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는 매년 대림시기 전례를 거행하면서 실제로 메시아를 기다린다. 신자들은 구세주의 첫 번째 오심에 대한 오랜 준비에 참여함으로써 그분의 재림에 대한 열렬한 소망을 새롭게 한다. 교회는 ‘선구자’(세례자 요한)의 탄생과 순교를 기념하여 그의 소망과 일치한다. 그분은 커지셔야 하고 나는 작아져야 한다.’”(「가톨릭교회 교리서」524항) 한편, 예수님께서는 설교 중 당신의 영광스러운 재림과 동시에 일어날 마지막 날의 심판을 예고하셨다. “그때에는 각자의 행동과 마음속의 비밀이 드러날 것이다. 그때에는 하느님께서 주신 은총을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여긴 고의적 불신이 단죄받을 것이다. 이웃에 대한 태도에서 은총과 하느님의 사랑을 받아들였는지 아니면 거부했는지를 알아볼 수 있을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마지막 날에 말씀하실 것이다. ‘너희가 내 형제들인 이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준 것이다.’”(「가톨릭교회 교리서」678항; 마태 25,40)
재림(再臨)의 어원인 라틴어 Parusia(파루시아)는
세상 마지막 날에 최후 심판을 위해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다시 오심을 의미하는 용어다.
초대교회 신자들은 예수님의 부활과 승천 후…
세상을 정의로 심판하시고 다스리시기 위해
주님께서 곧 영광스럽게 다시 오실 것을 고대한다.
임박한 주님의 재림을 기다리는 초대교회 신자들은
선한 행실과 금욕적인 공동체 생활로 그날의 심판에 대비하는데 …
“신자들은 모두 함께 지내며 모든 것을 공동으로 소유하였다.
그리고 재산과 재물을 팔아 모든 사람에게
저마다 필요한 대로 나누어 주곤 하였다.”(사도 2,44-45)
그러나 … 시간이 흘러도 주님은 오시질 않고
초조해진 제자들은 생전에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들을
차근차근 다시 기억해 보기 시작한다.
“그 날과 그 시간은 아무도 모른다. 하늘의 천사들도 아들도 모르고
오로지 아버지만 아신다, …
그러니 너희도 준비하고 있어라.
너희가 생각하지도 않은 때에 사람의 아들이 올 것이기 때문이다.”(마태 24,36-44)
이렇게 재림의 당도는 확실하지만
그 시간은 미공개로 남아 있음을 깨달은 제자들
재림의 의미를 심도 있게 재해석해 다다른 결론은 …
재림 때 일어날 현상과 그 시간을 궁금해 하기보다,
주어진 현실에서 생활의 회개와 사랑의 실천을 강조하며
종말을 기다리는 맞갖은 삶으로 깨어 있는 신앙을 간직하자!
결국, 초대교회 신자들은 초초함을
점차 희망으로 승화시켜 가고
재림과 심판은 단지 미래에 이루어질 사건이 아니라,
‘오늘’ 이 자리에서 시작되어 ‘마지막 날’에
비로소 완성될 것임을 고백하기에 이른다.
‘이미’와 ‘아직’ 사이에 흐르는 팽팽한 긴장감 …
오히려 그리스도인들의 삶을 더욱 생명력 있게 만들고
종말신앙이라는 이름으로 ‘구원의 희망’을 세상에 드러낸다.
