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 속의 여인들] 마리아 막달레나 2, 3세기에 등장한 외경들 중, 마리아 복음서나 필립보 복음서 등은 마리아 막달레나를 회개한 창녀로 소개하거나 예수의 제자 중 가장 사랑받는 제자로 서술한다. 교회의 역사 안에서 마리아 막달레나에 대한 소문은 다양하게 펼쳐졌고 다양한 만큼 선을 넘는, 그래서 다수의 신앙인이 불쾌하게 여기는 소문까지 횡행했다. 예컨대 마리아 막달레나가 실은 예수의 정부(情婦)였다는 소문까지. 그러나 정경으로 인정된 복음서들은 소문에 침묵하고 소문의 전파에 절제한다. 오히려 마리아 막달레나를 예수로부터, 예수에 의해 자유롭게 된 존재로 소개한다. 특별히 루카복음서는 예수를 따르는 여인 중 하나로, 일곱 마귀로부터 떨어져 자유롭게 된 마리아 막달레나를 언급한다(루카 8,1-3). 일곱 마귀를 두고 마리아 막달레나의 과거를 어둡게 채색하고 굳이 창녀까지 언급하는 건, 지금 예수를 따르는 이들에 대한 모독이다. 현재와 미래의 구원의 가치를 섬세하게 살피지 않은 채 과거의 부족함과 나약함을 끄집어내는 건 폭력이며 무지다. 더불어 어두운 과거에서 벗어나 현재의 반듯한 모습으로 변화했다는 식의 셀프 회개론은 예나 지금이나 앞으로도 세상 모든 피조물을 자비로운 눈으로 관조하시는 구원의 하느님에 대한 모독이며 불신이 된다. 무엇보다 루카 복음서는 구원의 현재화를 강변한 대표적인 글이다. 남자가 되었건 여자가 되었건, 죄인이든 의인이든, 창녀든 성녀든 구원의 시대는 모두가 기뻐해야 하고 행복해야 한다. 그래서 루카복음서는 당시의 관습에 정면으로 도전하듯 마리아 막달레나를 언급한다. 스승을 따라 길을 나서는 것이 여인에게 금기시되었던 시절, 마리아는 예수를 따랐고 예수는 마리아를 품었다. 당연시 여겨졌던, 그것으로 현재를 옥죄고 미래를 감금시켰던 인식의 완고함을 마리아 막달레나를 통해 루카복음서는 산산이 부수고 있다. 복음서들은 또한 마리아 막달레나를 예수의 수난과 죽음, 그리고 부활의 시간 안에 등장시킨다. 복음서 이야기가 절정에 다다른 곳이 예수의 수난 사건인데, 세상의 중대사에 중심으로 서있(어야만 한다고 우기)는 남자가 아닌, 세상의 가장자리에 맴돌던 여자를 등장시킨다는 건 특별하다. 요한복음서는 예수와 믿는 이들이 참된 가족으로 거듭나는 십자가의 자리에 마리아 막달레나와 다른 여인들을 배치하고 있다.(요한 19,25-27) 요한복음서는 한걸음 더 들어가, 부활한 예수를 마리아 막달레나 홀로 만나게 한다. 예수의 시신을 찾으러 온 마리아는 울었다. 살과 피의 한계성에 머물렀던 예수가 십자가를 통해 부활의 자유로운 세상으로 이미 건너간 시간, 마리아는 여전히 울음으로 대변되는 인간의 한계성 안에 갇혀 있다.(요한 20,14-16) 그때, 예수는 마리아를 부른다. ‘마리아야!’ 마리아는 응답한다. ‘라뿌니(나의 스승님)!’ 목자를 따르는 양은 목자의 목소리를 알아듣는 법이다.(요한 10,3) 목자의 목소리에 화답하며 따라 나서는 양들은 푸른 목초 위를 마음껏 뛰놀며 자유로운 세상을 만끽한다. 중세 때, 믿는 이들은 마리아 막달레나를 사도들 중의 사도라고 불렀다. 파견된 이라고 번역되는 사도, 아포스톨로스(ἀπόστολος)는 떠날 줄 아는 자유로운 영혼을 지닌 사람이다. 진정한 신앙은 삶의 궤적과 방식에 담백하고 소박한 자세로 임하며 언제든 제 삶의 자리를 망각하고 떠나는 것이 곧 얻는 것임을 깨닫는 것이 아닐까. 과거의 일곱 마귀로부터, 남자 중심의 권위적이고 보수적인 세상으로부터, 나아가 인간 그 자체의 한계로부터 온전히 자유롭게 된 마리아 막달레나가 사도들 중의 사도임은 명백하다. 그래서 창녀였다 해도, 예수의 정부였다 해도, 우린 마리아 막달레나 앞에서 옷깃을 여미고 공경과 추앙과 흠숭을 드려야 마땅하다. [2022년 9월 11일(다해) 연중 제24주일 대구주보 3면, 박병규 요한보스코 신부(대구가톨릭대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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