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 속의 여인들] 묵시록의 여인 하느님 백성이 도대체 무엇이며 어떻게 살아야 되는지 묻기 위해 나는 종종 묵시록의 여인을 떠올린다. 여인을 두고 다양한 해석이 있다. 열두 개의 별로 이루어진 관을 쓰고 있어 이스라엘 열두 지파를 떠올리기도 하고(창세 37,9 참조), 광야에서 하느님의 보호를 받는 여인이어서 이집트에서 탈출한 이스라엘을 가리킨다고도 해석한다(탈출 19,4; 신명 32,11 참조). 우리 교회는 이스라엘 백성에 국한된 이런 해석에 만족하지 않았다. 하느님의 어머니요, 모든 믿는 이들의 어머니로 추앙하는 성모님을 묵시록의 여인에 빗대어 이해하곤 했다. 산고 속에서도 사내아이를 낳고야 마는 묵시록의 여인과 처녀의 몸으로 예수님을 낳은 마리아가 겹쳐져 인식되었기 때문이리라. 묵시록의 여인이 낳은 사내아이는 유다 사회가 기다려온 메시아의 상징으로 이해되었고(이사 7,14; 시편 2,9 참조) 그리스도인에게 메시아는 예수였기에 묵시록의 여인과 성모 마리아는 다른 여인이되 하나의 운명을 살아낸 여인으로 이해되기에 충분했다. 여인은 용과 대립 구도로 서술된다. 용은 ‘옛날의 뱀’이라 했다(묵시 12,9). 하와를 속이고 인간을 에덴동산에서 쫓겨나게 한 그 뱀. 뱀은 메시아를 기다렸던 이스라엘 백성에게는 물론이고 예수를 메시아로 고백하는 모든 그리스도인의 삶 안에 버젓이 꿈틀거리고 여전히 싸움을 걸어오고 있다. 묵시록이 여인은 고통과 박해 속에서도 메시아에 대한 희망과 갈망에 제 삶의 뿌리를 내린 모든 신앙인의 표상이다. 태어날 사내아이를 삼키려 기다리는 용의 위협 속에서도 여인은 끝끝내 사내아이를 이 세상에 드러내고야 마는 대목이 그렇고(묵시 12,4), 아이를 낳은 후 용을 피해 광야로 떠나간 여인의 행보가 더더욱 그렇다(묵시 12,6). 거친 광야에서 여인은 천이백육십 일 동안 하느님의 보호를 받는다. ‘천이백육십 일’은 유다인들에겐 치욕과 고통의 시간이었다. 예루살렘 성전이 그리스 제국의 임금 안티오쿠스 4세 에피파네스에 의해 유린되고 더럽혀진 시간이었고(묵시 11,2 참조), 그 시간에 유다인들은 하느님을 지키고 자신을 지키기 위해 참고 견뎠다. 박해를 딛고, 치욕을 감내한 유다 사회는 마카베오 항쟁을 통해 얼마간의 독립을 쟁취하기도 했다. 그 후, ‘천이백육십 일’은 하느님 백성이 겪는 박해의 시간을 상징하는 시간 개념이 되었다. 묵시록의 여인이 겪은 ‘천이백육십 일’은 오늘을 사는 우리의 고통과 슬픔의 시간 안에 여전히 녹아있다. 살고 싶어 울부짖을 때, 우리는 죽음의 위협과 그로 인한 두려움에 몸서리치면서 이 삶을 메시아에 대한 희망과 갈망의 제물로 봉헌하며 어떻게든 버틴다. 그렇게 고통과 슬픔의 자리를 알고 간절함에 울부짖는 이들 안에 묵시록의 여인은 육화하며 함께 버텨낸다. 메시아 시대는 고통의 시대를 전제하니까(이사 21,3;26,17-18;37,3 예레 4,31;6,24; 미카 4,9-10). 어른이 되어 결혼하고 아이를 가지며 인생을 살아가는 일상의 평범함 속에 삶의 희로애락은 중첩되어 켜켜이 쌓여간다. 기쁨과 행복과 성공 만이 전부인 삶이 없을진대, 매일 같이 행복과 불행의 불균형을 원망하며 살아간다. 바라는 것이 더 이상 바랄 수 없게 될 때, 우리는 당황하거나 혼란스러워한다. 삶의 무게에 신음하며 정체된 상태로 머물다 어느 순간 감정이 이완되어 터져 나오는 거친 언행에 스스로를 탓하기도 한다. 그때 묵시록의 여인을 잠시 생각해 보면 어떨까. 신앙은 고통 너머의 행복을 이야기하지 않는다는 것을. 고통에 맞닥뜨린 지금의 시간이 신앙하는 시간이고, 그 시간에 메시아는 태어나고 메시아는 살아가고 메시아는 기다려진다는 것을. 묵시록의 여인이 살아낸 힘겨운 시간 안에 하느님께서 계셨다는 사실 하나로 우리는 또한 이 삶을 버텨낼 것이다. 하느님, 당신이 계시기만 한다면 그것으로 우리 삶은 파편화된 기쁨이나 행복으로 환원될 수 없는, 그리하여 함부로 해석될 수 없는 신비로 애틋할 뿐이다. 우린 그 애틋함을 함께 공부하고 함께 나누어 갈 묵시록의 여인이다. [2022년 10월 9일(다해) 연중 제28주일 대구주보 3면, 박병규 요한보스코 신부(대구가톨릭대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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