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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복음 해설 묵상] 요한 4,1-30-----송영진 모세 신부 카테고리 | 천주교
작성자유타한인성당 쪽지 캡슐 작성일2017-03-22 조회수4,398 추천수0

 

<요한복음서 4장 1절-30절>

 

4장

 

<1절-42절 : 사마리아 여인과 이야기하시다>

 

1절..<예수님께서는 당신이 요한보다 더 많은 사람을 제자로 만들고 세례를 준다는 소문을

    바리사이들이 들었다는 것을 알게 되셨다.>--요한복음에 기록된 순서대로 생각한다면 바

    리사이파 사람들이 언제부터 예수님을 주목하기 시작했는지 알 수는 없지만 예수님의 성

    전 정화 사건을 계기로 예수님께 반감을 품기 시작했을 것이고, 과월절 기간 동안 예수님

    이 일으키신 표징들을 보고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게 되자(2장 23절) 적대감을 갖게 되었

    을 것입니다. 그러다가 예수님이 사람들에게 세례를 주고(3장 22절), 세례자 요한에게 가

    는 사람들보다 예수님에게 가는 사람들이 더 많다는(3장 26절) 소문을 듣게 되자 예수님

    을 위험인물로 생각했을 것입니다.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박해하기 시작했다는 말이 5장 16절에 나오는데 그것이 요한복음에

    서는 예수님에게 가해진 첫 번째 박해입니다. 그전까지는 바리사이파 사람들이 노골적으

    로 박해는 하지 않았더라도 예수님의 활동을 막거나 방해하는 어떤 압력을 가했을 것입니

    다. 하여간에 예수님은 바리사이파 사람들 때문에 활동을 할 수가 없어서 유다 지역에서

    의 활동을 중단하고 갈릴래아로 가십니다.

    여기서 '제자'란 넓은 의미에서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모든 사람을 뜻합니다. 다음 2절에

    서 말하는 제자들은 열두 제자를 뜻합니다.

    공동번역 성서는 '소문이 바리사이파 사람들의 귀에 들어갔다.' 라고 번역했고, 새번역 성

    경은 '소문을 바리사이들이 들었다는 것을 알게 되셨다.' 라고 번역했는데, 원문대로 하면

    새번역 성경이 맞습니다.

 

2절..<ㅡ사실은 예수님께서 친히 세례를 주신 것이 아니라 제자들이 준 것이다.ㅡ>--공관

    복음서에는 예수님이 사람들에게 세례를 주셨다는 내용이 전혀 없습니다.

    그래서 아마도 복음서 저자 자신이나 후대의 누군가가 공관복음의 내용과 맞추기 위해서

    앞의 3장 22절을 수정하는 내용의 구절을 이 자리에 삽입한 것으로 생각하는 것이 일반

    적인 견해입니다.

 

3절..<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유다를 떠나 다시 갈릴래아로 가셨다.>--아직은 예수님의 수난

    의 때가 오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바리사이파 사람들과의 충돌을 피해서 유다 지역을

    떠나서 갈릴래아 지역으로 가십니다.

 

4절..<그때에 사마리아를 가로질러 가셔야 했다.>--당시 팔레스티나는 세 지역으로 구분되

    어 있었습니다. 북부 지역은 갈릴래아였고, 남부 지역은 유다였습니다. 사마리아는 갈릴래

    아와 유다 사이에 있었습니다. 유다에서 갈릴래아로 갈 때 사마리아를 가로질러 가는 것

    은 지름길로 가는 것입니다. 사마리아 지역을 지나가기 싫으면 요르단 강변에 있는 길을

    따라서 멀리 돌아가는 수밖에 없었습니다. 예수님이 사마리아를 가로지르는 지름길을 선

    택하신 이유는 하느님의 뜻을 따르기 위한 것으로 해석됩니다. 즉 예수님과 사마리아 여

    인이 만난 것은 하느님의 뜻이었다는 것입니다.

