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행전을 따라가는 성경의 세계] 로마로 호송되는 여정의 도시들 (1) 시돈, 미라, 크리도스 - 시돈항구(BiblePlace.com) 카이사리아의 헤로데 궁전 감옥에 갇혀 있던 바오로는 예루살렘에서 대사제 하나니아스를 비롯한 원로들과 테르틸로스라는 법률가가 내려와 소송을 제기하면서 다시 펠릭스 총독 앞에 서게 됩니다. 이들의 고발 내용은 크게 두 가지입니다. 바오로가 나자렛 분파의 괴수로서 로마 제국 곳곳에 흩어져 사는 유다인들 사이에 소요를 부추기는 흑사병 같은 자라는 것과 로마 제국에서도 보호하는 예루살렘 성전까지 더럽히려고 했다는 것입니다(사도 24,1-9). 하지만 바오로는 이런 고발이 터무니없다고 변론합니다. 자신은 동족에게 자선기금을 전달하고 하느님께 제물을 바치려고 여러 해 만에 예루살렘에 돌아온 지 얼마 되지 않았으며, 예루살렘 성전에서든 회당에서든 성안에서든 누구와 논쟁하거나 군중의 소요를 일으키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뿐 아니라 자신을 고발하는 이들과 마찬가지로 자신도 조상들의 하느님을 섬기고 율법과 예언서에 기록된 모든 것을 믿으며 부활에 대한 희망을 품고 있다고 말합니다. 다만 한 가지는 시인합니다. 자신이 하느님을 섬기고 율법과 예언서의 기록을 믿으며 부활에 대한 희망을 품는 것은 고발자들이 ‘나자렛 분파’라고 부르는 ‘새로운 길’을 따라서라는 점입니다(사도 24, 10-21). - 카이사리아에서 열린 재판에서 변론하는 바오로(BiblePlace.com). 바오로의 변론을 들은 펠릭스 총독은 바오로를 카이사리아로 보낸 천인대장 리시아스가 내려오면 사건을 판결하겠다면서 공판을 연기합니다. 그러고는 “바오로를 지키되 편하게 해주고 친지들이 그를 돌보는 것을 막지 말라”고 백인대장에게 지시합니다(사도 24,22-23). 여기서 “친지들”은 바오로와 동행한 일행과 카이사리아의 신자들을 가리킨다고 하겠습니다. 며칠 후 펠릭스 총독은 아내 드루실라와 함께 와서 바오로를 불러내고는 예수님을 믿는 신앙에 관해 이야기를 듣고 이후에도 바오로를 자주 불러내어 이야기를 나눕니다. 바오로를 자주 불러내어 이야기를 나눈 것은 바오로에게서 돈을 받아내려는 마음도 있어서였습니다(사도 24,24-26). 펠릭스 총독이 원래 노예 출신인데 자유민이 되어 총독의 자리에까지 오른 인물임을 고려하면 능히 짐작할 수 있는 일입니다. 친지들이 바오로를 자유로이 돌볼 수 있게 한 것도 같은 이유에서였을 것입니다. 사실 펠릭스 총독은 새로운 길에 대해서는 아주 잘 알고 있었습니다(사도 24,22). 펠릭스 총독의 아내 드루실라는 예루살렘 교회를 박해해 야고보 사도를 처형한 헤로데 아그리파스 1세 임금(사도 12,1-2 참조)의 딸이었고, 헤로데 아그리파스 1세는 예수님께서 활동하시던 시기에 갈릴래아 영주였던 헤로데 안티파스의 조카였습니다. 따라서 펠릭스 총독은 아내 드루실라를 통해 나자렛 사람 예수에 대해 그리고 그 추종자들이 따르는 ‘나자렛 분파’ 또는 ‘새로운 길’에 대해 들었을 것이 분명합니다. 하지만 펠릭스 총독은 여러 차례 바오로를 불러내어 이야기를 나누면서도 그를 석방하거나 아니면 재판하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그냥 감옥에 가둬 둡니다. 유다인들의 환심을 사기 위해서였습니다. 이렇게 2년이라는 세월이 흐르고 포르키우스 페스투스가 펠릭스 총독의 후임으로 부임합니다(사도 24,27). - 카이사리아 항구(BiblePlace.com). 페스투스 총독이 부임해서 예루살렘에 올라가자 수석 사제들과 유다인 유력자들은 바오로를 예루살렘에 데려와 예루살렘에서 재판을 받게 해달라고 요청합니다. 데려오는 사이에 바오로를 없앨 심산이었습니다. 하지만 페스투스 총독은 이 요청을 거부하고 카이사리아에서 재판을 열겠다고 합니다. 