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느님 뭐라꼬예?] 자애로우신 하느님의 시험과 교육, 유혹과 십일조 규정 속없으신 하느님? 이스라엘 백성은 하느님께서 명령하신 길에서 빨리도 벗어나 우상을 섬기는 죄를 범하였습니다. 이에 모세가 그들을 위하여 기도하였습니다. “주 하느님, 당신의 그 큰 능력으로 구해 내시고, 강한 손으로 이집트에서 이끌어 내오신, 당신의 소유, 이 백성을 파멸시키지 말아 주십시오. … 그들은 당신께서 당신의 큰 힘과 당신의 뻗은 팔로 이끌어 내오신 당신 백성, 당신의 소유입니다.”(신명 9,26-29) 이러한 모세의 중재기도를 들으신 하느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내리려던 분노를 거두셨습니다. 모세는 이러한 사실을 알린 후 하느님의 말씀과 하신 일을 전합니다. “그때에 주님께서 나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먼젓번과 같은 돌 판 두 개를 깎아서, 산으로 나에게 올라오너라.’ … 그러자 주님께서는, 당신께서 집회의 날에 그 산의 불 속에서 너희에게 이르신 십계명을, 먼젓번에 쓰셨던 것처럼 그 판 위에 쓰셔서 나에게 주셨다.”(신명 10,1-4) 자신이 분노하여 깨뜨려버린 십계명 판을 하느님께서 다시 주셨다는 것이지요. 하느님께서는 당신이 선택하신 백성들을 위하여 이미 한번 하셨던 일을 또 하신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잘못을 반복하실 것을 아시면서도 하느님은 또 호의를 베푸십니다. 이런 하느님을 보면서 ‘하느님은 참 속도 없으시구나.’하는 생각이 듭니다. 여러분은 속없는 사람입니까, 아니면 한 성격하는 사람입니까? 혹 자신에게 저질러진 작은 잘못, 그것도 겨우 한번 겪게 된 잘못에도 “어떻게 나에게 그럴 수가 있어?” 하면서, 그렇게 한 사람의 마음과는 무관하게 완전한 결별을 잘도 선언하고 마는 나는 아닙니까? 속없는 하느님께서는 의노도 내리시지만 뉘우치는 마음을 헤아려 용서도 잘 베푸는 분이십니다. 하느님의 속없음을 배웁시다! 나에게 잘못한 이를 용서하기 힘들 때, 모세의 간청에 이은 고백을 나의 기도로 삼게 되기를 소망합니다. “내가 산 위에서 먼젓번처럼 밤낮으로 사십 일을 머물렀는데, 주님께서는 이번에도 나의 간청을 들어 주셨다. 주님께서는 너희를 멸망시키지 않기로 하신 것이다.”[신명 10,10] 하느님의 시험으로서의 유혹? “너희 가운데에서 예언자나 환몽가가 나타나 너희에게 표징이나 기적을 예고하고, 그가 말한 표징이나 기적이 일어나더라도, 너희가 알지 못하는 ‘다른 신들을 따라가 그들을 섬기자.’ 하고 그가 말하거든, 너희는 그 예언자나 환몽가의 말을 들어서는 안 된다.”(신명 13,2-4) 구약성경을 보면 가끔 참 예언자 뿐 아니라 거짓 예언자도 놀라운 표징이나 기적을 일으키는 경우가 있었지요. 모세는 그러한 경우라도 만일 그들이 하는 말에 잘못이 있는 경우, 그 말을 들어서는 안 된다고 한 것입니다. 즉 예언자가 일으키는 표징이나 기적보다 더 중요한 것이 바로 그 예언자가 전하는 메시지이니, 그 메시지의 내용을 보고 그대로 따를 것인지 말 것인지를 결정해야 한다는 것이지요. 모세는 이렇게 이스라엘 백성에게 “다른 신들을 따라가 그들을 섬기자.”라고 유혹하는 거짓 예언자들에게 넘어가지 말라고 경고하면서, 그러한 유혹이 있는 이유를 하느님께서 당신 백성을 ‘시험하기 위해서’라고 합니다. “그것은 주 너희 하느님께서, 너희가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여 주 너희 하느님을 사랑하는지 알아보시려고 너희를 시험하시는 것이다. 너희는 주 너희 하느님을 따르고 그분을 경외해야 한다. 그분의 계명을 지키고 그분의 말씀을 들으며, 그분을 섬기고 그분께 매달려야 한다.”(신명 13,4.5) 하느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이 당신을 모든 것 위에 사랑하고 섬기는지를 알아보고자 시험하시기 위해 의도적으로 유혹을 만드신 것이 아니라, 거짓 예언자들이 이스라엘 백성을 다른 길로 이끄는 그러한 유혹의 행위를 이스라엘 백성의 사랑과 충실성을 시험하기 위한 도구로 이용하신다는 것입니다. 우리 삶의 여정에서 하느님 아닌 다른 무엇이 나에게 더 매력적으로 다가올 수도 있습니다. “다른 신들을 따라가 그들을 섬기자.” 하는 유혹 속에 하느님을 향한 신앙이 흔들릴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이러할 때 유혹이 하느님께서 하시는 시험과 관련이 있다는 모세의 말을 생각해보면 어떨까요? 