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Re:교회가 먼저인가 성경이 먼저인가? | 카테고리 | 천주교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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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이정임 | 작성일2017-02-11 | 조회수2,412 | 추천수0 | 신고 |
번역 성경이 나오기까지 : 예수님 말씀과 존대법
성서 합본위원회는 2004년 11월 23일에 있었던 ‘새 번역 성서 공청회’ 뒤 새 번역에 대한 추가 수정 작업을 하는 과정에서, 특별히 예수님께서 하시는 말씀에 대한 존대법 문제를 논의하여 왔다. 2005년 1월 10-16일의 합본위원회 회의에서는 예수님 말씀 가운데 제자들에게나 군중들에게 하신 말씀이 아닌 대화에서 높임말을 쓰기로 하고 김영남 신부가 그 구체적인 제안을 연구하기로 하였다. 그 연구 결과에 성서위원장 주교님과 합본위원 신부님들이 동의하고, 제자들과 군중들에게 하시는 말씀이 아닌, 예수님의 거의 모든 대화에 ‘하오체’(예사 높임)를 적용하여 실무진이 그 시안을 마련하였다.
주교회의 교리주교위원회 2005년 1월 24일 회의에서는 새 번역 성서와 관련하여 존대법 문제도 논의하고, ‘하오체’ 정도가 좋겠다는 의견이 제시되기도 하였다. 예수님의 말씀에 ‘하오체’를 적용한 4복음서 시안을 합본위원들이 검토한 다음, 지난 2월 13일에 합본위원회 회의를 열고, 예수님의 말씀 일부에만 존대법을 적용하는 것이 몹시 부자연스럽다고 보아, 높임말을 쓰지 않기로 결정하였다. 예수님께서 성모님이나 요한 세례자에게 하시는 말씀에는 예외적으로 높임말을 썼다.
예수님과 높임말 문제
성서, 특히 복음서의 번역에서 다른 나라의 말과 달리 우리만이 안고 있는 큰 문제가 있다. 복음서의 절대적 주인공이신 예수님과 관련된 말을 우리말에서 어떻게 높이고 낮추느냐이다. 예수님께서 다른 이들에게 하시는 말씀, 그리고 복음서에 나오는 사람들이나 복음서 저자 자신이 예수님께 또는 그분에 관하여 하는 말을, 우리말에서 강조되는 예의에 맞추어 어떻게 옮기느냐 하는 문제이다. 신약성서의 그리스 말에서는 별다른 문제가 되지 않지만, 예법이 큰 비중을 차지하는 우리말에서는 어려운 문제가 아닐 수 없다. 이 문제와 관련하여 고 임승필 신부가 『사목』 270호(2001. 7.)에 기고했던 “예수님과 우리말”의 주장을 간추리면 다음과 같다.
같은 신약성서라도 일차 목표에 따라 여러 가지로 번역할 수 있다. 곧 성서 공부용 번역본, 종교를 가지고 있지 않거나 다른 종교를 믿는 이들에게 예수님이나 그리스도교를 소개하거나 이러한 이들을 그리스도교로 이끄는 선교용 번역본, 그리고 교회 공용으로 쓰이는 번역본 등이다. 우리의 관심사는 마지막 것, 곧 신자들의 개인적인 봉독과 함께 특별히 미사나 그 밖의 전례 때에 사용하는 교회 공용 성서이다.
그리고 여기에서 우리의 관심사는, 예수님께서 세상에 사실 때에 다른 사람들에게 어떻게, 어떠한 어법으로 말씀하셨는지 추측해 내는 것이 아니다. 이는 주석의 문제일 수는 있어도 번역의 문제는 되지 않는다. 번역자는 복음서 저자들이 예수님에 관해서 어떻게 이야기하는지, 그분께서 곁에 있는 이들에게 어떤 식으로 말씀하셨다고 전하는지 파악해야 한다. 복음서는 예수님의 부활 이후에 이 부활의 시각으로 쓰였다.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의 관점에서 저술되었다. 복음서는 한마디로, 주 그리스도이신 예수님께 대한 믿음을 증언하는 신앙 고백서이다.