 

<사마리아>--'사마리아' 라는 이름은 원래 북부 이스라엘 왕국의 수도 이름이었습니다. 기

    원전 721년에 아시리아는 북부 이스라엘 왕국을 멸망시킨 뒤에 그 지역의 이스라엘인들

    을 추방하고 다른 곳에서 살던 이방인들을 그곳에 강제 이주시켰습니다. 사마리아 지역에

    강제 이주된 사람들은 유대인들의 신앙을 물려받아서 어느 정도는 유대교를 보존했습니

    다. 그러나 그들은 모세오경(창세기, 탈출기, 레위기, 민수기, 신명기)만을 성경으로 인정

    했고, 예루살렘 성전을 거부하면서 그리짐 산을 참된 예배 장소로 여겼습니다. 열왕기 하

    권 17장 24절-41절에 이방인들을 사마리아 지역에 강제 이주시킨 과정과 사마리아인들

    이 하느님을 섬기게 된 계기가 나옵니다. 그 내용을 보면 사람들이 하느님을 섬기지 않으

    니까 하느님께서 사자들을 보내서 물어 죽이게 했고, 사람들은 그게 무서워서 야훼 하느

    님을 섬기기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자기들이 원래 섬기던 우상도 함께 섬

    겼습니다. 하여간에 유대인들은 사마리아인들이 야훼 하느님을 섬기는 것을 인정하지 않

    았고 우상숭배로 취급했습니다.

    예수님 당시에 사마리아 지역은 정치적으로 유다 지역에 통합되어서 같은 로마 총독의 지

    배하에 있었습니다. 그러나 유대인들과 사마리아인들은 서로에게 적대적이었습니다. 당시

    유다 지역에는 이방인 거주자가 거의 없었는데 갈릴래아 지역에는 유대인들과 이방인들이

    섞여서 살고 있었습니다. 사마리아인들은 유다 지역과 갈릴래아 지역의 유대인들 사이에

    서 고립되어 있었던 것 같습니다.

 

5절-6절..(5)<그렇게 하여 예수님께서는 야곱이 자기 아들 요셉에게 준 땅에서 가까운 시카

    르라는 사마리아의 한 고을에 이르셨다.> (6)<그곳에는 야곱의 우물이 있었다. 길을 걷느

    라 지치신 예수님께서는 그 우물가에 앉으셨다. 때는 정오 무렵이었다.>--'야곱이 자기

    아들 요셉에게 준 땅'은 그리짐 산과 에발 산 사이에 있는 '스켐'입니다(창세 48,22). 스

    켐에 요셉의 무덤이 있었습니다(여호 24,32). '시카르'는 에발 산의 기슭에 있는 마을이고

    그곳에서 1.5Km 정도 떨어진 곳에 '야곱의 우물'이 있습니다. 구약성경에는 '야곱의 우물'

    에 관한 언급이 전혀 없습니다. 야곱의 우물은 깊이가 50미터 정도이고 현재는 그리스 정

    교회에서 관리하고 있다고 합니다.

    '길을 걷느라 지치신'이라는 말은 예수님의 인간적인 모습을 묘사하는 말입니다. 예수님은

    먼 길을 걸어서 피로와 갈증으로 지친 상태입니다. '정오 무렵'은 원문에서는 '제6시경'으

    로 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실제 시간을 기억하고 기록한 것일 수도 있고, 상징적인 시간

    일 수도 있습니다.

    상징적인 시간이라면 예수님과 여인의 갈증을 상징하는 것일 수 있습니다. '6'이 결핍, 불

    완전을 상징하는 숫자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확실한 것은 알 수 없습니다.

 

7절..<마침 사마리아 여자 하나가 물을 길으러 왔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나에게 마실 물을

    좀 다오." 하고 그 여자에게 말씀하셨다.>--우물에서 물을 길어 오는 일은 여자들이 날마

    다 해야 할 중요한 일이었습니다. 물을 길으러 온 사마리아 여자에게 예수님께서 먼저 말

    을 건네십니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주도적으로 상황을 전개하신다는 것을 나타냅니다. 우

    물이 깊었기 때문에 물을 길어 마시려면 긴 밧줄이 달린 두레박이 있어야 했습니다. 그런

    데 우물에 두레박이 없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마침 사마리아 여자가 왔고 예수님은 그

    여자에게 물을 달라고 부탁하십니다.

 

8절..<제자들은 먹을 것을 사러 고을에 가 있었다.>--제자들은 먹을 것을 사러 고을에 갔

    기 때문에 그 자리에는 예수님과 사마리아 여자만 있었습니다. 제자들이 그 자리에 없었

    는데 예수님과 사마리아 여자의 대화를 누가 듣고 기록했을까? 복음서를 읽다보면 이런

    의문이 생기는 장면이 가끔 있습니다. 우리는 성경이 단순히 역사적인 사실을 기록한 책

    이 아니라는 것을 생각해야 합니다. 여기서는 요한복음서 저자가 사람들의 신앙이 발전하

    는 과정과 단계를 이야기하기 위해서 실제 있었던 사실과 신학적인 해석을 대화 형식을

    빌려서 함께 엮은 것으로 추정합니다.