01 그리스도의 재림을 기다림
깨어 기다린다는 것
재림(parusia)은 세상 마지막 날에 최후심판을 위해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다시 오심을 의미하는 용어다. “비록 ‘그때와 시기는 아버지께서 당신의 권한으로 정하셨으니 너희가 알 바 아니지만’(사도 1,7) 승천 이래 그리스도의 영광스러운 재림은 임박해 있다. 이 종말론적 사건과 그에 앞서 닥칠 마지막 시련은 비록 ‘유보’되어 있기는 해도 언제라도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이다.”(.”(「가톨릭교회 교리서」 673항)
순례하는 지상 교회는 ‘이미’ 실현된 구원과, 아울러 세상 끝 날 구세주요 심판자로 다시 오시어 구원을 완성하는 때까지 ‘아직’이라는 긴장 관계 속에서 살아간다. 그렇다면 신앙인들은 ‘아직’ 다가오지 않은 하느님 나라를 위해 무엇을 하며 기다릴 것인가? 현세를 살아가는 신앙인들에게 있어 ‘대림’과 ‘재림’의 의미는 ‘깨어 기다림’과 ‘맞갖은 준비’의 자세를 일깨워 주고 있다. “깨어 기다린다는 것‘은 하느님을 두려워하여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뜻이 담겨 있는 복음에 충실하고, 참을성 있게 행동으로 옮기는 것이다. 그리고 ’맞갖은 준비‘는 하느님을 뵙고 그분의 축복을 온전히 받기 위해 보속, 속죄, 자선, 검소한 생활, 자기절제와 희생, 봉헌 등의 삶을 살아가려고 노력하는 것이다.
구약의 하느님 백성이 기다린 ‘주님의 날’
구약에서는 그리스도의 ‘이중내림’(二重來臨), 즉 ‘첫 번째 오심’(강생)과 ‘두 번째 오심’(再臨)을 분명히 구별하지 않지만 하느님의 오심을 언급하는 구절이 여러 번 등장한다. 하느님께서 오시는 ‘주님의 날’에 악인들은 자신들의 죄로 처벌될 것이고, 반대로 주님을 믿고 고백하는 사람들은 구원될 것이다. 따라서 죄인들에게 이날은 두려움의 날이고(아모 5,18-20; 예레 23,19), 선인들에게는 구원과 해방의 날이 된다. 이러한 맥락에서 구약의 하느님 백성은 희망을 가지고 ‘주님의 날’을 기다렸는데, 이 평화의 실현이 다니엘서에 이르러서는 “마지막 때”에 오실 종말론적 메시아와 관련되어 있다. 묵시문학적 사고에 의하면 심판의 날에 하느님을 대신해 오실 분이 계신데, 그분이 바로 ‘사람의 아들’이다.
‘사람의 아들의 오심’을 언급한 다니엘서 7장은 공관 복음서가 언급하는 사람의 아들 개념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친다.
신약시대 재림의 임박설과 지연 문제
재림에 대해 언급하는 신약성경의 부분들이 예수님께서 직접 하신 말씀인지 아니면 초대교회 공동체가 만든 말인지를 구별하기 어렵지만, 개념을 개괄하면 다음과 같다.
공관 복음서의 재림(마태 24-25장; 마르 13장; 루카 21장)은 예수님께 ‘사람의 아들’이라는 개념을 통해 구원자인 동시에 심판자로서의 모습을 적용하고 있다.
공관 복음은 사람의 아들이 재림할 때 있을 여러 현상들을 공통적으로 소개한다. 사람의 아들은 하늘의 구름을 타고, 큰 권능과 영광을 갖추고 오며, 재림이 있기 전에는 여러 가지 우주적 징조가 나타난다. 이후 사람의 아들은 하늘의 옥좌에 앉아 모든 민족을 심판할 것이다(마태 25,31-33). 공관 복음은 재림이 곧 ‘당도’할 것으로 보도하고 있지만, 그 임박한 재림이 언제 이루어지는 것인지에 대해서는 미공개된 개념으로 남겨 둔다. 더욱이 이에 대해서는 사람의 아들 자신도 알지 못하고, 오직 아버지만이 알고 계신다(마태 24,36). 그래서 예수님은 언제, 어디서든 깨어 있을 것을 권고하신다(마태 25,1-13; 마르 13,32 ‘열 처녀의 비유’).
* 마르코 복음사가에 의하면
재림은 매우 임박한 사건으로 이 세대가 지나가기 전에 이루어질 사건이었다(마르 13,28-31). 그러므로 그보다 앞서 이루어져야 할 일을 소개하고 있는데, 만민을 위한 복음 선포가 그것이다(마르 13,10). 이는 재림의 지연 문제를 ‘선교’라는 주제로 해석하고, 그 긴박성을 해소하려는 마르코의 신학적 성찰의 결과다.
