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 맛들이기] 유다인들과 사마리아인들의 관계 예수님의 공생활이 이뤄지던 당시 사마리아는 팔레스티나 북중부 지역으로 갈릴래아 바로 남쪽에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 사마리아는 주변보다 높은 곳에 세워진 도시였기에 적의 공격으로부터 방어하기가 쉬웠고, 지정학적으로 중요한 교통의 요지였습니다. 또한, 좋은 위치와 값진 곡물 등을 생산할 수 있는 비옥한 땅을 갖고 있었기에 경제적 번영을 누리기도 했습니다. 우리가 이방인 지역이라고 알고 있는 사마리아 지역은 본래 유다인들의 땅이었습니다. 사마리아인들도 이스라엘 민족의 한 분파였지만 역사적으로 유다인들과는 적대적인 관계에 있었습니다. 그들 반목의 역사는 구약 시대부터 생겨난 것으로, 그들 사이의 분열은 오래전부터 서서히 생겨나기 시작했습니다. 솔로몬 왕 이후 이스라엘은 남과 북으로 분열되었습니다. 북쪽 지역은 북이스라엘로, 남쪽은 남유다로 서로 다른 왕국을 세웠습니다. 이스라엘의 분열된 왕국은 모두 시간 차이를 두긴 하지만 비극의 역사로 끝나게 되었습니다. 기원전 722년경 북이스라엘 왕국은 아시리아에 의해 점령당하였습니다. 아시리아는 사마리아에 살던 이들을 이주시키며(2열왕 17,6) 정책적으로 그 땅에 이방인들이 살도록 했습니다(2열왕 17,24). 이러한 과정에서 사마리아는 이방 종교와 문화가 혼재되고(1열왕 16,32; 호세 7,1; 8,5-7 참조) 혼혈결혼이 성행하면서 민족의 순수한 혈통을 지키지 못했다는 비난을 받게 되었습니다(요한 4,1-42 참조). 그 이후 남유다 왕국 역시 기원전 587년경 바빌론의 침략으로 성전을 잃고 유배를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비슷한 역사적인 배경을 가졌던 이들이지만 바빌론 유배에서 돌아온 유다인들은 순수한 혈통을 지키지 못하고 혼합주의 종교를 받아들였다는 이유로 사마리아 사람들과 상종하기를 거부하였고, 그들이 보내온 예루살렘 성전 재건 참여도 거절하였습니다(에즈 4,1-3; 느헤 2,20; 4,1-2,5 참조). 이때부터 유다인들과 사마리아인들 사이에 놓인 적개심의 골은 더 깊어지기 시작해서 사마리아인들이 4세기경 ‘그리짐(Gerizim) 산’에 그들만의 성전을 세웠을 때 두 민족은 더는 화해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이런 사건 이후로 유다인들과 사마리아인들은 종교적으로도 서로 다른 길을 걷게 되고, 사마리아인들은 유다인들을 계속 적대시했고, 유다인들은 사마리아인들을 이방인처럼 취급하며 철저히 무시하고 경시했습니다. 예수님 시대에도 이러한 상황은 마찬가지였습니다. 사마리아인들을 이방인으로 여긴 유다인들은 갈릴래아에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갈 때도 사마리아 지역을 통과하는 것이 가장 빠른 길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지역을 지나지 않았을 정도였습니다. 이는 당시 유다인들은 사마리아 사람들과 접촉하거나 대화하는 것이 금지되었고, 사마리아인들이 언덕에 숨었다가 유다인들을 습격하는 일이 종종 벌어졌기 때문입니다. 비록 예수님께서 사도들이 사마리아인들에게 설교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으셨지만(마태 10,5), 사마리아인들을 항상 사랑으로 대하셨습니다(루카 10,30-37; 17,16; 요한 4,1-42).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과 유다인들에게 우선적으로 충실하셨지만(마태 15,24; 루카 13,34-35; 요한 4,22) 유다인들과 사마리아인들 사이에 가로놓인 장벽을 허물기 위한 노력도 아끼지 않으셨습니다. [2022년 7월 3일(다해) 연중 제14주일 수원주보 3면, 이승환 루카 신부(수원교구 복음화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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