 

9절.. <사마리아 여자가 예수님께 말하였다. "선생님은 어떻게 유다 사람이시면서 사마리아

    여자인 저에게 마실 물을 청하십니까?" 사실 유다인들은 사마리아인들과 상종하지 않았

    다.>--사마리아 여자는 예수님의 말투나 복장을 보고 유대인이라는 것을 금방 알았을 것

    입니다. 당시 나그네가 물을 청할 때 그것을 거부하는 것은 큰 죄라고 여겼습니다. 그런

    데도 유대인과 사마리아인들은 서로에게 너무나도 적대적이어서 물 한 모금을 청하기도

    어려웠습니다. 또 원래 유대인들은 이방인들과 접촉하는 일을 피했습니다. 그래서 사마리

    아 여자가 놀라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여기서 '선생님은'이라는 말은 '당신은'으로 바꿔야 합니다. 원문대로 하면 여자는 예수님

    께 존칭을 사용하지 않았습니다. 여자가 존칭을 사용하는 것은 11절부터입니다. 여기서

    '선생님'이라는 번역은 오역입니다.

 

10절..<예수님께서 그 여자에게 대답하셨다. "네가 하느님의 선물을 알고 또 '나에게 마실

    물을 좀 다오.' 하고 너에게 말하는 이가 누구인지 알았더라면, 오히려 네가 그에게 청하

    고 그는 너에게 생수를 주었을 것이다.">--이제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여자에게 말을 건

    넨 진짜 의도를 밝히십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갈증에 시달리는 사람은 예수님이지만 진짜

    로 갈증에 시달리고 있는 사람은 여자이며 이제 예수님께서 여자의 갈증을 해소시켜 주겠

    다고 하시는 것입니다.

    '네가 하느님의 선물을 알고' 라는 말은 '네가 하느님의 선물이 무엇인지 알았더라면'이라

    는 말입니다. '하느님의 선물'이란 하느님께서 인간의 구원을 위해 주시는 은혜들을 총체

    적으로 표현하는 말입니다. 여기서는 예수님께서 여자에게 주시려고 하는 '생명의 물'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나에게 마실 물을 좀 다오, 하고 너에게 말하는 이가 누구인지 알았더라면'이라는 말은

    '내가 누구인지 알았더라면'이라는 말입니다. '네가 그에게 청하고'는 '네가 나에게 물을

    달라고 했을 것이다.' 라는 말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그에게, 그는'이라고 삼인칭을 사용

    한 것은 요한복음의 독특한 표현법입니다. (공동번역 성서는 '나에게, 내가' 라고 일인칭

    으로 번역했는데, 그냥 원문대로 삼인칭으로 번역하는 것이 옳습니다.)

    여기서 '생수'는 원문대로 번역하면 '살아 있는 물', 또는 '생명의 물'입니다. 이 말은 사람

    에게 생명을 주고 생명을 유지시키는 물이라는 뜻입니다. 요즘 우리가 흔히 사용하는 '생

    수' 라는 말과는 다릅니다. (공동번역 성서의 '샘솟는 물'이라는 번역도 적절한 번역은 아

    닙니다.)

    (성경을 읽을 때마다 느끼는 일인데, 예수님께서 처음 보는 낯선 사람에게 반말도 아니고

    해라체로 말을 놓은 것으로 번역하는 것은 좋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마치 조선시

    대 양반이 천민을 대하듯이 예수님이 사람들을 그렇게 대하셨다고 생각할 수는 없습니다.

    200주년 성서를 비롯해서 일부 성경은 예수님이 낯선 사람들에게, 또 제자들에게도 존댓

    말을 쓰신 것으로 번역했습니다. 그렇게 번역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합니다.

    처음 보는 낯선 이방인 여자에게 '너는...' 이라고 말을 놓을 수 있을까? 예수님이 과연

    그런 분이셨을까?)