* 마태오 복음사가는
재림의 지연 문제(마태 24,48)를 늘 준비하고 깨어 있으라는 사목적 경고를 통해 완화하고 있다. 마태오 복음만 언급하는 ‘최후 심판’(마태 25,31-46)은 이 심판이 백성 전체를 대상으로 이루어진다는 것을 명시하고 있다. 여기에서는 이웃에 대한 관심과 정의구현 여부가 심판의 중요한 주제로 등장한다. 이러한 관점은 종말 개념을 보다 현재적 관점에서 이해하고 강조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 루카 복음사가는
“너희를 떠나 승천하신 저 예수님께서는, 너희가 보는 앞에서 하늘로 올라가신 모습 그대로 다시 오실 것”(사도 1,1) 이라고 승천과 재림의 동일성을 강조함으로써 재림을 구세사적 역사관에 입각해 해석한다. 즉 세상 종말에 이루어질 사건은 파괴와 소멸로 인한 다른 세상의 도래가 아니라 일종의 ‘복원’으로서의 사건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차원에서 종말 사건은 현 세상의 파괴로 이루어지는 역사의 단절이 아니라, 역사 속에서 점진적으로 이루어지는 완성이며 창조 사건의 연장이라 할 수 있다.
* 요한 복음사가는
주님의 재림(요한 14,3)과 부활, 심판을 전면에 부각시킨다. 이러한 요한의 종말론적 희망은 이미 부활했고(요한 11,25-26) 심판도 받은(요한 3,19) 신자들에게 부여된 영원한 생명(요한 3,15)에 바탕을 둔다. 그래서 현대 신학은 요한복음의 특징으로 ‘현재적 종말론’을 들고 있다. 즉 주님이 오시는 그날은 매일의 삶 속에 있는, 바로 지금 여기에서 개인의 신앙적 결단 속에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이다.
사람의 뱃속과 심장을 달아 보시는 분
“그리스도께서는 영원한 생명의 주님이시다. … 아들은 심판하러 오신 것이 아니라 구원하러 오셨으며, 당신 안에 있는 생명을 주려고 오셨다. 이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 은총을 거절한 사람은 저마다 이미 자기 자신을 심판하는 것이며, 각자가 한 일에 따라 받을 뿐 아니라, 사랑의 성령을 거부함으로써 스스로 영원한 저주를 자초하게 된다.”(「가톨릭교회 교리서」 678항) |
성경에 따르면, 그리스도께서는 하느님 나라 복음 선포에 대한 사람들의 감정 및 행위에 대해 판결을 내리고, 역사 가운데에서 그리고 인간 역사의 종말에 사람들을 심판할 것이다. 구약에서 심판의 기준은 ‘율법’이었지만, 신약에서는 복음 그 자체인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왜냐하면 최후에 인간의 영원한 운명을 결정하는 것은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선포하신 복음에 대한 인간의 태도에 달려 있기 때문이다(로마 8,1 참조).
이스라엘 백성의 신앙에 의하면 하느님은 온 세상의 재판관이시다. 또한 하느님은 창조주이시므로 만물의 주인이시다. 따라서 그의 재판은 제한이 없으며, 선과 악을 최종적으로 결정하시는 분으로서 선과 악 사이의 분별에 결코 실수하지 않으신다(창세 2,17; 3,4; 1열왕 3,9). 나아가 하느님은 겉모양뿐만 아니라 사람의 뱃속과 심장을 달아 보시는 분으로서, 사람의 가슴속 은밀한 생각까지도 모두 꿰뚫어 보신다(욥 22,13; 예레 11,20; 로마 2,16 참조).
한편, 유배 이후 예언자들은 하느님의 결정적인 구원에 앞서 모든 죄인과 하느님을 대적하는 원수에 대한 최후의 심판에 대해 자주 언급했다. ‘주님의 날’로 일컬어지는 이날의 심판은 하느님께서 온 세상을 불로 심판하실 것이다(이사 66,8). 그러나 사실상 최후의 심판은 형식적인 절차일 뿐이다. 왜냐하면 사람들의 행위는 하늘의 책에 이미 다 기록되어 있으므로 그들은 자신들의 공과에 따라 심판받기 때문이다. 이때 의인들은 하느님의 보호를 받겠지만 죄인들에게는 공포의 날이 될 것이다(아모 5,18-20; 지혜 4,15-16).