유혹에 직면해있는 가련한 나 자신을 [나를 시험하시는] 하느님께서 지켜보고 계시다고 생각하면 힘이 되지 않을까 하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나를 직접적으로 유혹의 길로 이끄실 리는 없지만, “하느님께서는 당신을 진심으로 사랑하고 공경하는 지를 알아보기 위해서 나에게 유혹을 허락하신다.”는 생각은 하느님의 현존 앞에 유혹에서 벗어날 힘을 줄 것이기 때문입니다. 모세는 이어서 이스라엘 백성 각자에게 말하기를, “다른 신들을 섬기러 가자.”라고 유혹하는 사람에게는 조금의 자비도 베풀지 말고 죽여야 한다 하였습니다. “너희의 동복형제나 너희의 아들이나 딸이나 너희 품의 아내나 너희 목숨과도 같은 친구가 은근히 너희를 꾀면서, 너희도 너희 조상들도 알지 못하던 ‘다른 신들을 섬기러 가자.’ 하는 경우가 있을 것이다. … 그런 경우에 너희는 그의 말을 받아들이지도 듣지도 말아야 한다. 그를 동정하지도 불쌍히 여기지도 말며 그를 감싸 주지도 말아야 한다. 너희는 오히려 그를 반드시 죽여야 한다.”(신명 13,7-10) 그렇게 해야 할 이유는 이러합니다. “그는 이집트 땅, 종살이 하던 집에서 너희를 이끌어 내신 주 너희 하느님에게서 너희를 떼어 내려고 하였기 때문이다.”(신명 13,11) 즉 다른 신들을 섬기자고 나를 유혹하는 자는 생명을 주시는 하느님에게서 나 자신을 떼어 내려는 끔찍한 일을 벌리려하는 것이니, 그런 자는 내가 목숨처럼 사랑하는 친구일지라도 죽여 마땅하다는 말이지요. 성당에서 가까이 지내던 사람들이 성당을 쉬고 있다거나, 남편 혹은 아내가 내가 성당 나가는 걸 싫어한다거나, 자식 눈치가 보여 성당 나가기 힘들다거나, 친하게 지내는 친구가 다른 종교를 갖고 있다거나 하는 이유 등으로 자신도 기꺼이[?] 냉담의 길에 들어서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나를 위한다는 이유로 다른 믿음의 길로 나를 유혹하는 친구가 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하다면 모세가 한 말을 한번 생각해 볼 일입니다. 물론 그를 죽이는 잘못을 범해서는 결코 안 될 일이고 그럴 수도 없는 일이지만, “그의 말의 받아들이지도 듣지도 말아야” 할 정도로 그를 경계하고 멀리해야 할 것입니다! 십일조의 목적 “너희는 해마다 밭에서 나는 모든 소출의 십분의 일을 떼어 놓아야 한다. 너희는 주 너희 하느님께서 당신의 이름을 머무르게 하시려고 선택하시는 곳에서, 너희의 곡식과 포도주와 기름의 십분의 일을, 그리고 너희의 소와 양의 맏배를 그분 앞에서 먹어야 한다.”(신명 14,22.23) 모세가 선포한 십일조(十一條) 규정에 의하면, 길이 멀어 십일조를 중앙성소(中央聖所)로 가져갈 수 없는 경우에는 그것을 돈으로 바꾸어 내야 했습니다. 그러면서 세 번째 되는 해에는 십일조를, 곧 그해에 난 소출의 십분의 일을 성안에 저장해 두었다가 따로 재산을 상속받지 못한 레위인들을 비롯하여 어렵게 사는 사람들에게 나누어줘야 했지요. 여기에 덧붙여 모세가 한 말입니다. “그러면 너희 성안에서, 너희와 함께 받을 몫도 상속재산도 없는 레위인과 이방인과 고아와 과부가 와서 배불리 먹게 될 것이다. 그러면 주 너희 하느님께서는 너희가 하는 모든 일에 복을 내리실 것이다.”(신명 14,29) 십일조 규정은 레위인을 비롯한 어려운 사람들을 돕기 위해 있는 것입니다. 이와 함께 십일조를 지켜야 하는 중요한 이유가 신명기 14,23에 언급되어 있습니다. “그러면 너희가 언제나 주 너희 하느님을 경외하는 법을 배울 수 있을 것이다.” 즉 십일조는 일차적으로 십일조를 내는 백성들에게 하느님을 경외하는 법을 가르치기 위해 제정된 규정이라는 것이지요. 십일조는 이스라엘 백성으로 하여금 12개 지파 중에 땅을 상속받지 못한 [하느님 예배에 종사하는] 레위지파 사람들과 어려운 이들을 돕기 위한, 그리고 무엇보다 하느님을 경외하는 법을 익히게 하려던 규정이었습니다. 많은 개신교회가 십일조를 교회를 위한 헌금의 기준으로 제시하고 있고 그러한 가톨릭 신부들도 가끔 있는 현실을 보며, 십일조의 규정을 오늘날 교회에 그대로 적용하는 것이 과연 논리적으로 합당하냐 하는 의문이 듭니다. 자칫 십일조는 교회를 배불리기 위한 것이나, 목사나 신부의 욕심을 채우기 위한 것으로 여겨질 우려가 있는 것입니다. 십일조란 우선적으로 하느님을 경외하는 법을 가르치려고 또 가난한 이를 도우려고 있다는 것을 잊지 맙시다! [월간 레지오 마리애, 2022년 6월호, 조현권 스테파노 신부(대구대교구 사무처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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