 

11절..<그러자 그 여자가 예수님께 말하였다. "선생님, 두레박도 가지고 계시지 않고 우물도

    깊은데, 어디에서 그 생수를 마련하시렵니까?>--여기서 '선생님'은 원문에는 '주님'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낯선 사람에게 존경을 표시하는 존칭으로서 '선생님'으로

    번역할 수 있습니다. 9절에서 예수님을 '당신'이라고 불렀던 여자가 예수님을 주님(선생

    님)이라는 존칭으로 부르고 있습니다. 이것은 예수님을 대하는 여자의 태도에 변화가 생

    기기 시작했음을 나타냅니다. 이제 여자의 태도는 단계적으로 계속 발전하게 됩니다.

    어떻든 여자는 아직은 니코데모처럼 예수님 말씀을 알아듣지 못하고 있습니다. 또 '생명

    의 물'이라는 말도 못 알아듣고 있습니다.

    지금 두 사람 앞에 있는 우물이 깊어서 두레박이 있어야 물을 마실 수 있습니다. 그런데

    여자에게는 두레박이 있고 예수님에게는 없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지금 이 우물 말고

    어디 다른 곳에 두레박이 필요 없는 우물, 더 좋은 우물을 알고 있다는 말인가? 그래서

    여자는 '어디에' 그런 우물이 있는가? 라고 묻고 있습니다.

 

12절..<선생님이 저희 조상 야곱보다 더 훌륭한 분이시라는 말씀입니까? 그분께서 저희에게

    이 우물을 주셨습니다. 그분은 물론 그분의 자녀들과 가축들도 이 우물물을 마셨습니

    다.">--사마리아인들은 자기들을 야곱과 요셉의 후손으로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야곱이

    후손들에게 우물을 주고 그 우물에서 후손들과 가축들이 물을 마셨다는 내용은 구약성경

    에는 없는 내용이고, 그 지역의 전승일 것입니다.

    여자가 예수님께 '선생님이 저희 조상 야곱보다 더 훌륭한 분이시라는 말씀입니까?' 라고

    묻는 것은 예수님은 야곱보다 훌륭하지 않다, 위대하지 않다는 뜻으로 하는 말입니다. 따

    라서 예수님은 야곱이 후손에게 준 우물보다 더 좋은 우물을 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지금 여자의 말은 예수님을 비웃는 말입니다. 야곱이 이 우물의 물을 마셨다고 강조하는

    것은 이것보다 더 좋은 물은 없다는 뜻입니다. 자녀들과 후손들 외에도 '가축들도' 이 우

    물의 물을 마셨다는 것은 물이 풍부하다는 뜻입니다.

 

13절-14절..(13)<예수님께서 그 여자에게 이르셨다. "이 물을 마시는 자는 누구나 다시 목

    마를 것이다.> (14)<그러나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사람은 영원히 목마르지 않을 것이다.

    내가 주는 물은 그 사람 안에서 물이 솟는 샘이 되어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할 것이다.">

    --예수님은 10절의 말씀을 좀 더 분명하게 설명해 주십니다. '이 물을 마시는 자는 누구

    나 다시 목마를 것이다.' 라는 말은, 자연의 물은 일시적으로 육체적 갈증을 해소시켜 줄

    뿐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주시는 생명의 물은 하느님에 대한 갈증, 구원에

    대한 갈증, 생명에 대한 갈증을 해소시켜 주는 물입니다. 그 물은 갈증을 영원히 해소시

    키기 때문에 그 물을 마시는 사람은 영원히 목마르지 않게 될 것입니다. 또 그 물은 '그

    사람 안에서 물이 솟는 샘이 되어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할 것'입니다. 이 말은 그 물이

    사람 안에서 하나의 샘이 되어서 지속적으로 영원히 생명력으로 작용할 것이라는 뜻입니

    다. 예수님께서 그런 물을 주시겠다는 것은 곧 예수님 자신이 사람에게 구원과 생명을 주

    시는 분이라는 뜻입니다.

 

15절..<그러자 그 여자가 예수님께 말하였다. "선생님, 그 물을 저에게 주십시오. 그러면 제

    가 목마르지도 않고, 또 물을 길으러 이리 나오지 않아도 되겠습니다.">--여자는 아직도

    예수님 말씀을 알아듣지 못하고 그 물을 어떤 기적의 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예

    수님께 그 물을 달라고 청하고 있습니다. 여자의 말에는 비웃는 태도가 없습니다. 그 물

    을 달라고 청한다는 것은 여자의 태도가 한 단계 더 발전했음을 나타냅니다.