그래서 복음서에서는 생전의 예수님과 부활 이후의 예수님이 엄밀히 구분되지 않는다. 복음서는 나자렛 예수에 관한 단순한 전기나 역사서가 아니다. 역사를 바탕으로 하는 믿음의 책이다. 우리는 복음서 저자들의 이러한 의도에 합당한 우리말을 선택해야 한다. 예수님께서 생시에 어떠한 말투를 쓰셨을 것이라고 미리 규정하고 나서 그것을 번역에 적용시킬 경우에는 복음서 저자들의 뜻을 거스르는 쪽으로 갈 수 있다.
이는 어떤 면에서 지극히 상식적인 문제이다. 성서학이나 국어학의 전문 용어나 표현들을 동원하는 복잡한 연구를 하지 않고도, 우리는 복음서 저자들이 여러 가지로 명백하게 드러내는 의도를 살펴보는 것으로 충분하다고 본다. 그리고 예의를 중시하는 우리의 전통에 따라,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하고 있듯이, 복음서 저자들이 의도하는 대로 예수님의 말씀, 그리고 그분에 관한 말을 우리말로 적절하게 옮기면 되는 것이다.
예수님과 복음서 저자
“복음은 하느님께서 당신의 예언자들을 통하여 미리 성서에 약속해 놓으신 것으로, 당신 아드님에 관한 말씀입니다. 그분께서는 육으로는 다윗의 후손으로 태어나셨고, 거룩한 영으로는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부활하시어, 힘을 지니신 하느님의 아드님으로 확인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로마 1,2-4). 공관 복음서들은 바오로 사도의 이 말대로 예수님의 두 면을 보여주려고 한다. 곧 “육으로는 다윗의 후손”이시며 “거룩한 영으로는 … 힘을 지니신 하느님의 아드님”이신 예수님이시다. 예수님의 이러한 인성과 신성을 합쳐 표현한 말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이다.
마태오는 “다윗의 자손이시며 아브라함의 자손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라는 말로 복음서를 시작한다. 이는 복음서가 단순히 “요셉의 아들 예수” 또는 “나자렛 사람 예수”라는 위인의 언행을 역사적으로 서술하려는 것이 아님을 처음부터 명확히 하는 조치이다. 복음서의 대상은 역사의 한 시점에 유다 땅에 사셨던 예수님이시다. 그러나 복음서가 우리에게 보여주는 분은 동시에, 우리 신앙의 대상인 “우리 주 그리스도”이시다. 마태오는 처음부터, 그리고 자기 복음서 전체에 걸쳐, 예수님을 이렇게 모든 인간의 영원한 삶과 죽음을 결정지으시는 분으로(마태 25,31-46) 소개한다.
마르코도 자기 복음서의 제목을 “하느님의 아드님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라고 한다.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특별한 아드님이시며 그리스도이심은 마태오 복음서와 루가 복음서에서처럼 마르코 복음서에서도 중요한 고비마다 재확인된다. 세례 때에, 영광스러운 변모 때에, 유다인들의 최고 의회에서 신문을 받으실 때에 그렇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돌아가실 때에 그분의 사형을 집행한 백인대장이 “참으로 이 사람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셨다.”라고 말함으로써, 복음서의 제목을 상기시키면서 예수님께 대한 신앙 고백의 모범을 보여주기도 한다(마르 16,39; 마태 27,54). 복음서는 부활 뒤에야 예수님을 “주님”으로 이야기하지 않고 처음부터 그러하신 분이심을 보여준다는 것이다.
이러한 사실은 세 공관 복음서만이 아니라 요한 복음서의 첫 부분에서도 확인된다. 네 복음서가 다 요한 세례자의 역할을 예수님의 선구자, 곧 예수님(주님, 하느님, 야훼)의 오심을 미리 준비하는 사람으로 규정한다(마태 3,3; 마르 1,3; 루가 3,4; 요한 1,23). 복음서 저자들은 자기들의 책 첫머리에서부터 예수님을 이스라엘의 하느님이신 ‘야훼’와 동등한 반열에 올려놓고 있으며, 예수님을 이미 부활 이전부터 ‘주님’으로 부른다. 사실, 예수님께서는 복음서에서 자주 ‘주님’으로 불리신다.
