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 맛들이기] 이스라엘과 이방인들을 구분 짓는 표지 ‘할례’ 할례는 이스라엘 민족의 예배 의식과 관습에서 독특한 위치를 차지했습니다. 이스라엘의 모든 남자아이는 예외 없이 태어난 지 8일째 되는 날에 율법에 따라 할례를 의무적으로 받아야 했습니다(창세 17,12; 레위 12,3; 필리 3,5 참조). 예수님께서도 이 관습을 따르셨습니다(루카 1,59; 2,21 참조). 할례 날이 안식일이라도 할례를 받지 않으면 안 됐습니다(요한 7,23 참조). 구약 성경에 따르면 이스라엘인들에게 할례는 하느님께서 아브라함 그리고 그 후손들과 계약을 맺으시는 방법들 가운데 하나였습니다(창세 17,10-14; 1마카 1,15; 2마카 6,10 참조). 할례는 이스라엘 민족을 이방 민족과 구별하는 결정적이고 특징적인 표지가 되기도 하였습니다(판관 14,3 참조). 즉 할례가 유다인들에게 일종의 하느님의 자녀라는 증명서와 같은 것이었습니다. 이런 까닭에 유다인들은 자신들의 할례를 자랑했고 할례를 받지 못한 사람들과 이방인들을 멸시하고 천대하였습니다. 유배 시기부터는 할례가 안식일 준수와 함께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니게 되면서, 이 두 행위는 선택된 민족에 속함을 드러내고 하느님에 대한 신앙과 충실성을 고백하는 징표가 되었습니다. 할례라는 물리적인 행위는 영적인 의미와 결부되어 마음의 할례라고 표현되기도 했습니다(신명 10,16; 30,6; 로마 2,29 참조). 할례는 하느님께 온전히 헌신하고 있음을 드러내는 외적인 상징이었지만, 내적인 헌신이 뒤따르지 않으면 아무런 가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예언자들은 마음의 할례를 강조하면서 이스라엘이 하느님과 맺은 계약 내용에 성실하게 응답할 것을 촉구하기도 했습니다(예레 4,4; 6,10; 9,25; 에제 44,7 참조). 그런데 할례가 중요성을 더해가면서, 초대교회에서는 할례로 인한 대립이 발생하기도 하였습니다. 초기 그리스도교가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하면서 많은 이들이 세례를 받았는데, 유다교의 영향으로 그리스도인이 되고자 하는 이방인들에게도 과연 할례를 요구해야만 하는가의 문제를 놓고 격렬한 논쟁이 벌어지기도 했습니다(사도 15,1-29; 갈라 2,1-10 참조). 결국, 이 문제를 다룬 예루살렘 사도 회의의 입장은 그리스도교적인 믿음과 친교에 할례가 본질적인 요소는 아니기에, 이방인계 그리스도인은 유다교의 율법을 지킬 의무가 없다는 것을 결의했습니다. 마침내 이방인은 할례 없이 세례만으로 입교할 수 있게 되었고, 교회는 사도회의 결정 이후 이방인들에게 할례 없이 자유롭게 세례를 베풀 수 있었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그리스도교 신자가 되는데 할례가 꼭 필요한 것은 아니라고 역설했습니다. 그 이유는 그리스도 예수님의 대속적인 죽음으로 이루어진 새로운 계약이 모든 인간에게 구원을 가져다주었고, 또한 이방인들은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으로 하느님 백성에 속하게 되었기 때문이었습니다(에페 2,11-22 참조). 할례를 옛 계약의 상징으로 간주한 바오로는 나아가 그리스도와 일치하는 세례를 새로운 의식적인 상징으로 강조하였습니다(콜로 2,11-15 참조). 할례는 신약의 세례성사의 모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겉으로 드러나는 표지보다 마음의 중요성을 강조하셨습니다. 그러므로 하느님과 인간과의 관계에서 중요한 것은 외적 율법이 아니라 세례를 받은 사람들의 마음이 새로워지고 삶의 변화를 이루는 모습입니다. “사실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는 할례를 받았느냐 받지 않았느냐가 중요하지 않습니다. 사랑으로 행동하는 믿음만이 중요할 따름입니다”(갈라 5,6) [2022년 10월 9일(다해) 연중 제28주일 수원주보 3면, 이승환 루카 신부(수원교구 복음화국장)]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