 

16절..<예수님께서 그 여자에게, "가서 네 남편을 불러 이리 함께 오너라." 하고 말씀하셨

    다.>--여자의 태도가 한 단계 더 발전함에 따라서 예수님도 좀 더 깊이 여자의 문제 속

    으로 들어가십니다. 남편을 불러오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여자의 죄를 들추어내기 위해서

    가 아니라 예수님이 여자의 삶을, 즉 여자의 갈증을 알고 있음을 나타내고 당신이 어떤

    분인지를 드러내기 위해서입니다.

 

17절-18절..(17)<그 여자가 "저는 남편이 없습니다." 하고 대답하자, 예수님께서 말씀하셨

    다. "'저는 남편이 없습니다.' 한 것은 맞는 말이다.> (18)<너는 남편이 다섯이나 있었지

    만 지금 함께 사는 남자도 남편이 아니니, 너는 바른 대로 말하였다.">--그 여자에게 남

    편이 다섯이나 있었다는 것이 합법적인 결혼을 다섯 번이나 했다는 뜻인지, 부정한 내연

    관계에 있었던 남자가 다섯 명이었다는 뜻인지는 알 수 없습니다. 어떻든 과거가 복잡했

    다는 것은 사실입니다. 더욱이 지금 함께 사는 남자가 합법적인 남편이 아니라는 것은 여

    자 자신의 말로도 확인이 되고, 예수님의 말씀으로도 확인되고 있습니다. 즉 지금 남자와

    함께 살고 있는 것은 정당한 결혼이 아니라 불법적인 동거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예수님은 사람들의 마음속이나 깊은 내면의 삶까지 꿰뚫어보시는 분으로 당신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그 사람이 어떤 처지에 있든지 구원의 손길을 내미는 분입

    니다. 지금 예수님은 도덕적으로 문제가 있는 여자를 신앙의 길로 이끌고 있습니다.

 

19절..<여자가 예수님께 말하였다. "선생님, 이제 보니 선생님은 예언자시군요.>--예수님이

    여자의 과거와 현재의 삶을 모두 꿰뚫어보시자 여자는 예수님을 예언자라고 부르고 있습

    니다. 이제 한 단계 더 발전한 것입니다. 여기서 여자가 말하는 예언자란 하느님의 사람

    이라는 뜻입니다. 즉 보통 사람과는 전혀 다른 특별한 분이라는 뜻입니다. 여자가 아직은

    예수님을 메시아로 알아본 것은 아니지만 점점 더 깊은 단계로 나아가고 있습니다.

 

20절..<저희 조상들은 이 산에서 예배를 드렸습니다. 그런데 선생님네는 예배를 드려야 하

    는 곳이 예루살렘에 있다고 말합니다.">--여자가 지금의 상황에서 예배 장소 이야기를

    끄집어내는 것은 마치 대화 주제를 바꾸려는 것처럼 갑작스러운 일로 보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여자가 자기의 부끄러운 결혼 생활 이야기를 피하려고 예배 장소 이야기를 꺼냈다

    고 볼 수는 없습니다. 19절에서 예수님을 예언자라고 부른 것과 연결해서 생각하면 여자

    의 말은 "선생님이 내 과거와 현재의 삶을 꿰뚫어보시는 것을 보니 예언자시군요. 선생님

    이 예언자시라면 참된 예배 장소가 어디인지 알려 주십시오." 정도의 뜻이 될 것입니다.

    아마도 여자는 유대인들과 사마리아인들 사이에 예배 장소에 대한 논쟁이 있음을 알고 있

    었던 것 같고 그것에 대해서 평소에 의문을 품었거나 참된 예배 장소가 어디일까 하고 생

    각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예언자로 보이는 예수님을 만나게 되자 평소에 궁금했던 문

    제를 물어본 것으로 해석됩니다. 어떻든 여자의 말을 계기로 해서 이제 예수님과 여자는

    신앙에 관한 대화를 나누게 됩니다.

    사마리아인들은 예루살렘 성전을 인정하지 않았고 예루살렘으로 순례도 가지 않았습니다.

    그러면서 그리짐 산에서 하느님께 예배를 드렸습니다. 유대인들이 사마리아인들의 신앙을

    인정하지 않은 것도 바로 그 점이 가장 큰 이유가 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사마리아인들

    은 사마리아인들대로 유대인들을 비판하고 반박했던 것 같습니다.