산 이와 죽은 이를 심판하러 오시리라 믿나이다
초대교회 신자들은 그리스도의 재림을 하느님이 개입하시어 악인들을 단죄하는 심판의 날, 곧 ‘주님의 날’(1코린 1,8)이라 생각했다. 당시 그리스도인들은 주님께서 심판하실 날인 재림이 곧 일어날 것이라고 보았기에(임박한 재림사상), 선한 삶을 살아야 하고 악을 행하면 반드시 벌을 받는다는 것을 강조했다. 또한 그들은 이를 되새기기 위해 주일마다 공동체와 더불어 성찬례를 거행하며 “… 그리로부터 산 이와 죽은 이를 심판하러 오시리라 믿나이다.”라는 신앙을 고백했다.
따라서 모든 인간은 그분 앞으로 나아가 자신의 행위에 셈을 바칠 것이다. 그러나 인간을 사랑하신 하느님은 스스로 인간이 되시어 이 세상에 오셨다. 그리스도가 육화한 것은 심판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인간들의 구원을 위한 것이다(요한 3,17; 8,16). 비록 예수님은 인류의 구원자로 이 세상에 왔지만, 사람들 각자는 그분에 대하여 취하는 태도에 따라 심판을 받게 된다. 결국 심판이란 하느님께서 내리시는 판결이라기보다는 자비하고 정의로우신 하느님 앞에서 인간의 온 삶이 드러나는 것이다. 그래서 최후의 심판은 각자의 마음속 깊이 이미 이루어진 판가름을 환하게 드러낼 뿐이다.
마태오 복음 25장에서 예수님은 마지막 심판에 대해 비유로 말씀하셨다. 사람의 아들은 재림할 것이며, 영광스러운 옥좌에 앉을 것이고, 모든 나라들은 그 앞에 불려올 것이다. 그리고 그는 양을 염소와 구분하듯이 그들을 갈라놓을 것이다. 이웃에게 사랑을 베푼 사람들은 영원한 생명을 받을 것이며, 그렇지 못한 사람들은 영원히 벌 받는 곳으로 던져질 것이다. 결국, 얼마나 사랑했느냐가 심판대에서 판가름의기준이 된다.
사심판과 공심판
사심판은 ‘개별심판’이라고도 하며, 사망 직후 하느님께 받는 심판을 말한다. 공심판은 ‘최후심판’이라고도 하며,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 때 이루어지는 심판을 말한다. 「가톨릭교회 교리서」에 의하면 “각 사람은 죽자마자 자신의 삶을 그리스도께 셈 바치는 개별심판으로 그 불멸의 영혼 안에서 영원한 갚음을 받게 된다. 이러한 대가는 정화를 거치거나, 곧바로 하늘의 행복으로 들어가거나, 곧바로 영원한 벌을 받는 것이다.”(「가톨릭교회 교리서」1022항)
또한 ‘공심판’인 최후심판을 통해서 “진리이신 그리스도 앞에서 각 사람이 하느님과 맺은 관계의 진상이 결정적으로 밝혀질 것”이며, “각 사람이 지상생활 동안 선을 행하였거나 이를 소홀히 한 일의 궁극적 결과까지도 드러날 것이다. … 그때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역사 전체에 대한 당신의 결정적인 말씀을 선포할 것이다. … 최후의 심판은 사람들이 저지른 모든 불의에 대하여 하느님의 정의가 승리한다는 사실을 드러낼 것이며, 당신의 사랑이 죽음보다 강하다는 것을 드러내게 될 것이다.”(「가톨릭교회 교리서」1039-1040항) 이러한 “최후의 심판에 관한 가르침은, ‘은혜로운 때에, 구원의 날에’(2코린 6,2) 회개하라고 하느님께서 아직도 사람들에게 하시는 호소다. 이는 하느님에 대한 거룩한 경외심을 불러일으키고, 하느님 나라의 정의를 촉구하며, … 주님의 재림에 대한 ‘복된 희망‘(티토 2,13)을 알리는 것이다.”(「가톨릭교회 교리서」1041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