고발자들은 하는 수 없이 페스투스 총독을 따라 카이사리아로 내려가서 여러 가지 죄목을 씌워 바오로를 고발합니다만 증거를 제시하지 못합니다. 페스투스 총독은 유다인들의 환심을 사려고 바오로에게 예루살렘에 올라가서 재판을 받기 원하느냐고 묻습니다. 바오로가 이를 거부하고 황제에게 상소하겠다고 하자, 페스투스는 고문들과 상의한 후 바오로의 황제 상소를 받아들입니다(사도 25,1-12). 며칠 후 총독에게 손님이 찾아옵니다. 아그리파스 임금과 그의 여동생 베르니케가 새 총독 페스투스에게 인사하러 온 것입니다. 이 아그리파스 임금은 아그리파스 1세의 아들인 아그리파스 2세로, 펠릭스 총독의 아내 드루실라의 오빠였습니다. 이들과 며칠을 함께 지내면서 페스투스 총독은 바오로 이야기를 꺼내고 아그리파스 임금은 바오로를 보고 싶어 합니다. 이렇게 하여 바오로는 아그리스파스 임금 앞에서 길게 변론합니다. 아그리파스 임금은 변론을 듣고 나서 바오로가 황제에게 상소하지 않았다면 풀려날 수 있었을 것이라고 페스투스 총독에게 말합니다(사도 25,13―26,32). 이리하여 바오로는 황제 앞에서 재판을 받도록 로마로 보내지게 됩니다. 바오로는 몇몇 수인들과 함께 황제부대의 율리우스라는 백인대장에게 넘겨져 배를 타고 로마로 압송되는 길에 오릅니다. 그 시기는 58년 여름 혹은 초가을쯤으로 추정됩니다. 바오로 일행이 탄 배는 소아시아(오늘날의 터키) 서쪽 끝 미시아 지방의 항구 도시인 아드라미티움에서 온 배였습니다. 소아시아 남서부의 여러 항구를 거쳐 가는 무역선이었습니다. - 육지에서 내려다본 크니도스 항구와 앞 바다. 바오로가 탄 배는 카이사리아를 출발해 이튿날 북쪽에 있는 시돈에 닿습니다. 백인대장 율리우스는 바오로가 “친구들”을 방문해 그들에게 보살핌을 받도록 허락합니다(사도 27, 1-3). 이 “친구들”은 시돈에 사는 신자들을 가리킵니다. 이들은 예루살렘 교회가 박해를 받으면서 흩어진 신자들이 페니키아 지방으로 가서 말씀을 전했을 때 신자가 된 이들일 것입니다. 시돈은 남쪽의 티로와 함께 구약성경에서도 여러 번 언급되는 고대 페니키아의 항구 도시입니다(1역대 22,4; 에즈 3,7; 유딧 2,28; 1마카 5,15; 예레 25,22 등). 예수님께서도 티로와 시돈 지방을 다니셨을 뿐 아니라 이 지방 사람들도 예수님 말씀을 듣기 위해 갈릴래아로 오기까지 했습니다(마르 7, 31; 루카 6, 17). 오늘날에도 레바논에서 세 번째로 큰 도시입니다. 시돈을 떠난 바오로 일행은 서쪽 지중해를 관통하지 않고 북쪽으로 올라가 키프로스 섬을 왼쪽으로 두고 돌아서 소아시아 남부 킬리키아와 팜필리아 앞바다를 거쳐 리키아 지방의 미라에 이릅니다(사도 27,4-5). 곧장 지중해를 관통하면 여름철에서 가을철에 부는 서풍 또는 북서풍과 맞부딪칠 위험이 커서 우회 길을 택한 것입니다. 산타클로스의 주인공 성 니콜라오(270~343) 주교로 유명한 미라는 당시 이집트의 곡물을 이탈리아로 실어 나르는 선박들의 기착지 역할을 하던 항구 도시였습니다. 백인대장은 미라에서 이탈리아로 가는 알렉산드리아 배를 만나 바오로 일행을 그 배에 옮겨 태웁니다. 바오로 일행을 태운 배는 여러 날 동안 느리게 이동하여 간신히 크니도스 앞바다에 다다릅니다. 서쪽에서 불어오는 맞바람으로 인해서 항해가 쉽지 않았기 때문입니다(사도 27,6-7ㄱ). 크니도스는 소아시아 남서쪽 반도에 있는 항구 도시입니다. 고대에는 크니도스 앞바다에 섬이 있었으나, 이 섬은 오늘날 둑으로 연결돼 반도를 이루고 있고 둑 양쪽으로 나뉘어 남쪽에는 상업 항구가, 북쪽에는 군항이 있습니다. 바오로 일행이 탄 배는 크니도스 앞바다에서 남쪽으로 방향을 틀어 크레타섬 동북쪽 끝 살모네 쪽을 향하여 내려갑니다(사도 27,7ㄴ). 이후 여정에 대해서는 다음 호에서 계속 살펴봅니다. [월간 레지오 마리애, 2022년 7월호, 이창훈 알퐁소(전 평화신문 편집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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