고 거듭 말합니다. 그런데 예수의 평화는 세상의 평화와 전혀 다릅니다. 다음의 구절을 참조하시기 바랍니다. “나는 여러분에게 평화를 주고 갑니다. 나는 나의 평화를 여러분에게 주는 것입니다. 내가 주는 평화는 세상이 주는 평화와는 다릅니다. 그러니 걱정하거나 두려워하지 마시오.”(요한복음 14:27) 예수의 평화는 성령의 활동입니다. 따라서 성령을 받아들여서 신적인 생명, 지혜, 자유를 누리는 사람만이 예수의 말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세상의 평화는 욕구를 충족시키거나 욕구를 억눌러서 얻어집니다. 이러한 평화는 결코 오래 지속되지 못합니다. 일시적으로 욕구를 충족시키더라도 시간이 지나면 욕구가 다시 생깁니다. 그에 더하여, 하나의 욕구를 충족시키면 다른 욕구가 줄줄이 생겨서 욕구를 모두 충족하는 것은 도저히 불가능합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세상 모든 사람들이 욕구를 추구하기 때문에 욕구를 채우려면 남들과 치열하게 경쟁해야 합니다. 그렇다고 윤리적 규범이나 법으로 욕구를 억누른다면 욕구불만이나 우울증이 생깁니다. 세상의 평화는 일시적인 것이며 오히려 더 큰 다툼과 폭력을 배태하고 있습니다. 세상에서 범죄와 전쟁이 끊이지 않는 것은 바로 이 때문입니다. 설령 큰 행운을 만난 어떤 사람이 여러 가지 욕구를 흡족하게 채우면서 인생의 즐거움을 누렸다고 하더라도 육신의 숨이 끊어지고 나면 만사 헛것입니다. 그에 비해 예수의 평화는 욕구의 충족이나 억압과는 전혀 차원이 다른 신적인 생명, 지혜, 자유에서 옵니다. 예수의 평화는 죽음을 이기는 영원한 생명의 힘입니다. 게다가 하느님께서는 원하는 누구에게나 성령을 무한하게 내려주시기 때문에 남과 다툴 필요가 전혀 없습니다. 예수의 평화는 세상의 평화와 공통점이 조금도 없습니다. 그래서 칼이라는 표현을 사용한 것입니다. 칼은 욕구(쾌락, 재물, 명예, 권력)에 대한 집착을 자르는 성령의 지혜를 상징합니다. 칼의 상징에 대하여 창세기3:24를 참조하십시오. 예수의 평화를 누리는 사람은 쾌락, 재물, 명예, 권력에 초연합니다. 아버지와 아들은 애덕/의지, 어머니와 딸은 망덕/감성, 시어머니와 며느리는 신덕/이성을 상징합니다. 얼핏 잘 이해가 가지 않으실 지도 모르겠습니다. 애덕, 망덕, 신덕은 각각 의지, 감성, 이성을 부정(否定)하는 행위입니다. 애덕, 망덕, 신덕을 가리켜서 기도라고 합니다. 기도는 나의 뜻을 버리고 하느님의 뜻을 받아들이는 활동입니다. 의지, 감성, 이성은 욕구의 활동에 불과하지만 애덕, 망덕, 신덕(=기도)은 성령의 활동입니다. 사람은 기도(=三德)를 통하여 하느님과 완전하게 뜻이 통할 수 있습니다! ‘집안 식구’는 욕구에 대한 집착을 가리키는 상징어입니다. 욕구(쾌락, 재물, 명예, 권력)에 대한 집착을 버려야만 성령을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성령과 욕구에 대한 집착은 절대로 양립할 수 없습니다. 예수의 가르침은 세상의 스승들의 가르침과 차원이 전혀 다릅니다. 예수의 평화를 직접 맛보지 않는다면 성당에 열심히 다니고, 미사에 참여하고, 많은 헌금을 내고, 여러 가지 기도를 외우고, 단식을 하고, 자선사업을 하더라도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예수의 평화를 얻는 것이 바로 그리스도교 신앙의 목적이며 인생의 목적입니다. 부디 예수의 가르침을 실천함으로써 성령의 평화를 누리시기 바랍니다. 처음 성서공부를 하는 새내기라고 하시지만 오히려 성서를 엉터리로 아는 분들보다 훨씬 유리한 입장에 서 계십니다.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순진한 마음으로 실천하는 삼덕입니다. 삼덕을 실천하는 사람에게 하느님께서는 반드시 성령의 평화를 내려주십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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