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서 주간 특집] 디지털 시대, 성경 쓰고 머무르며 하느님과 만나기
쓰면 쓸수록 풍성해지는 은총… 성경 필사 자체가 하느님 향한 기도 - 2014년 10월 열린 제20회 수원교구 성경잔치에 전시된 성경 필사본들. 가톨릭신문 자료사진. 온라인상에서 터치 한 번으로 수많은 정보를 얻을 수 있는 디지털 시대. 빠르게 많은 정보를 얻을 수 있다는 특징은 정보가 빠르게 잊힌다는 의미를 내포한다. 성찰하며 머무르기 어려운 시대를 살고 있는 우리는 신앙을 하나의 정보로 소비하고 있지 않을까. 성서 주간을 맞아 하느님의 말씀에 머무르고 성찰할 수 있는 방법을 알아본다. 하느님 말씀, 기록으로 전해지다 성경은 기록에서 시작됐다. 하느님의 계시와 계약을 통한 하느님 체험을 기록한 구약성경은 구전으로 전승되다 1000여 년의 시간을 거쳐 인간의 언어로 기록됐다. 신약성경 역시 후대에 예수의 말씀과 업적을 전하기 위해 반세기에 걸친 기록 작업을 거쳐 완성됐다. 성경의 저자는 하느님이지만 하느님의 영감을 받은 사람들이 기록한 덕분에 ‘성경’이라는 이름으로 지금까지 전해질 수 있었던 것이다. 식물의 줄기인 파피루스에 성경을 필사했던 역사는 ‘바이블’(Bible)이라는 단어와 관련이 있다. 파피루스의 중심 무역지였던 고대 페니키아의 항구 ‘비블로스’가 영어의 ‘바이블’(Bible)이라는 말로 이어졌기 때문이다. 사해지역 유다 광야에서 발견된 사해사본은 가장 오래된 성경 필사본으로 알려져 있다. 1947년 쿰란지역에서 베두인족 목동 무하마드 아드 디브에 의해 첫 동굴이 발견된 후, 1956년까지 모두 11개 동굴에서 850여 종류의 사본들이 발견됐는데, 이 사본들은 기원전 2세기부터 기원후 1세기까지 필사된 것들이다. 땅속에서 발굴된 도시는 두겹의 성벽으로 된 에세네파의 수도원이라고 알려졌다. 에세네파는 유다교의 한 종파였다. 이곳에는 공동 식사를 위한 대형 식당과 주방, 성서를 베끼는 필사실 등이 있었다. 에세네파 수도자들에게 가장 중요한 일은 성경 연구와 성경 필사였다. 파피루스나 양피지에 일일이 성경을 써내려간 수도자들은 서기 70년경 로마군의 예루살렘 진격이 임박하자 모든 두루마리 필사성경을 동굴에 감추고 흩어졌다. 오래전 누군가가 하느님의 말씀을 기록한 덕분에 후대에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와 초대 그리스도교의 기원에 관한 역사에 한걸음 더 다가갈 수 있게 된 것이다. - 붓으로 성경 필사를 하고 있는 석창우 화백. 가톨릭신문 자료사진. 성경 읽고 쓰며 하느님과 가까워진 수도자들 15세기 독일의 구텐베르크가 금속활자로 성경을 인쇄한 이래, 인쇄된 성경이 빠르게 보급됐지만, 성경 필사는 여전히 중요한 일로 여겨졌다. 정성스럽게 성경을 써내려가는 행위가 하느님을 향한 기도라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중세교회의 수도회는 성경을 읽고 쓰는 행위를 신앙생활의 중요한 부분 중 하나로 여겼다. 성경을 중심으로 영성 생활을 펼쳤던 교부로는 클레르보의 베르나르두스(1090-1153)를 꼽을 수 있다. 고대 교부들의 방법론을 따라 철저하게 성경과 교부들의 성경 주석을 중요한 가르침으로 생각했던 베르나르두스는 성경에 집중함으로서 그리스도의 신비에 깊이 빠져들었다고 전해진다. 베르나르두스는 그리스도의 신비를 계시하는 성경은 교회 안에서 또 교회에 의해서만 바로 이해될 수 있다고 여겼다. 