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느님 뭐라꼬예?] 약한 이들을 돌보시는 구원의 하느님 나무에 매달린 죄인 “죽을죄를 지어서 처형된 사람을 나무에 매달 경우, 그 주검을 밤새도록 나무에 매달아 두어서는 안 된다. 반드시 그날로 묻어야 한다. 나무에 매달린 사람은 하느님의 저주를 받은 자이기 때문이다.”(신명 21,22.23) 죄인을 처형하여 나무에 매다는 것은 이스라엘의 율법에서 볼 때 정당한 것이었고, 그 주검은 밤이 되면 땅에 묻는 것이 당연했습니다. 예수님도 이러한 관습에 따라 나무에 매달려 돌아가셨고 그날로 장사 지내게 된 것이지요. 즉 예수님께서 당하신 십자가형은 로마시대에 행해졌던 극악무도한 죄인에 대한 형벌이었지만, 어디까지나 유다인들에게는 죽을죄를 지은 죄인에게 율법에 따라 내려졌던 벌로서 관습에 따라 응당 내려진 처벌이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그러한 형벌을 어쩔 수 없어서가 아니라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하여 기꺼이, 자원하여 당하셨습니다. 즉 스스로 중죄인이 되시어 십자가 나무 위의 죽음을 받아들이신 것입니다. 이렇듯 예수님은 스스로 ‘죄인의 십자가’ 위로 올라가신 ‘나무 위의 하느님’이시고 ‘구원의 하느님’이셨습니다. “그날은 준비일이었고 이튿날 안식일은 큰 축일이었으므로, 유다인들은 안식일에 시신이 십자가에 매달려 있지 않게 하려고, 십자가에 못 박힌 이들의 다리를 부러뜨리고 시신을 치우게 하라고 빌라도에게 요청하였다.”(요한 19,31) 유다인들의 관습에 따라 예수님의 주검은 돌아가신 날 저녁때 바로 내려져 (예수님의 제자였던) 아리마태아 사람 요셉의 새 돌무덤에 모셔졌습니다. 예수님이 처형되신 다음날, 수석사제들과 바리사이들은 함께 빌라도에 가서 이렇게 말했지요. “나리, 저 사기꾼이 살아 있을 때, ‘나는 사흘 만에 되살아날 것이다.’ 하고 말한 것을 저희는 기억합니다. 그러니 셋째 날까지 무덤을 지키도록 명령하십시오. 그의 제자들이 와서 시체를 훔쳐 내고서는, ‘그분은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되살아나셨다.’ 하고 말할지도 모릅니다.”(마태 27,63.64) 이렇게 하여 (성전) 경비병들이 무덤을 지켰지만 예수님의 부활을 인간의 힘으로 막을 수 있는 성격의 일이 아니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사람들이 나무에 매달아 죽인 예수님을 다시 일으키셨습니다.[사도 5,30 참조]바오로 사도의 표현에 의하면,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져야 할 율법의 저주를 대신 지시고 그 저주에서 우리를 풀어주셨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위하여 스스로 저주받은 몸이 되시어, 우리를 율법의 저주에서 속량해 주셨습니다. 성경에 ‘나무에 매달린 사람은 모두 저주받은 자다.’라고 기록되어 있기 때문입니다.”[갈라 3,13] 우리의 죄를 대신 지고 십자가의 죽음을 겪으신 구원의 예수님께 감사드리며, 그분께서 원하시는 의로운 삶을 살아가도록 합시다! 약한 이들의 보호자이신 하느님 “너희는 이방인과 고아의 권리를 왜곡해서는 안 되고, 과부의 옷을 담보로 잡아서도 안 된다. 너희는 너희가 이집트에서 종이었고, 주 너희 하느님께서 너희를 거기에서 구해내신 것을 기억해야 한다.”(신명24,17) 하느님께서 이집트에서의 종살이에 시달리던 이스라엘 백성을 구해주셨으니, 그 백성은 자신의 땅에 함께 사는 이방인과 고아와 과부를 돌보아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신명기는 이렇듯 이집트 탈출을 상기시킴으로써, 공동체에서 이방인을 제외시키려는 편협한 삶의 태도를 없애려고 노력합니다.”