루가는 마태오나 마르코와 달리 머리말에 이어 곧바로 요한 세례자의 출생 예고로 들어간다. 그러나 루가도 자기의 복음서가 단순히 “나자렛 사람 예수”의 언행을 전하는 책이 아님을 분명히 한다. 요한의 출생 예고 장면에서부터 예수님과 “주님”을 동일시하고 있다. 예수님의 탄생 때에는 “오늘 너희를 위하여 다윗 고을에서 구원자가 태어나셨으니, 주 그리스도이시다.”라고 선포한다(2,11).
요한 복음서 저자는 주지하는 바와 같이 처음부터, 예수님 곧 “말씀”이 하느님처럼 창조 이전부터 영원히 존재하신다는 이른바 선재사상을 펼쳐 보인다(1,1-3.14.17-18). 요한 복음서 전체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느님과 같으신 그분의 “외아들”이심을(3,18), 이러한 예수님의 “영광”이 십자가 위에서까지 명백히 드러남을 강조한다. 이 저자는 또 복음서 저술 목적을 이렇게 밝힌다. “이것들을 기록한 목적은 예수님께서 메시아이시며 하느님의 아드님이심을 여러분이 믿고, 또 그렇게 믿어서 그분의 이름으로 생명을 얻게 하려는 것이다”(20,31). 이처럼 요한 복음서 역시 다른 복음서들처럼 처음부터 끝까지 예수님을 신앙의 대상이신 분, 인간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시는 분으로 이야기한다.
그래서 복음서 저자들이 예수님의 말씀이라고 전하는 것은 단순히 나자렛 사람 예수라는 과거의 한 인물이 동시대인들에게 한 말이 아니다. 세상 끝날까지 당신을 믿는 이들과 언제나 함께 계시는(마태 28,20)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시공을 초월하시어 복음서 저자들 당시의 “독자”(마르 13,14), 곧 신자들에게 직접 하시는 말씀이다. 복음서 저자들의 의도에 따르면, 그것은 또 “여러분”(요한 20,31), 곧 오늘날의 그리스도인들에게 직접 하시는 말씀이기도 하다.
예수님과 사람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제자이든 그 밖의 사람이든, 나이가 많거나 적거나, 지위가 높든 낮든 모든 사람을 제자처럼 자녀처럼 대하신다. 그리고 모세보다 더한 신적 권위를 가지시고(마르 1,27), 한마디 말씀으로 바람과 호수를 순종시키실 뿐만 아니라(마태 8,27) 죽은 사람까지 되살리시는 권능을 가지시고(마르 5,41-42; 루가 7,14-15; 요한 11,43-44) 군중에게 가르침을 베푸신다. 그러는 가운데 “얘야!”, “딸아!”, “얘들아!”라는 부성적 호칭이 보여주는 바와 같이 모든 사람의 “구원자”로서(루가 2,11), “주님”으로서 그들에 대한 당신의 정성과 사랑을 드러내신다. 그분의 적대자들은 일정한 선을 긋기는 하지만, 제자들은 물론 일반 사람들도 이와 같은 예수님을 당시의 어떠한 스승보다 더 고귀하신 스승으로, 자기들이 고대하던 메시아/그리스도로, 또 하느님의 아드님이시며 주님으로, 결국은 “하느님”으로 대한다.