 

21절..<예수님께서 그 여자에게 말씀하셨다. "여인아, 내 말을 믿어라. 너희가 이 산도 아니

    고 예루살렘도 아닌 곳에서 아버지께 예배를 드릴 때가 온다.>--여기서 '여인아' 라는 말

    은 앞의 2장 4절에서 예수님이 어머니를 '여인이시여' 라고 부른 것과 같은 말인데, 사마

    리아 여자를 높여 부르는 존칭입니다. 따라서 '여인아' 라는 말보다는 '부인'으로 번역하는

    것이 적절합니다. 이것은 여자의 태도가 점점 발전하고 있음을 예수님도 인정하신다는 것

    을 나타내는 것으로 해석됩니다. (공동번역 성서는 아예 호칭 자체를 빼버리고 번역하지

    않았는데, 그것은 잘못된 번역입니다.)

    '내 말을 믿어라.' 라는 말은 특별한 뜻은 없고 예언을 할 때의 관용어와 같은 성격의 말

    입니다. 예수님은 그리짐 산도 아니고 예루살렘도 아닌 곳에서 하느님께 예배를 드릴 때

    가 올 것이라고 예언을 하십니다.

    여기서 강조점은 "너희가 ... 아버지께 예배를 드릴 때가 온다." 라는 말에 있습니다. 즉

    사마리아 사람들도 예수님께서 가르쳐 주시는 대로 하느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면서 예배를

    드릴 때가 온다는 것입니다. 그때에는 예배 장소는 중요하지 않게 될 것입니다. 하느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면서 예배를 드릴 때가 온다는 말은 유대인들에게 멸시를 받으면서 살았

    던 사마리아인들에게는 큰 위로가 되는 말입니다. 하느님께서 사마리아인들과 유대인들과

    모든 사람들을 다 똑같이 자녀로 받아주신다는 말이기 때문입니다.

    (공동번역 성서는 '사람들이' 라고 번역했는데 이것은 오역이고 '너희들이' 라고 번역해야

    합니다. 또 공동번역 성서의 '굳이 장소를 가리지 않아도 될 때' 라는 말은 원문에 없습니

    다. 원문대로 하면 장소를 가리지 않는다는 뜻보다는 그리짐 산도 예루살렘도 예배 장소

    가 아니라는 뜻이 더 강합니다.)

 

22절..<너희는 알지도 못하는 분께 예배를 드리지만, 우리는 우리가 아는 분께 예배를 드린다.

    구원은 유다인들에게서 오기 때문이다.>--'너희는 알지도 못하는 분께 예배를 드린다.'

    라는 말은 사마리아인들이 하느님을 섬기는 것은 신앙심에 의한 것이 아니고 정치적

    인, 또는 민족적인 이유에서 섬기는 것임을 지적하는 말입니다. '우리'는 유대 민족을 가

    리킵니다. '우리는 우리가 아는 분께 예배를 드린다.' 라는 말은 유대인들이 하느님을 섬

    기는 일의 정통성을 인정하는 말입니다.

    '구원은 유다인들에게서 오기 때문이다.' 라는 말은 구세주(메시아)가 유대인 가운데서 나

    온다는 뜻입니다. 이스라엘 민족이 하느님의 선택을 받은 것은 분명하고 선택받은 민족으

    로서 여러 가지 특권을 가지고 있다는 것도 분명한 사실입니다. 여기서는 다른 곳에서와

    는 달리 '유대인'이라는 말이 긍정적인 뜻으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23절..<그러나 진실한 예배자들이 영과 진리 안에서 아버지께 예배를 드릴 때가 온다. 지금

    이 바로 그때다. 사실 아버지께서는 이렇게 예배를 드리는 이들을 찾으신다.>--'진실한

    예배자들'은 하느님을 참되게 섬기는 사람들입니다. '하느님을 참되게 섬기는 것'은 곧 '영

    과 진리 안에서' 섬기는 것입니다. 24절에 '하느님은 영이시다.' 라고 되어 있으니 '영 안

    에서' 아버지께 예배를 드리는 것은 하느님의 영 안에서 예배를 드리는 것입니다. 이 말

    은 진실한 예배를 드리기 위해서는 성령으로 다시 태어나야 하고(3장 3절-8절), 또 성령

    으로 가득 차야 한다는 뜻입니다. '진리 안에서' 아버지께 예배를 드린다는 말은 예수님께

    서 가르쳐 주신 진리 안에서, 즉 예수님을 믿고 예수님의 가르침을 실천하면서 하느님을

    섬기는 것을 뜻합니다. (공동번역 성서는 '영적으로 참되게' 라고 번역했는데 원문대로 번

    역하면 '영과 진리 안에서'입니다.)