(주석성경 구약, 신명기 입문, 436쪽) (비단 이방인이 아니어도) 넓게는 가난한 이들을 존중하라는 이러한 신명기의 규정은 갈수록 더 부유해지는 부유층과 갈수록 더 비참해지는 서민층 간의 괴리(乖離)를 극복하고자 합니다. 즉 백성의 일치가 사회적 불평등으로 위태롭게 되지 않도록, 이스라엘 자손들은 원래 이집트에서 고생하던 한 형제였음을 상기하여 가난한 이들을 위하여 함께 애쓰자는 것입니다. 어려운 이들을 돌보아야 한다는 신명기의 규정은 앞에서 본 14장의 ‘십일조 규정’ 외에도 15장의 ‘빚을 탕감해 주는 해에 대한 규정’ ‘가난한 이들에 대한 규정’ ‘빚 때문에 종이 된 이를 놓아주는 규정’, 23장의 ‘남의 포도나 곡식에 관한 규정’, 24장의 ‘담보물에 관한 규정’ ‘품삯에 관한 규정’ 등에도 반영되어 있습니다. 십일조 중 ‘해마다 바치는 (십일조) 규정’ 외에 ‘세 해의 끝 마다 바치는 (십일조) 규정은 뒤에 다시 강조됩니다. “너희는 세 해마다 십일조를 바칠 때에 너희 소출에서 십분의 일을 모두 떼어 놓고, 그것을 레위인과 이방인과 고아와 과부에게 주어 그들이 너희 성안에서 배불리 먹게 될 때, 너희는 주 너희 하느님 앞에서 이렇게 말해야 한다. ‘저희는 거룩한 것을 저희 집에서 떼어 놓아, 그것을 당신께서 저희에게 명령하신 모든 계명대로 레위인과 이방인과 고아와 과부에게 주었으며, 당신의 계명을 하나도 어기지 않고 잊지도 않았습니다.”(신명 26,12.13) 가난한 이를 돌보라는 말씀은 구약에서부터 시작하여 예수님과 사도들을 비롯하여 초대교회 때부터 강조해 왔던 준엄한 명령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주어라. 그러면 너희도 받을 것이다. 누르고 흔들어서 넘치도록 후하게 되어 너희 품에 담아 주실 것이다.”[루카 6,38] 최후의 심판 때에 하신다는 사람의 아들의 말씀을 새기고 살아야 할 것입니다. “너희가 내 형제들인 이 가장 작은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준 것이다. … 너희가 이 가장 작은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 주지 않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주지 않은 것이다.”[마태 25, 40-45] 정확하고 올바른 기준 “너희는 자루에 크고 작은 두 개의 저울추를 가지고 있어서는 안 된다. 너희는 집에 크고 작은 두 개의 되를 가지고 있어서는 안 된다. 너희는 정확하고 올바른 저울추를 가지고 있어야 하며, 정확하고 올바른 되를 가지고 있어야 한다.”(신명 25,13-15) 어떤 물건의 무게와 양을 정확히 재는 것은 상거래의 기본에 속하는 일입니다. 신명기는 물건을 팔 때 저울로 정확하게 무게를 측정하고, 물건에 대한 값을 지불할 때에도 저울로 그 무게를 올바르게 달아야 한다는 원칙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정확한 크기와 무게를 가진 올바른 되와 저울추를 사용하면 하느님께서 주시는 땅에서 오래 오래 살면서 축복을 받으리라는 것입니다. 남과 더불어 살아가야 하는 우리 그리스도인은 다른 사람과의 만남에도 (일반사람보다) 더 정확하고 올바른 기준을 가져야 할 것입니다. 남을 대할 때 나의 기준이 그때그때 달라서는 제대로 관계를 맺을 수가 없는 것이지요. 더구나 나의 짧은 잣대로 남의 깊은 속을 심판한다는 것은 경솔하기 그지없는 일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이 들리지 않습니까? “너희가 심판하는 그대로 너희도 심판받고, 너희가 되질하는 바로 그 되로 너희도 받을 것이다.”[마태 7,2] [월간 레지오 마리애, 2022년 8월호, 조현권 스테파노 신부(대구대교구 사무처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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