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 그리스도의 조상들] 요시야(2열왕 22,1-23,30; 2역대 34-35) “요시야에 대한 기억은 향 제조사의 솜씨로 배합된 향과 같다. 그것은 누구의 입에나 꿀처럼 달고 주연에서 연주되는 음악과 같다.”(집회 49,1) 후대에 이토록 아름다운 찬사를 받는 임금이 또 있을까요. 집회서 저자는 다윗과 히즈키야와 더불어, 평생 경건함을 지켰고 온 백성을 회개시켜 하느님께로 이끈 요시야 임금(기원전 640~609년 재위)을 한껏 칭송합니다.(집회 49,1-4) 히즈키야의 종교개혁 이후, 므나쎄와 아몬 두 임금은 다시 바알 제단과 산당을 짓고 자식을 불살라 바치는 등 지독한 우상 숭배로 돌아섰습니다. 아몬이 재위 2년 만에 신하들의 모반으로 죽임을 당하자, 백성은 여덟 살의 어린 요시야를 임금으로 세웠습니다. 숫자 ‘8’은 다윗(여덟째 아들)과 예수님(그리스어 예수스 ΙΗΣΟΥΣ : 숫자로 888)을 떠올리게 하는데요, 백성이 손수 세운 임금이라는 점에서도 요시야는 조상 다윗을 닮았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요시야가 태어나기 약 삼백여 년 전에, 그가 더럽혀진 하느님의 성소를 정화하고 그릇된 경신례를 다시 세울 사람이라고 앞서 예고하셨습니다.(1열왕 13,1-2) 요시야는 열여섯 살에 하느님을 열렬히 찾았고, 스무살에는 선대로부터 내려오던 종교 혼합주의를 혁파하고 유다와 예루살렘을 정화했습니다.(2역대 34,3-7) 그가 스물여섯 살이 되던 해에는(기원전 622년) 기념비적 사건이 있었는데, 대사제 힐키야를 감독으로 세워 성전을 보수하던 중 하느님의 ‘율법서’를 발견한 일이었지요.(2열왕 22,3-20) 요시야는 사판 서기관이 낭독하는 율법을 듣고서 너무나 참담하여 자기 옷을 찢으며 애도했습니다. 그 오랜 세월을 모두가 하느님의 뜻과 계명을 까맣게 잊고 엉뚱하게 살아왔음을 절실히 깨달았기 때문이었지요. 요시야는 모든 원로들과 백성을 성전으로 불러 율법서를 들려주었고, 마침내 온 백성은 그 말씀대로 살기로 하느님과 계약을 맺고 함께 파스카 축제를 지냈습니다. 그리고 요시야는 이 율법서를 지침으로 삼아, 즉시 대대적인 종교개혁을 단행했습니다. 그는 이교 산당과 신상들을 허물고 지방 성소의 사제들과 예배를 폐하여 예루살렘 중앙 성소의 권위를 공고히 하고 야훼 신앙의 순수성을 회복했습니다. 요시야가 이교 잔재를 씻어내는 과정을 표현하는 단어들은 ‘허물다’, ‘태우다’, ‘가루로 만들다’, ‘내쫓다’, ‘죽이다’ 등(2열왕 23,4-20) 아주 과격하지만, 이는 하느님께로 돌아가는 우리의 회개와 쇄신 또한 결코 적당할 수 없음을, 언제나 기민하고 완전해야 함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기원전 609년에 요시야는 아시리아를 도우러 북진하던 이집트 군대를 막다가 므기또에서 전사합니다.(2열왕 23,28-30) 역대기 저자는 요시야가 하느님의 뜻을 어기고 출정했기 때문이라고 하는데(2역대 35,21-22), 이는 성왕이 요절한 일을 해명(?)하려는 역사가들의 의도로 이해됩니다. 사실 요시야는 북왕국의 수도였던 사마리아와 베텔을 장악하고 전국적인 종교개혁까지 단행하여 통합 이스라엘의 재건을 눈앞에 두고 있었습니다. 열강에 휘둘리면 또다시 종교와 정치 모든 면에서 무너질 수밖에 없는 현실 속에서, 늘 유다를 박해해 온 아시리아가 이집트의 원조로 다시 세력을 되찾는 일도, 이집트의 대군이 이스라엘 땅을 헤집고 지나가는 일도 허락할 수 없었을 요시야의 심정을 헤아려 봄 직합니다. 요시야의 개혁과 영적 쇄신은 하느님의 뜻과 계명이 담긴 율법서(성경)를 확고한 기준으로 삼았기에 가능했음을 기억합니다. 가끔은 하느님의 뜻을 찾지도 않은 채로 저 혼자 자책하고서는 엉뚱한 길로만 자꾸 또 되돌아가곤 하는 어리석음을 경계해야겠습니다. 요시야와 함께 우리 마음속 성전 깊이 잠들어 있던 하느님 말씀을 깨워, 하느님의 뜻을 찾고 그에 따라 살아가는 구원의 일상을 이어갑시다. [2022년 9월 18일(다해)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와 성 정하상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들 대축일 경축 이동 대구주보 3면, 강수원 베드로 신부(대구가톨릭대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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