따라서 그리스도인이 그리스도의 신비와 동화돼 완전해지려면 교회의 교리, 성사 및 전례 생활에 참여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1084년에 성 브루노(1030-1101년)가 설립한 카르투시오회 수도원의 영성도 은수생활과 성경 묵상으로 완성됐다. 세상과 단절되어 침묵 속에서 고독한 은수 생활을 실천하던 카르투시오회 수도자들은 성경 말씀과 함께 영적 독서를 실천하면서 관상 기도에 깊이 들어가고자 했다. 이들은 침묵과 고독 가운데 성경 필사 작업을 주로 하면서 성경을 깊이 묵상했고, 이를 통해 비로소 하느님 안에서 자유로워진다고 믿었다. 카르투시오회 수도원은 훗날 ‘거룩한 독서’ 방법론을 발전시키는 데 크게 이바지한다. 슈폰하임 수도원 원장이었던 요하네스 트리테미우스(1462~1516)는 「필사생의 찬미」(De laude scriptorum manualium)라는 책에서 “성경 필사를 통해 소중한 시간이 가치있게 쓰이고, 성경에 관한 이해가 높아지며, 믿음의 불꽃이 밝게 타오르고, 내세에 큰 보상을 받게 된다”고 그 의미를 밝히고 있다. - 점자로 성경을 필사하고 있는 모습. 가톨릭신문 자료사진. 시대가 변해도 성경은 여전히 주님과 함께할 수 있는 힘 박해시대, 한국 신자들의 성경 필사는 신앙을 보급하기 위한 수단이자 신앙을 지키기 위한 간절한 행위였다. 1864년 목판 인쇄소가 생기기 전까지 신앙선조들은 필사를 거듭해 한글로 성경 말씀을 전하고자 노력했다. 신앙의 자유를 찾은 뒤에는 하느님과 보다 가깝게 만나기 위해 신자들은 성경을 써내려갔다. 성경 필사를 봉헌한다는 개념은 1990년대에 이르러 이뤄졌다. 이후 본당 설립 기념일, 새 성당 봉헌식 등 특별한 행사를 앞두고 성경을 필사한 신자들은 자신의 노력과 믿음이 담긴 필사본을 봉헌하며 기쁨의 순간에 동참하고 있다. 2005년 새번역 성경의 완역은 신자들의 성경 필사의 의지를 북돋는 계기가 됐다. 이듬해 4월에는 서울대교구 가톨릭인터넷 굿뉴스에 ‘성경쓰기’ 코너를 열어 온라인상에서 성경쓰기에 동참할 수 있는 장을 마련했다. 2006년 4월 20일 시작된 성경쓰기는 2022년 11월 14일 기준 17만2261명이 참여하고 있다. 온라인으로 성경을 쓸 수 있는 이 프로그램은 교회 행사에 참여하기 어려웠던 젊은층이 성경과 가까워질 수 있는 계기를 만들었다는 점에서 긍정적으로 평가된다. 또한 코로나19로 인해 대면으로 신앙생활을 할 수 없는 상황에서 온라인 성경쓰기는 신앙생활의 대안으로 주목받으며 신자들이 호응이 높았다. 주교회의 성서위원회 위원장 신호철(비오) 주교는 2022년 성서주간 담화문을 통해 “말씀에는 ‘주님께서 언제나 우리와 함께 계시며, 그래서 우리가 이미 구원받았음’을 깨닫고 체험하게 하는 힘이 있다”고 밝혔다. 자유롭게 신앙생활을 할 수 없었던 신앙선조들에게 말씀을 읽고 쓰는 시간은 주님과 함께할 수 있는 유일한 시간이었다. 그 뒤로 몇 백 년이 지난 지금, 코로나19라는 또 다른 이름의 박해로 성당에 갈 수 없었던 신자들에게 그 의미는 여전히 유효하게 작용했다. 아흔이 넘은 나이에 성경 전체를 필사한 한 신자는 “하느님 말씀을 쓰며 행복해졌다”고 말하는가 하면 암 투병 중 성경 필사를 완성한 한 신자는 “주님의 은총을 받고 인도하심을 느끼는 시간이 됐다”고 말한다. 성경을 쓰며 행복해지고 주님의 은총을 느꼈던 신자들의 체험은 하느님이 지금 내 곁에 살아계심을 일깨우고 있다. [가톨릭신문, 2022년 11월 20일, 민경화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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