복음서 저자들은 자기들의 책 첫머리에서부터 끝에 이르기까지 이 점을 분명하게 제시한다. 그래서 복음서를 번역할 때에는 저자들의 이러한 뜻을 충분히 살려야 한다. 단순히 “나자렛 사람 예수”라는 삼십대 초반의 인물이 다른 사람들에게 어떠한 방식으로 말하였겠느냐 하는 문제는, 복음서를 우리말로 옮기는 데에 고려 대상이 되지 않는다. 예수님 생전의 말씨를 미리 추정하여 그것을 번역에 적용할 수는 없다. 복음서 번역의 결정적 요인은 저자들이 “요셉의 아들 예수님”을 어떠한 분으로 보여주려고 하느냐이다. 복음서를 우리말로 어떻게 옮기느냐는 문제와 관련하여, 요한복음 5장 23절에 나오는 예수님의 말씀이 시사적이다. “모든 사람이 아버지를 공경하듯이 아들도 공경하게 하시려는 것이다. 아들을 공경하지 않는 자는 아들을 보내신 아버지도 공경하지 않는다.” 우리는 복음서 저자들의 의도에 따라, 그리고 오늘의 교회 공동체가 복음서를 받아들이는 자세에 따라, 이 “공경”이 우리말로도 드러나게 번역하여야 한다.
이러한 사항들을 종합하면, 적어도 교회 공용 번역본과 관련된 결론이 자연스럽게 나온다. 예수님을 최고의 존대어로 표현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에 따라 예수님께서 다른 사람들에게 하시는 말씀은, 전통적 의미의 스승 또는 옛날의 스승이 제자들에게 하듯, 부모가 자녀들에게 하듯, 더 나아가서 하느님께서 인간에게 하시듯 해라체로 옮기는 것이 우리말에서 가장 바람직하다고 여겨진다.
복음서의 선교적 전망도 고려하여야
그러나 다른 견해도 있었다. 공청회에서 제기된 그 의견들을 간추리면 다음과 같다. 존대법은 우리말에서 대단히 중요한 문제이다. 우리 한국사회에서는 존대법(경어법)을 거스르는 언행은 ‘상스럽고’ ‘무식한 것’이 되고 말기 때문이다. 우리말 성서 번역이 이 어법에 맞지 않는 표현을 하여 우리말 일반 언중의 귀에 예수님의 언행이 ‘상스럽거나’, ‘격이 낮거나’, ‘교만하게’ 들리게 해서는 결코 안 될 것이다. 예수님의 어투를 모두 ‘해라체’로 하면 당황스러운 경우가 있다. 이렇게 번역된 예수님의 언행은 우리말 어법에서 볼 때 ‘온유하고 겸손하고 자비롭게’ 들리기보다는 ‘오만 불손하게’ 느껴질 우려가 크다. 성서는 신자들만을 위한 책이 아니므로, 그리스도가 누구인지 아직 모르는 사람들의 입장에서 우리말 어법을 생각하며 비판적으로 읽어 보면 다르게 느껴질 것이다.
따라서 복음서 저자들이 가지고 있던 선교적 전망도 고려하면서 번역해야 한다. 복음서는 ‘신앙 고백의 예수 그리스도’만을 선포하기 위한 책이 아니라 예수님을 모르던 사람들에게 예수님의 말씀과 행적을 알려줌으로써 그들도 나자렛 예수님을 ‘메시아/그리스도’, ‘하느님의 아드님’, ‘주님’으로 믿게 하고, 또 믿음으로써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할 목적으로 쓰인 책이다. 이러한 선교적 전망에서 볼 때, 예수님께서 다른 사람들에게 하시는 말씀의 어투가 상대를 불문하고 ‘해라체’가 되어서는 안 될 것이다. 복음서 저자들이 복음서를 쓸 때 신앙을 갖고 있지 않은 다른 사람들을 신앙으로 이끌고자 하는 의도를 가지고 있었다는 점을 인정할 수 있다면, 예수님의 말씨가 신앙을 모르는 사람들에게 무례한 말로 들리게 하지는 않았을 것이라는 점도 인정해야 할 것이다.
