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행전을 따라가는 성경의 세계] 예루살렘 성전에서 체포된 바오로, 안티파트리스를 거쳐 카이사리아로 호송 - 16세기에 건립된 터키 요새가 있는 안티파트리스 유적(BiblePlace.com). 예루살렘에 도착한 바오로는 형제들의 환대를 받지만, 모두가 바오로에게 호의적이지는 않았습니다. 예루살렘 교회에는 같은 그리스도인이면서도 율법 규정을 충실히 지키는 유다인들과 그렇지 않은 유다인들이 있었습니다. 율법을 충실히 따르는 유다인 가운데는 율법 규정을 제대로 지키지 않는 유다인들을 탐탁지 않게 여기는 이들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바오로는 선교 여행 중에 이방인들에게는 말할 것도 없고 유다인들에게도 율법 규정을 지키고 할례를 받음으로써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구원을 얻는다고 공공연하게 선포했습니다. 이로 인해 현지 유다인들에게 미움을 샀을 뿐 아니라 박해도 여러 차례 받았지요. 예루살렘 교회의 지도자 야고보를 비롯한 원로들은 그 점이 염려스러웠습니다. 그래서 바오로에게 가난해서 정결 예식에 드는 비용을 마련하지 못하고 있는 나지르인 4명과 함께 정결 예식을 거행하고 그들의 정결 예식 비용을 대어 주라고 제안합니다. 그렇게 하면 유다인들의 환심을 사리라고 본 것입니다. 나지르인은 자신을 주님께 봉헌하기로 특별한 서원을 한 사람을 가리킵니다(민수 6,1). 바오로는 그 제안을 받아들여 나지르인 4명과 함께 정결 예식을 거행한 후 성전에 들어가 정결 예식 기한이 차서 예물을 바쳐야 할 날을 신고합니다(사도 21,20-26). - 예루살렘 성전 모형도. 가운데가 예루살렘 성전, 오른쪽 위가 안토니오 요새, 왼쪽 빨간 지붕의 주랑자리는 바오로가 연설한 최고의회 자리(BiblePlace.com)(위), 예루살렘 성전이 있었던 성전산과 안토니오 요새자리(BiblePlace.com)(아래). 성전에서 체포되는 바오로 그런데 아시아에서 온 유다인들이 성전에 있는 바오로를 발견합니다. 아시아는 바오로가 3년 동안 머물렀던 에페소가 있는 아시아 속주를 말합니다. 그들은 바오로를 보자 군중을 선동해 바오로가 유다인과 율법과 성전을 거슬러 가르칠 뿐 아니라 그리스인까지 성전 안으로 데리고 와서 성전을 부정하게 만들었다고 소리칩니다. 온 도시가 소란해지고 백성이 몰려와 바오로를 성전 밖으로 끌어냅니다. 그러자 성전 문들이 곧 닫힙니다(사도 21,27-30). 성전 안에서는 소요나 피 흘림이 있어서는 안 되기에 군중은 바오로를 성전 밖으로 끌어냈고 성전 문들이 닫힌 것입니다. 바오로가 성전 안뜰에서 바깥뜰로 끌려 나오자 유다인들은 바오로를 죽이려고 합니다. 이 소동이 로마군대의 천인 대장에게 보고되고 천인 대장은 곧바로 부하들을 데리고 현장으로 달려가 바오로를 붙잡아 결박한 후 심문을 시작하려 합니다. 하지만 군중이 소리를 질러대는 바람에 진상을 알아낼 수 없어 바오로를 진지 안으로 끌고 가라고 명령하지요(사도 21,31-36). 로마군대는 예루살렘 성전 북쪽 외벽과 연결된 안토니오 성에 주둔하고 있었습니다. 이 요새는 헤로데 대왕(37~4 B.C.)이 자신의 후견인인 마르쿠스 안토니우스(83~30 B.C.)를 기려 건설한 성으로, 당시 예루살렘 성전에서 일어나는 소요를 막고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 로마군대가 주둔하고 있었습니다. 안토니오 요새에는 성전 외벽을 통해 성전 바깥뜰로 내려가는 층계가 있었습니다. 이 층계를 통해 천인 대장은 군사들과 함께 성전 바깥뜰로 올 수 있었습니다. 진지로 끌려가던 바오로는 천인 대장에게 자신이 유다인으로 타르수스의 시민임을 밝히면서 백성에게 이야기할 수 있게 해 달라고 요청합니다. 천인 대장이 허락하자 바오로는 층계에 서서 백성에게 조용히 하라고 손짓한 다음 길게 연설합니다. 