    '때가 온다. 지금이 바로 그때다.' 라는 말은 겉으로는 모순된 말로 보입니다. 그러나 이

    말은 '이미 시작되었고, 장차 완성될 것이다.' 라는 뜻입니다. 하느님께 참되게 예배를 드

    리는 때는 이미 예수님 안에서 시작되었다는 것입니다.

    '아버지께서는 이렇게 예배를 드리는 이들을 찾으신다.' 라는 말은 '아버지께서는 사람들

    이 이렇게 예배를 드리기를 바라신다.' 라는 말로 해석됩니다. 이 말은 사마리아 여자에게

    진실한 예배자가 되라고 권고하는 말이기도 합니다.

    23절은 21절의 말을 보충 설명한 것입니다. 21절과 23절에 모두 '예배를 드릴 때가 온

    다.' 라는 말이 있는데, 낡은 예배는 끝났고 새로운 예배가 시작되었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24절..<하느님은 영이시다. 그러므로 그분께 예배를 드리는 이는 영과 진리 안에서 예배를

    드려야 한다.">--'하느님은 영이시다.' 라는 말은 '영과 진리 안에서' 예배를 드려야 하는

    이유를 설명하는 말입니다. 이 말은 하느님은 모든 지상적이고 인간적인 본질과 다른 분

    이며 더할 수 없이 거룩하고 고귀하신 분이라는 뜻입니다. (공동번역 성서는 '하느님은 영

    적인 분이시다.' 라고 번역했는데 원문대로 '하느님은 영이시다.' 라고 번역하는 것이 적절

    합니다.) 하느님은 영이시기 때문에 '육에서 태어난'(3,6) 사람은 하느님께 진실한 예배를

    드리기 위해서는 성령으로 다시 태어나야 합니다. 또 그 다음에는 '영과 진리 안에서' 예

    배를 드려야 합니다. 따라서 진실한 신심이 없는 예배, 형식적이기만 한 예배는 사이비에

    지나지 않습니다.

 

25절..<그 여자가 예수님께, "저는 그리스도라고도 하는 메시아께서 오신다는 것을 압니다.

    그분께서 오시면 우리에게 모든 것을 알려 주시겠지요." 하였다.>--여자는 예수님의 말씀

    을 다 알아듣지는 못했지만 어느 정도는 받아들이기 시작합니다. 그러면서 메시아가 오시

    면 모든 것을 알려 줄 것이라는 희망을 이야기합니다. 사마리아인들은 '타에브'(재림하는

    자) 라는 메시아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여기에서 '그리스도라고도 하는 메시아'

    라는 말은 '유대인들이 말하는 메시아' 라는 뜻으로 해석됩니다. 또는 복음서 저자가 히브

    리어를 모르는 사람들을 위해 '그리스도라고도 하는'이라는 말을 삽입한 것일 수도 있습

    니다. 당시 사람들은 메시아는 인간들이 알고 싶어 하는 모든 것을 알려 주시는 분이라고

    생각하기도 했습니다.

    25절은 여자가 예수님의 말씀을 어느 정도는 알아들었어도 다 이해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고백하는 말이기도 하고, 자기가 그동안 메시아를 기다리고 있었음을 고백하는 말이

    기도 합니다.

 

26절..<그러자 예수님께서 그 여자에게 말씀하셨다. "너와 말하고 있는 내가 바로 그 사람

    이다.">--26절을 원문 그대로 직역하면, "예수님께서 그 여자에게 말씀하셨다. 나다. 너

    에게 말하고 있는."입니다. "나다." 라는 말은 밤에 호수에서 풍랑에 시달리는 제자들에게

    가셔서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 하셨을 때의 그 "나다." 라는 말과 같고, 모세가 하느님

    께 이름을 물었을 때 하느님께서 "나는 나다." 라고 대답하신 말과 같습니다. 따라서 여기

    서 "나다." 라는 말 자체가 "내가 메시아다." 라는 뜻이 됩니다. "너와 말하고 있는" 이라

    는 말은 앞의 25절에서 여자가 '모든 것을 알려 주시겠지요.' 라고 희망을 말한 것에 대

    한 답변으로 해석됩니다. 즉 '내가 다 말해 주겠다.' 라는 뜻이 들어 있는 것으로 봅니다.

