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 73 성경 통독 길잡이] 욥기 한평생 가족을 위해서 열심히 살기만 했는데, 갑작스럽게 암이 찾아왔다면 어떨까요? 이른 새벽부터 열심히 일하기 위해서 길을 나섰는데 교통사고로 생을 다하게 되었다면 어떨까요? 잠자는 시간까지 줄여가면서 정말로 열심히 공부했는데 시험에 또 떨어졌다면 어떨까요? 이럴 때 우리는 좌절하게 되고 또 하느님을 원망하게 됩니다. 욥기를 보고 있노라면 마치 욥이 이러한 우리의 마음을 대변하는 것과 같은 느낌을 받게 됩니다. 사실 욥기는 누가 작성했는지, 언제 작성되었는지, 그리고 내용적으로 어느 시대를 배경으로 하고 있는지를 알 수 없는 책입니다. 그래서 이해하기가 어렵습니다. 또한 삶의 가장 어려운 문제인 무죄한 이가 겪게 되는 고통을 다루기 때문에 어려움은 더욱 배가됩니다. ‘왜 하느님의 뜻에 따라 선하게 살아가는 사람이 고통을 겪고, 악하게 살아가는 사람은 편하게 살아가는가? 왜 하느님께서는 이를 바로잡지 않으시는가? 신명기 신학의 기초를 이루는 상선벌악, 인과응보는 여전히 유효한 것인가?’ 욥기는 이러한 부조리한 현실에 대한 질문에서부터 출발합니다. 욥기의 구조를 살펴보면 머리말과 맺음말을 제외하고 총 3개의 담론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먼저 1-2장은 하느님의 뜻에 따라 충실하게 살아온 욥에게 닥친 이유 없는 불행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느님을 원망하지 않는 욥의 모습을 전합니다. 재산을 잃고, 자식들도 죽었으며, 욥 자신도 병들었습니다. 이는 신앙의 선조들과 맺으신 땅과 후손에 대한 약속이 사라진 것으로 욥에게 하느님의 은총이 남아있지 않음을 의미합니다. 3장부터 42장 6절까지에서 욥의 독백과 뒤이어지는 세 친구들, 엘리후 그리고 하느님과 욥이 나누는 담론이 운문의 형태로 전해집니다. 먼저 3장에서 욥은 1-2장의 모습과 달리 자신의 처지를 한탄합니다. 아무런 죄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왜 고통을 겪게 되는지 욥은 자신의 삶을 저주하면서 묻고 있습니다. 4장부터 31장까지는 첫 번째 담론으로 욥과 세 친구들(엘리파즈, 빌닷, 초바르)과의 이야기가 이어집니다. 엘리파즈 → 빌닷 → 초바르로 이어지는 대화 속에서 세 친구는 인과응보, 상선벌악 등 신명기 신학에 바탕을 둔 전통교리에 대한 입장을 고수하며 이유 없이 겪게 되는 고통은 없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욥으로 하여금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지은 죄에 대해서 참회할 것을 권고합니다. 반면 욥은 자신의 결백함을 주장하면서 자신은 아무런 잘못도 저지르지 않았음을, 즉 자신이 지금 겪고 있는 처지는 신명기 신학에 바탕을 둔 상선벌악의 원리에 부합하지 않는다는 것을 항변합니다. 32장부터 37장까지는 두 번째 담론으로 욥과 엘리후의 이야기를 전해줍니다. 엘리후는 욥에게 4개의 담론을 연이어 제시하면서 욥에게는 하느님보다 의로운 척을 하면서 하느님을 거슬러서 송사를 제기한 것을 지적하고, 다른 세 명의 친구들에게는 하느님 보시기에 합당하지 않은 모습을 보이는 욥에게 아무런 답변도 하지 못하는 점을 지적합니다. 욥기의 저자는 세 친구를 향한 엘리후의 지적을 통해서 전통적인 지혜학파의 한계를 밝히고 있습니다. 그리고 엘리후의 이야기 마지막에는 하느님의 업적을 찬양하는 찬양시가가 등장하는데 이를 통해 세 번째 담론인 하느님과 욥의 이야기가 예고되고 있습니다. 38장부터 42장 6절까지는 마지막 담론으로 하느님이 직접 욥과 이야기를 나누십니다. 욥은 세 친구들과 엘리후와의 이야기를 통해서도 답을 찾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38장에서 이제 하느님께서 직접 욥에게 말씀하십니다. 하느님께서는 하늘과 땅, 빛과 어둠, 기후, 동물 세계 등 세상 모든 것의 주재자가 누구인지를 물으시면서 욥에게 우주 만물의 주인은 하느님이시며, 그런 하느님의 뜻을 인간의 판단으로 다 헤아리려는 것은 옳지 않음을 분명히 하십니다. 그리고 욥은 창조주 하느님과 피조물인 자신의 모습을 깨닫고 참회합니다. 그리고 지금까지 귀로만 들었던 하느님을 비로소 눈으로 보게 되었다고 말하면서 하느님을 체험했음을 고백합니다. 이를 통해 욥기의 저자는 인간 중심주의에서 하느님 중심주의로 넘어서는 것이 신앙인의 올바른 삶의 태도임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42장 7절부터 17절까지는 맺음말로 친구들에게 내리는 하느님의 심판과 욥이 다시 회복되어 하느님 축복 속에서 살아가는 내용을 전해줍니다. 앞서 이야기하였듯이 욥기는 ‘왜 하느님의 뜻에 따라 선하게 살아가는 사람이 고통을 겪고, 악하게 살아가는 사람은 편하게 살아가는가? 왜 하느님께서는 이를 바로잡지 않으시는가? 신명기 신학의 기초를 이루는 상선벌악, 인과응보는 여전히 유효한 것인가?’라는 질문으로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이에 대한 답을 찾아가는 과정 속에서 제일 중요한 문제는 “불평꾼이 전능하신 분과 논쟁하려고 하는가?”(40,2)의 말씀처럼 피조물인 인간이 하느님을 헤아릴 수 있다고 생각하거나, 인간의 생각으로 하느님의 섭리를 다 파악할 수 있다고 여기는 것임을 밝히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어떠한 경우에도 하느님을 믿으면서 “저에게는 너무나 신비로워 알지 못하는 일들을 저는 이해하지도 못한 채 지껄였습니다.”(42,3)라는 욥의 고백을 겸손되이 바치는 것이 우리의 올바른 태도임을 분명히 하고 있습니다. [소공동체와 영적 성장을 위한 길잡이, 2022년 6월호, 노현기 신부(사목국 기획연구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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