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 속의 여인들] 향유를 부은 여인 대개의 사람들은 상식을 벗어난 일에 분노하며 합리적이고 객관적인 자세를 견지하려 노력하지만, 삶이란 게 상식적인 것만도 합리적인 것만도 아니라서 모순된 상황 앞에서는 혼란스러운 것도 사실이다. 예수의 머리에 향유를 부은 여인의 이야기가 그런 경우다. 상식에 벗어난, 그리하여 합리적이지 못한 일을 여인은 저지르고 만다. 사람들은 그 여인을 두고 이렇게 불평을 늘어놓는다. “왜 저렇게 향유를 허투루 쓰는가? 저 향유를 삼백 데나리온 이상에 팔아, 그 돈을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어 줄 수도 있을 터인데.”(마르 14,5) 향유 이야기는 예수를 죽이려는 음모(마르 14,1-2)와 유다의 배반(마르 14,10-11) 사이에 위치한다. 세상으로부터 거부당하고 죽어가는 예수의 이야기 서두에 여인의 이야기가 위치한다. 사람들은 예수의 수난을 기억하는데 부족했거나 무관심했다. 그렇다고 세상을 비난하며 메시아를 받아들이지 못한 무지를 탓할 수만은 없다. 향유가 돈의 가치로 계산된 것은 지극히 상식적이며 가난한 이들을 향한 관심 역시 존중받아 마땅한 합리적 판단이니 말이다. 그럼에도 세상의 상식과 합리성은 여인의 도유가 죽음이 아닌 생명의 시간에 버젓이 이루어진다는 사실에서 또 한번 무릎 꿇고 만다. 죽음을 애도하는 건 지극히 당연한 일이나, 산 사람의 죽음을 미리 예단하여 애도하는 건 모욕이며 저주에 가깝다. 장례를 위한 도유는 무덤에 있는 주검을 위한 상식적 행위이지 산 사람의 세상에선 이해될 수 없는 폭거나 마찬가지다. 이를테면 예수의 주검에 도유하기 위해 부활 아침 무덤을 찾은 여인들의 상식은 예수의 머리에 향유를 붓는 여인의 비상식과 대립한다(마르 16,1 참조). 예수는 여인의 도유를 이렇게 평가한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온 세상 어디든지 복음이 선포되는 곳마다, 이 여자가 한 일도 전해져서 이 여자를 기억하게 될 것이다.”(마르 14,9) 여인은 향유를 허투루 쓰는 게 아니라 향유를 특별히 사용했다. 이 특별성은 죽음을 복음으로 바꾸어내는 단초를 제공했고, 죽음과 관련된 행위가 기쁜 소식을 전하는 도구가 되리라는 비상식의 놀라움을 생산해냈다. 죽음과 생명을 굳이 갈라놓는 우리의 선입견 너머에 펼쳐지는 여인의 특별한 직관은 새 세상을 위해 거쳐야 할 관문인 셈이다. 죽음을 기쁨으로 고쳐놓고 마는 특별한 생각이 상식이 되는 세상, 우린 이런 세상을 하늘나라라고 부른다. 세상을 판단하고 세상을 바라보는 것은 객관적이거나 합리적일 수 없다. 사람은 각자가 보고 싶은 것, 듣고 싶은 것을 보고 들이니까. 상식과 합리성은 어쩌면 다수가 만들어놓은 폐쇄적 인식의 산물이 아닐까. 예수의 수난과 죽음은 다수가 기다려 온 메시아의 행보에 비추어보면 여전히 비상식적이며 비합리적인 사건일 수밖에 없다. 예수를 돈과 바꾸어 버린 유다의 경우가 세상의 눈엔 분명하고 마땅한 것일테니(마르 14,11). 그럼에도 세상엔 돈으로 환산되지 않는 가치가 있다. 그 가치 전복을 복음은 가르치고, 우리 역시 배우고 가르쳐야 한다. 폭력 안에서도 평화를 외치고, 불의한 일 안에서도 선을 지향하며, 심지어 악하고 더럽고 불편한 이들을 형제, 자매로 받아들일 줄 아는 넉넉한 마음을 깨치고 전하는 일이 신앙의 일이라는 사실은, 상식과 합리성에 기대거나 숨어지내는 우리의 비겁함과 안일함을 질타한다. 여인의 이름을 복음은 알려주지 않는다. 아마 그녀의 특별한 직관이 우리의 상식과 합리성을 밀쳐내고 우리의 이름으로, 우리의 구체적 삶으로 육화하기를 바라기 때문이 아닐까. 그 육화를 통한 그녀의 일은 지금 우리에게 낯선 기억일까, 기쁜 소식일까. 제 삶의 행복과 보람과 가치를 따지며 사는 우리는 진정 예수를, 그의 수난을 받아들이기는 하는 걸까. [2022년 7월 10일(다해) 연중 제15주일 대구주보 3면, 박병규 요한보스코 신부(대구가톨릭대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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