 

27절..<바로 그때에 제자들이 돌아와 예수님께서 여자와 이야기하시는 것을 보고 놀랐다.

    그러나 아무도 "무엇을 찾고 계십니까?", 또는 "저 여자와 무슨 이야기를 하십니까?" 하고

    묻지 않았다.>--예수님과 여자의 대화가 끝나고 8절에 먹을 것을 사러 간 것으로 언급되

    었던 제자들이 돌아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이 여자와 이야기하는 모습에 놀랍니다. 사마

    리아 사람과 이야기하는 것에 놀란 것이 아니라 여자와 이야기를 하고 있다는 것에 놀란

    것입니다. 당시 유대 남자들, 특히 랍비들은 외간 여자와 이야기하는 것을 삼가는 것이

    전통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예수님이 그 여자와 무슨 이야기를 하셨는지,

    그 여자에게 무엇을 청했는지 묻지 않습니다. 이것은 예수님에 대한 제자들의 존경심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28절..<그 여자는 물동이를 버려두고 고을로 가서 사람들에게 말하였다.>--여자의 고을은

    5절에서 말했던 시카르일 것입니다. 여기서는 물동이만 언급하고 있는데 아마도 두레박도

    버려두고 갔을 것입니다. 이것은 여자가 자기에게 일어난 일을 다른 사람들에게 전하기

    위해 급하게 갔다는 것을 나타낸 것으로 볼 수 있는데, 예수님께서 물을 마실 수 있도록

    두레박과 물동이를 두고 간 것으로 볼 수도 있습니다.

    여자는 '내가 메시아다.' 라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을 믿었습니다. 그는 예수님에게서 깊은

    감화를 받았고, 마음에 기쁨이 넘칩니다. 이것은 아마도 자신의 삶의 갈증을 해소시켜 줄

    분을 만났다는 기쁨일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다른 사람들에게 자기의 기쁨을 전하기 위

    해서 급하게 갑니다. 이것은 분명히 기쁜 소식을 전하는 사람의 모습입니다.

 

29절..<"제가 한 일을 모두 알아맞힌 사람이 있습니다. 와서 보십시오. 그분이 그리스도가

    아니실까요?">--여자가 자기가 한 일을 모두 알아맞힌 사람이 있다고 말하는 것은 자기

    의 과거를 꿰뚫어본 신비스러운 사람이 있다는 뜻입니다. 1장 39절의 '와서 보아라.' 라는

    말과 1장 46절의 '와서 보시오.' 라는 말은 초대한다는 뜻으로 하는 말인데, 여기서 '와서

    보십시오.' 라는 말은 '같이 가서 보자.' 라는 뜻으로 하는 말입니다. (공동번역 성서는 '같

    이 가서 봅시다.' 라고 의역했습니다.)

    '그분이 그리스도가 아니실까요?' 라는 말은 겉으로 보기에는 반신반의하는 말로 보이지

    만 여자의 반신반의를 나타내는 말이 아니라 사람들에게 한 번 깊이 생각해 보라고 권고

    하는 뜻의 말입니다. 뒤의 39절을 보면 다른 사람들이 여자의 증언을 듣고 예수님을 믿게

    되었다는 말이 나오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여자 자신은 이미 믿음을 가졌고, 다른 사람들

    에게 자기의 믿음을 증언한 것입니다.

    여자는 예수님을 처음에는 '당신'으로 불렀고(9절), 그 다음에는 '선생님'(11절), 그 다음

    에는 '예언자'(19절)로 불렀습니다. 그런데 이제 사람들에게 예수님을 '그리스도' 라고 소

    개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예수님을 만난 여자의 변화 과정을 나타냅니다. 처음에는 낯선

    유대 남자로만 생각했던 예수님을 드디어 그리스도로 믿게 된 것입니다.

 

30절..<그리하여 그들이 고을에서 나와 예수님께 모여 왔다.>--주민들이 여자의 말만 듣고

    모였다는 것은 당시 사고방식으로는 놀라운 일입니다. 그만큼 그 여자의 태도가 대단히

    설득력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이 설득력은 여자를 통해서 전해진 계시의 힘입니다.

 

송영진 모세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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