율법을 충실히 지키는 열성적인 유다인으로 예수를 믿는 신자들을 박해하던 자신이 어떻게 해서 회심하고 뭇 민족을 위한 복음의 증인이 되었는지에 관한 내용이었습니다(사도 21,37―22,21). 유다인들은 바오로의 말을 듣고는 고함을 지르며 바오로를 죽이려고 합니다. 그러자 천인 대장은 바오로를 진지 안으로 끌고 가서 채찍질로 신문하라고 지시합니다. 결박당한 바오로가 로마 시민인 자신을 재판도 하지 않고 채찍질해도 되느냐고 항의하자 천인 대장은 바오로가 태어날 때부터 로마 시민인 것을 알고는 그를 결박한 일로 두려워합니다. 돈을 주고 로마 시민권을 얻은 천인 대장은 태생 로마 시민인 바오로보다 신분상 아래였기 때문입니다. 이튿날 천인 대장은 유다인들이 바오로를 고발하는 이유를 확실히 알아보려고 최고의회를 소집합니다(사도 22,22-30). 최고의회 의원들 앞에 선 바오로는 의원들 가운데 사두가이도 있고 바리사이도 있는 것을 알고는 자신이 열성적인 바리사이로서 죽은 이들이 부활하리라는 희망 때문에 재판을 받고 있다고 말합니다. 사두가이들은 부활도 없고 천사도 없고 영도 없다고 주장하지만 바리사이들은 그것들을 다 인정하고 있어서, 그들 사이에 논쟁을 일으키려는 의도였습니다. 바오로의 의도대로 그들 사이에 논쟁이 격렬해지자 천인 대장은 바오로를 진지 안으로 데려가게 합니다(사도 23,1-10). - 16세기에 세워진 오스만 튀르크 요새가 있는 안티파트리스 유적(BiblePlace.com)(좌) 카이사리아의 헤로데 궁전 터(BiblePlace.com)(우). 안티파트리스를 거쳐 카이사리아로 호송되다 유다인들은 어떻게 해서라도 바오로를 죽이겠다고 단단히 벼르고는 음모를 꾸밉니다. 그러나 바오로의 생질이 이 계획을 알고는 바오로에게 연락해 마침내 천인 대장까지 음모를 알게 됩니다. 그래서 천인 대장은 카이사리아에 있는 펠릭스 총독에게 자초지종을 설명하는 편지를 써서 보병과 기병으로 편성된 군사들 편에 바오로를 카이사리아로 호송하게 합니다. 군사들은 그날 밤 바오로를 안티파트리스로 데려갑니다(사도 23,12-31). 예루살렘과 카이사리아의 중간쯤에 있는 안티파트리스는 구약성경에 ‘아펙’으로 언급되는(여호 12,18; 1사무 4,1-11; 29―31장) 아주 오래된 도시입니다. 헤로데 대왕이 도시 이름을 자기 아버지 헤로데 안티파테르의 이름을 따 안티파트리스로 바꾸었지요. 예루살렘에서 안티파트리스까지는 험준한 유다 산악으로 이뤄져 있지만, 안티파트리스를 지나면 카리사리아까지는 평야 지대가 펼쳐집니다. 그래서 예루살렘과 카이사리아를 오가는 사람들은 보통 안티파트리스에서 휴식을 취하곤 했습니다. 오늘날 이스라엘 국립공원으로 지정된 안티파트리스는 로마 시대의 유적은 지진 등으로 대부분 땅속에 묻혀 버렸고 16세기 오스만 튀르크 시대의 요새 유적만 볼 수 있습니다. 바오로를 데리고 온 군사들은 안티파트리스에서 하룻밤을 지낸 뒤 이튿날 보병은 예루살렘으로 돌아가고 말을 탄 기병들이 바오로를 호송해 카이사리아로 호송해 갑니다. 험준한 산악 지역에서 매복해 있다가 바오로를 죽일지 모른다는 염려 때문에 함께 온 보병들이 이제는 기병들만으로도 바오로를 안전하게 카이사리아로 호송할 수 있다고 보고 예루살렘으로 돌아간 것입니다. 카이사리아에 도착한 기병들은 천인 대장의 편지와 함께 바오로를 총독에게 인도하고 편지를 읽고 난 총독은 예루살렘에서 고발자들이 내려오면 신문을 하기로 하고 바오로를 헤로데 궁전으로 데려가 지키게 합니다(사도 23,32-35). 헤로데 궁전은 헤로데 대왕이 카이사리아를 건설하면서 지은 궁전으로, 당시에는 로마 총독 관저로 사용되고 있었습니다. 바오로는 헤로데 궁전에서 머물면서 고발자들이 올 때까지 무슨 생각을 하고 지냈을까요? 어쩌면 예루살렘에서 체포됐을 때 주님께서 나타나셔서 “용기를 내어라. 너는 예루살렘에서 나를 증언한 것처럼 로마에서도 증언해야 한다”(사도 23,11)라고 하신 말씀을 되새기지 않았을까요? [월간 레지오 마리애, 2022년 6월호, 이창훈 알퐁소(전 평화신문 편집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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