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 이야기] 며느리가 시어머니에게 맞서 갈라진다 평화의 예수님과 어울리지 않아 우리를 혼란스럽게 하는 말씀이 있습니다: “내가 세상에 평화를 주러왔다고 생각하지 마라. 평화가 아니라 칼을 주러 왔다. 나는 아들이 아버지와, 딸이 어머니와, 며느리가 시어머니와 갈라서게 하려고 왔다. 집안 식구가 바로 원수가 된다”(마태 10,34-36). 병행하는 루카 복음에서는 “칼” 대신 “분열”(12,51)이 나오고, “시어머니가 며느리에게, 며느리가 시어머니에게 맞서 갈라지게 될 것”(12,53)이라는 반복 표현이 나옵니다. 여기서 ‘고부간의 갈등은 예수님도 어찌하실 수 없나?’ ‘하와가 행복한 건 시어머니가 없기 때문이고, 성모님이 행복한 건 며느리가 없기 때문인가?’ 하는 엉뚱한 질문을 해봅니다. 물론 그런 건 아니지요. 이 복음의 핵심 메시지는 평화를 주시는 예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는 데 있어 그 반응이 가족 내에서조차 나뉜다는 것입니다. 사실, 가족의 분열은 묵시문학에 자주 언급되는 소재로서 종말의 시련을 드러내는 표징이기도 합니다(미카 7,6 참조). 예수님의 복음을 받아들일지 거부할지의 결정 앞에서 하느님 나라를 선택하는 이들에게는 단호함이 요구됩니다. 즉, 예수님을 향한 충실한 결단으로 인해 가까운 이들과 갈라져야 하는 일도 생길 수 있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칼’은 평화의 반대인 폭력이 아니라 ‘나뉨’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이런 어려움을 감내해야 했습니다. 메시아로 오신 예수님께서는 잘못된 질서를 단순히 유지하는 거짓 평화가 아니라, 옳고 그름을 명확하게 가르는 기준을 주시러 오셨습니다. 그 기준에 따른 결단은 극명하게 갈립니다. 예수님께서 주시는 평화는 단순히 잠잠한 상태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그분으로 인해 어떤 것을 포기하고 나누여지는 과정까지 포함합니다. 따라서 예수님으로 인한 분열에 초점이 있지 않고, 그분으로 인해 나뉘게 되는 그 목적에 강조점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바라시는 평화를 이루기 위해서는 단호한 결단과 그에 따른 ‘구체적 행동’이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그 과정에서 ‘갈라짐’ 곧 분열을 마주할 수 있습니다. 실제로 평화는 단지 ‘평화로운 행위’ 하나만으로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복음적 열매를 추구하는 의로운 이들은 세속적 탐욕을 탐하는 불의한 이들과 반드시 갈등을 겪게 됩니다. 그러한 분열이 때로는 가족마저 갈라지는 고통과 아픔을 동반하기도 합니다. 그럼에도 하느님의 말씀과 기도로 인내하며 끝까지 평화의 길을 걸어가는 이들은 행복합니다. [2022년 11월 6일(다해) 연중 제32주일(평신도 주일) 의정부주보 11면, 이승엽 미카엘 신부(선교사목국 신앙교육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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