예수님 말씀의 상대자가 누구냐에 따라 예수님의 어투가 달라져야 한다. 경우에 따라 ‘해라체’로 번역해야 할 때도 있고, ‘합쇼체’ 또는 ‘하오체’로 번역해야 할 때가 있다. 제자들을 상대로 하시는 예수님의 말씀에서 ‘해라체’는 예수님께서 당신 제자들에게 갖고 계신 사랑의 친근감을 표현하는 측면도 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당신의 제자들이 아닌 다른 사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해라체’로 옮겨서는 곤란하다. 이 문제는 근본적으로 역사의 예수님께 대한 이해와 관련되어 있다는 점에서 대단히 중요하다.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신앙 고백은 나자렛 예수님의 역사적 사건에 근거하고 있는 것이지, 신화에 근거하고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신약성서 전체에 걸쳐 증언된 예수님의 모습은 그분께서 유일무이한 ‘하느님의 아드님’이시며, ‘주님’이시고, ‘메시아/그리스도’이시지만, 오로지 사랑 때문에 당신 자신을 종처럼 낮추셔서 섬기는 삶을 사셨던 온유하시고 겸손하신 분이셨다(필립 2,6-11; 요한 13,3-5; 마태 11,28-30). 예수님께서는 주님이셨지만, 결코 무례한 인물은 아니셨다.
현실적인 문제들
위와 같은 주장들을 합본위원회에서 검토하고, 예수님의 말씀에 존대법을 적용하는 문제를 연구하였다. 우선, 예수님께서 당신의 제자들에게 또는 익명의 군중에게 하시는 말씀은 현재의 번역대로 ‘하라체’로 하고, 대화체 문장에서만 예수님께서 하시는 말씀을 높이기로 하였다. 대화 상대가 개인이거나 구체적으로 밝혀져 있고 상대가 높임말을 할 때에, 예수님의 말씀도 ‘하오체’로 높이기로 하고 그 시안을 마련하였다. 예수님의 말씀을 모두 높이거나 낮춘다면 일관성이 있을 터인데, 개별적인 대화 상황에서 어중간한 ‘하오체’로 높이는 것이 몹시 부자연스러웠다. ‘하오체’와 ‘합쇼체’를 그때그때 섞어 쓰는 방안도 고려하였으나, ‘합쇼체’에 따라 써야 하는 겸양어(저는, 제가 등) 때문에 그 또한 곤란한 경우가 많았다.
참고삼아 말하자면, 새 번역 성서 공청회를 준비하며 실시하였던 설문조사 결과는 대체로 낮춤말을 사용하는 데에 긍정적이었다. 곧 예수님께서 다른 이들에게 낮춤말을 하시는 것을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물음에, “좋다.”가 응답자의 42%, “낮춤말을 쓰되, 요한 세례자처럼 특별한 경우는 예외로 하면 좋겠다.”가 19%, 합계 61%가 낮춤말에 긍정적인 응답을 하였다. “제자들과 일부 개인에게만 낮춤말을 쓰면 좋겠다.”가 25%, “다 낮춤말을 쓰지 않으면 좋겠다.”가 14%였다.
공동번역도 신약성서 초판에서 예수님께서 다른 사람들에게 하시는 말씀에 존대법을 적용하였으나, 구약성서와 합본하여 출판하면서부터는 ‘해라체’로 바꾸었다. 신자들의 정서가 이를 받아들일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런데 ‘200주년 기념 신약성서’는 예수님께서 다른 사람들에게 하시는 모든 말씀에 ‘하오체’와 ‘합쇼체’를 썼다. 이는 매우 용기 있는 일이기는 하지만, ‘합쇼체’에 겸양어는 쓰지 않는 등 그 자체로 문제를 안고 있는 경우가 많았다. 그리고 200주년 기념 신약성서와 달리, 새 번역 성서는 전례에서 쓰일 교회 공용 성서를 목표로 번역하였다는 사실을 숙고할 때에, 예수님 말씀에 섣불리 존대법을 적용하기가 매우 어려웠다. 그래서 이 문제를 다음 세대의 성서 번역진에 물려주기로 한 것이다.
[사목, 2005년 3월호, 강대인(새 번역 성서 합본 실무반 반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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